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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mang Jul 31. 2023

살아낸 여자들의 이야기

김나은 <세 여자의 사랑>, 출판사 이매진



살아낸 여자들의 이야기에 푹 빠지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사랑하는 나의 할머니가, 나의 엄마가 바로 떠오르니 그럴 수밖에. 책 속의 여성들과 나의 일상 속 그녀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지독하게 삶을 견뎌냈다. 고문에 가까운 상황을 견뎌내면서도 마음껏 울지 못해 마음의 병을 오래간 지녀온 채 늙어버린 여자들. <세 여자의 사랑>의 할머니 임순이 그랬고, 엄마 도희가 그랬듯 나에게도 비슷하거나 다른 모양으로 얽힌 여자들이 있다. 

 

그래서 책을 읽으며 자주 울었고, 필사하며 또 울었다. 책을 읽고 내 생각을 정리해 써보고 싶었는데 며칠을 묵혀도 내 말이 떠오르지 않아 내내 답답했다. 그러던 중 친정에 2박 3일 일정으로 다녀오게 되었고, 나는 엄마와 나의 할머니가 마구 내뱉는 말을 온몸으로 맞아야 했다. 맨몸으로 나선 길에서 폭우를 만나 온몸이 축축했고 집에 돌아와서는 두통에 몸살에 우울증까지 심해져 화가 올랐다 눈물이 났다 제멋대로였다. 


그녀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는 것은 나에게 포기하고 싶지 않은 과제인데. 강요하는 사람도 없고, 마감일이 정해진 것도 아니니 하지 않아도 그만인 이것을 나는 왜 계속 부채감에 시달리면서 시도하고 또 시도하는 것일까. 상황이 이러고 보니 이름 붙이기 어려운 감정들의 굴곡 속에서도 인터뷰를 이끌어가고 서로 간에 대한 이해를 조금씩 시도해 보고 행복감을 맞보기까지 하는 이 과정을 해낸 작가를 지금은 존경까지 하게 되었다.

 

<세 여자의 사랑>은 도저히 열리지 않을 것 같은 말문이 열리는 소중한 과정이 담긴 책이다. 김나은 작가는 할머니 임순과 대화를 나눈 시간과 장소 그리고 무엇을 먹었고 하는 등의 기록도 성실하게 남겨준다. 덕분에 읽는 이에게 구술 과정과 할머니 임순의 과거가 현재와 유기적이고 생생하게 다가온다. 활자 안에 박힌, 멈춰진 사람이 아닌 책 속에서 지금도 살아 숨 쉬고 맛있는 한상을 손녀에게 차려주며 뿌듯해하는 임순으로 새 역사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 독자인 나에게까지 활력을 주었다. 

 

친족을 인터뷰하고 활자로 옮기는 과정이 결국 “나를 확인받고 싶은 마음이었다.(259쪽)”고 말하는 작가의 고백에 눈물이 줄줄 흘렀다. 성별이 여아라는 것을 들키지 않아 태어날 수 있었던 ‘딸’로 가질 수 있는 공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마음 닫힌 이의 말을 길러내는 일은 쉽지 않다. 평생 말할 기회를 가져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더 그럴 것이다. 질문을 받아본 적 없는 이들의 언어는 자아를 찾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된 적이 없다. 대를 이어오던 것을 답습하고 인내하며 받아온 강요를 다음 세대에 물려주며 그들은 말을 잃는다.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했던 늙은 여성들은 자신의 언어를 찾아 투쟁하기에 가진 자원이 없었다. 생사 여탈권을 남성들에게 담보 잡힌 채 순치되어 노동을 강요받는다. 그렇게 짜인 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경우 생존하지 못한다는 것을 학습한 그들은. 몸과 머리를 욱여넣는다. 자연히 말을 잃고 생각을 빼앗긴다. 그런 그들이 ‘드디어’ 말한다는 것은 늦기 전에 ‘나’의 삶을 살아보겠다는 선언과 같다. 그 선언은 끊임없이 변주되어 여러 세대를 거친 여성들에게 흘러간다. 이제 이 이야기는 나에게 도착했다. 나는 나의 언어로 나의 늙은 여성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세 여자의 사랑>의 10 문장

- “내 이름 부르는 사럼 많지는 않앴다.”(16쪽)

- 임순은 내게 반성과 헌신을 원했고, 나는 임순의 진심과 이야기를 원했다.(41쪽)

- 한 가정이 겪어야 할 끝없는 상호 착취, 집이라는 문 안쪽에 네 명이 모여 있으려면 외면하고 참아야 하는 고통 때문이었다.(133쪽)

- “그래서 공부 안갈친 거라 허대. 나 주저앉힐려구. 배왔으믄 아주 나돌았을라나벼.”(219쪽)

- 내가 고르게 해줄지는 몰르나, 헐 수만 있다믄, 다음 생엔 남자로 태어나구 싶다.”(246쪽)

 

- “네가 알아야 할 건 단 하나야. 사랑한다는 거. 할머니도, 나도, 아빠도, 모두 다 너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거. 언제가 그걸 가지고 산다는 거.”(258쪽)

- 상처 속에서도 뭔가를 건네는 일, 그러니까 이야기하는 행위가 사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탓에 내 인터뷰는 순전히 이기적인 동기가 숨어 있었다. 나를 확인받고 싶은 마음이었다.(259쪽)

- 삶에서 정말 중요한 일들은 이야기의 이면, 말로 전할 수 없는 영역에서 벌어진다.(263쪽)

- 정년에서 임순, 도희까지 똑똑한 여성들은 정도는 다르지만 ‘미친 여자’로 그 세월을 견뎌왔다.(271쪽)

- 인간의 생로병사라는 최전선을 몇 번이고 도맡아온 사람이다. 임순의 과거, 현재, 미래에서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2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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