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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ssoud Jun Aug 25. 2020

코로나로 본 프랑스와 한국의 의료

한국 의료 기술과 체계의 위대함


 프랑스 병원


 프랑스에서 살 때, 여러 번 병원에 다녔다.

프랑스에서 군대를 다니면서 짬밥 2년 정도부터 달고 살던 습진과 치질, 역류성 식도염 때문에 여러 번 치료를 받았지만 의무대나 군 병원의 치료는 거의 효과가 없었다. 제대 말년에는 두 다리 모두 장딴지 파열 때문에 군 병원에서 수술까지 받아서 나름 프랑스의 병원 시스템에 대해 경험이 있었다. 군 통합병원이라는 특수성 외엔 일반 병원과 다르지 않아, 입원 중에도 엄격한 명령체계를 따르지 않을까 하는 염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물 만난 고기처럼 자유를 즐겼다. 그렇게 군대에서는 시키는 일만 하다 보면 틀림없는 행정이 언젠가는 이뤄졌다.


 그렇게, 군대에서야 군의관이 있었지만 제대를 하고 나서는 민간 의료시설에 지정된 의사가 있어야 했기 때문에, 아픈 곳이 있으면 종합병원 응급실에 진단 신청을 하고 무작정 기다렸다. 군대에서 가진 지병은 제대하고서도 오랫동안 개고생을 했던 탓에 완치될 수 없는 지병처럼 달고 살았다. 그러면서도 군말 없이 불만이 없었던 것은 프랑스의 의료체계에 대한 신뢰와 의사들에 대한 존중이 밑바탕 됐다.


 군 병원도 마찬가지였지만 공립병원이든 민간병원이든, 의사들의 지긋하게 나이 든 모습과 미소를 잊을 수 없다. 오랜 기다림을 아는지, 병에 대한 고통을 아는지, 순진하고도 천사 같은 얼굴로 환자를 대하는 모습에서부터 마음이 무장해제되어 진료를 받았다. 의료 전문 용어들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외국인이라 간단하게 오가는 문답에도 세심한 배려가 느껴졌는데, 대부분 약 처방을 해주거나 전문 병원을 소개해 주었다. 큰 병원에 오면 다 되겠거니 만병통치 한국과는 달리, 병명에 따라 개인 병원을 가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기다림의 시간은 길었으되 의사의 인자함에 병이 낫는 것 같았고 병원 예약과 기다림에 병이 재발되는 것 같은 프랑스 생활이었다.


 치질과 습진을 그렇게 달고 살았지만 그나마 군대를 제대하고 나니 조금 누그러져 잊고 살다가 다시 재발하면 꼼짝없이 같은 기다림을 반복하고 난 뒤, 의사 처방전을 받아야 약을 탈 수 있었다. 그렇게 치료를 했는데도 재발하던 병이라, 프랑스에서도 못고치면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고 살았다. 그렇게 여행사 가이드를 하게 되고 여행객들이 병원에 가야 할 일이 생기면 꼼짝없이 통역을 해줘야 했는 데다, 바쁜 시간을 하루 종일 기다릴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이 제일 큰 것에 비해, 진료비용은 거의 들지 않았다.


 병원의 의사나 간호사들은 전혀 서두르지 않았고 바쁜 일이 없는 것 같이 차분함 속에 환자들은 계속 기다렸고 마치 기다리는 것이 환자들의 일인 것처럼 실제로 진찰을 보는 시간은 짧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지만 의사도 간호사도 진료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게끔 일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일하는 것만큼 휴식 시간을 중요하게 여겼고 환자들도 인정을 해주기 때문에 대기하는 시간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런 시스템은 마트도 행정기관도 마찬가지였다. 디지털이 지배하는 한국 사회의 빠른 행정시스템에 비해, 아직도 아날로그 체계를 벗어나지 못한 선진국 프랑스는 고여있는 물처럼 변화가 느렸다. 아니, 오래된 체제에 안주하고 있는 것 같아, 경제면에서는 조만간 한국에게 따라 잡힐 것 같았다.


 또한 프랑스는 큰 병원 외에 개인 병원이나 전문의를 길거리에서 찾아보기가 힘들 만큼 병원이 모자라는 줄 알았다. 프랑스에서 의사가 되는 비율이 낙타가 바늘구멍 뚫는 것보다 힘들 정도의 어마어마하게 높은 경쟁률과 그 경쟁에서 20% 정도의 우수한 인재만이 자격을 취득한다는 얘기를 듣고 후덜덜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반면에, 한국에서 의사가 되기 위한 과정과 맞물려, 한국에 오면 주요 도시, 번화가마다 메디컬센터 건물들이 휘황찬란한 간판을 내세우는 것과 비교됐다. 왜냐하면 프랑스는 인구 1 천명당 임상의사 수가 우리나라의 배, 3.3%(우리나라 1.7%, 미국 2.7)에 달했고 공공의료 비용 지출이 우리나라의 거의 세 배에 달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의료인의 다양성, 다인종, 그들은 개인의 자유에 와 사회석 연대를 가장 소중한 가치로 여긴다.

 그 밖에도 OECD 국가 중 의료 만족도 1순위라 개인 부담금이 거의 없이 의료 보장 범위가 아주 넓어 프랑스인 모두가 혜택을 받았다. 그러나 프랑스 의사들의 평균 연봉은 1억 정도로 병원 주차장에 가보면 우리나라 의사들처럼 고급차량을 타는 이는 거의 없을 정도로 검소하고 시민친화적이다. 따라서 의사들의 영향력 때문에 간호사 등, 병원 근무 직원들조차도 서두르지 않고 느긋한 행정에 익숙해져 있다.


 그런 그들이기 때문에, 하루에 환자를 보는 인원수는 극히 제한적이고 그들이 일하는 병원은 아주 멋진 고성에서 일하는 것처럼 멋진 정원과 카페테라스를 갖추고 있다. 거기에 각 병원마다 최첨단 의료기기는 물론, 프랑스 최고의 지성으로 알려진 의사들이 돈보다 명예를 더 소중히 여긴다니! 과연 존중하지 않을 수 없는 데다 '국경 없는 의사회'를 만들어 희생이 무엇인지를 직접 실천하고 다닌다니, 그들에 대한 신뢰가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그들이기에 느리게, 여유를 갖고 제한적인 진료를 하는데도, 노인 인구수가 우리나라의 배 이상이고 영아 사망률은 낮은 데다 기대수명도 우리나라보다 4%나 높았다. 그런 그들의 느림의 미학은 일과 시간에서야 집중력을 발휘한다고 해도 휴식과 퇴근은 철저했고, 가정의 일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길 만큼 가족관계가 최우선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프랑스의 의료 체계에 대한 신뢰와 존중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빨리빨리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은 마트를 가도, 병원을 가도 속 터져 화병 나지 않을까...... 


파리 근교 뱅센느 숲에 위치한 군 병원 BEGIN




 

한국


 2011년 프랑스로 떠난 지 15년 만에 한국으로 와서, 마침 인천에서 메디컬 센터를 운영하는 친구의 도움으로, 처음으로 습진, 치질, 역류성 식도염 증상 치료를 하루에 같은 건물을 옮겨 다니면서 받았다. 즉시 진단 결과까지 나오고 치료약을 받고 각각의 치료를 동시에 시작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지병들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말끔하게 나아버렸던 것이다. 이 경이롭고 기적 같은 경험을 통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한국의 의료 기술이 프랑스를 앞질렀다는 판단을 해버렸다. 무엇보다 세 가지 병을 하루 만에 다 진료를 보고 처방전을 받아 20년 가까이 달고 살던 지병을 무려 한 달도 채 안되어 깔끔하게 퇴치되는 것은 기적이었다.

 

 기분 좋게 의사 친구들과 저녁을 먹으면서 그 기적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프랑스에서 열리는 의사 세미나 때문에 왔다가 만난 친구였는데 늘 긍정적인 마인드에, 근면 성실함이 몸에 베인 친구였다. 사람들을 대하는 것도, 직원들을 대하는 것도 무엇하나 모자람 없이 편하게 해 주면서도 웃음과 끊임없는 노력을 아끼지 않아 귀감이 되는 친구였다. 그 친구가 다른 의사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 새롭게 들어올 의사의 급여 얘기를 꺼냈다.


"하루에 환자 100명 정도 볼 능력 되면 그 정도 줄 수 있어!"


 그 얘기를 듣고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루에 100명의 환자를 본다는 게 연봉을 결정짓는 조건이라니! 프랑스의 의사들이 하루에 환자를 보는 숫자가 30여 명은 될까 싶은데, 내가 놀라 친구에게 물었다.


"100이면 너무 스트레스받는 거 아냐?"


"하하, 300명 정도는 봐야지, 그게 한국 의료 체계야!"


 거제도에서 낚시로 소일하다가 코로나 소식을 들은 날, 거짓말처럼 거리에서 사람들이 사라진 것을 목격했다. 조선업 불황으로 사람이 없던 옥포 거리에 겨울 한파와 더불어 닥친 전염병 소식은 우울한 겨울 하늘과 휑한 바람만 휩쓸고 다녔다. 이윽고 중국인 봉쇄령과 전 세계인들의 아시아인 인종차별의 광풍과 함께 세계인들이 국경을 닫는다는 소식이 들렸고 정부의 무능을 질타하는 여론이 여기저기 형성됐다. 예전처럼 공포 분위기로 몰아가는 여론 탓에 집에서 한 발짝이라도 나가면 당장이라도 병에 걸릴 공포감이 엄습했다.


 사스니, 메르스니 각종 전염병이 창궐했을 때, 프랑스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전염병에 대한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으므로 남의 나라 얘기처럼 흘려들으면서도 한국에서의 상황은 공포만 전해주는 것 같아 자료를 찾아보았다. 확진자와 사망자에 비해 엄청난 공포만 남았던 기억이 났다. 때문에, 서서히 세계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와 3월에 평택으로 올라가 일상으로 복귀했다. 엄청난 수의 노동자들이 살을 맞대고 일하는 평택 반도체 현장은 대구 신천지 코로나 사태로 인해, 대구 쪽에서 오는 사람들에 대한 자발적 조사만 이뤄졌음에도, 여론에서 부추기는 공포에 비해 평온한,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평온한 일상이 이어졌다.


 거기에, 의료진들이 자발적으로 대구에 내려가 총력을 다하는 모습에서, 한국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상부상조의 전통과 협동이 살아있음을 발견하고 진짜 모습일까 궁금했다. 내가 어설프게 인식하고 있던 한국 의사들 수준은 열심히 공부해서 돈과 명예(돈에 의한), 권력(돈과 학벌에 의한)을 갖기 위한 수단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담당의에게 한국 의료체계가 프랑스보다 훨씬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에 대해, 의사들에게 많은 권한이 생기고 의료기기 값이 비싸야 한다고 말하면서 의료복지가 과도하다는 불만이 정권에 대한 비토로 이어졌는데, 대부분 의료 민영화를 해야 한다는 식으로 조심스럽게 말하던 그들이었기에, 도대체 누가 대구로 내려가 자발적 의료봉사를 했는지 궁금했다.


 우선 군의관, 공중보건의를 제외한 대부분의 민간 의료인이 대구로 결집되어 밤낮 없는 헌신과 투쟁이 이어졌다. 의사들이 좀 바쁘고 귀한 인력이던가! 시간을 빼기도 어려울 텐데 자신의 일에 이득이 되지 않을 헌신을 위해 대구로 몰려든 의료진들의 희생을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해석됐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의 희생이 난관을 극복하는 위대한 휴머니즘을 우리나라의 '상부상조(연대의식)'로 이해했다. 나는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으면서 감 놔라 배 놔라 참견하면서도 우리나라에도 사회정의가 살아있다고 안도하기도 했다.



*** 보스와 리더



 세월호가 쓰러지자 자발적으로 투입됐던 잠수부들이 해양경찰의 통제를 받으면서 구조에 투입되지 못하고, 꽃 같은 아이들이 죽는 모습을 생중계로 지켜본 기억이 아직도 트라우마로 남아 있었다. 세월호에 정부 권력이 진실을 감추는 주동자였고 교통사고와 같다고 나팔을 불었던 언론들이 정권의 나팔수가 되어, 사회를 정치적 이념으로 갈라놓았던 기억으로 인한 불신의 고리는 깊고 혐오스러웠다. 과연 시간이 흐르고 대구 코로나가 잠잠해지자 지역 정치권력과 언론이 끼어들었다. 의사와 의료진들의 값진 희생과 노동이 대구 시장과 경북도지사의 치적으로 둔갑했고 희생과 헌신의 숭고한 정신을 착취로 되돌려 주었다. 정부 대처의 훌륭함에 재를 뿌리기 위한 거짓과 음해, 모략이 판을 쳤다.


 그러나, 한국 종교인들의 집단 이기심과 몰상식한 기도와 포교방식에 이은 신천지 대구 사태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제자리에서 온갖 고생을 다한 의료진들이 얼굴에 밴드를 붙이고, 피곤함에 구석에서 쪽잠을 자도, 어느 나라도 해내지 못하는 확진자 주변 추적과 검진을 다하면서도 사람들을 통제, 감시하지 않고 오히려 뒤를 쫓아 일상에 방해가 되지 않게 보호하는 모습을 보면서, 프랑스 외인부대에서 보았던 리더십을 한국에서 발견했다는 놀라움이 더 컸다. 이전의 한국 리더십은 보스가 명령을 내리면 장, 차관들이 일사불란하게 시행하여 혼란을 잠재우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지만 사실은 쇼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이전에 본 한국의 장차관 자리를 차지한 자들의 면면은 모두 보스의 기질을 가진 독재자들과 같은 모습이었다. 책임을 지고 직접 일을 추진하는 리더의 모습이 아닌, 보스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자들을 뽑아 한 자리씩 주고 상납을 받는 봉건 군주제의 전통을 자랑하는 대구시장이나 경북 도지사 같은 자를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었다. 자신에게 돌아오는 비난은 모두 부하들에게 돌리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온갖 감언이설과 계략, 모함으로 세상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그들의 특징은 언론 앞에 뛰어난 쇼맨십을 발휘하고 높은 사람들과의 유대관계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돈과 권력을 추구하지만 책임전가에 능했다. 전염병이 창궐하면 자신은 언론과 사진을 찍고 모든 일은 부하들이 도맡아 했던 역사를 인터넷 시대에도 버젓이 저질렀던 것이다.


명령하고 평가하고 책임전가의 한국 문화와 팀을 이끄는 리더 문화의 차이.

 그런데, 나는 이번 코로나 사태로부터 어떠한 행동과 경제적인 활동에 제약을 받지 않았다. 대부분의 국가가 국경까지 봉쇄된 마당에, 자가격리뿐만 아니라, 문 밖을 나서지 못할 때, 우리나라는 모든 이동 경로가 열렸고 식당, 공장, 모든 산업현장이 정상 운영됐다. 더욱이 4.15 총선까지 치러져 건국이래 처음으로 180석 거대 여당이 탄생했다. 야당에선 포퓰리즘이라며 국민 재난지원금을 문제 삼았지만 나는 이런 국민 대접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으므로 한국이 달라졌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며 전율이 일었다. 보스가 아닌 리더십을 가진 진짜 일만 하는 대통령이 묵묵히 앞장서서 리더 해가는 모습을 보며 저것이 리더의 모습이라고 느꼈다.


 주말마다 프랑스 친구들을 만났다.

조선소에서 대부분 프랑스 정유회사 토탈에서 일하거나, LNG 화물창 원천기술을 가진 GTT(Gaztransport & Technigaz), Vinci 그룹 계열사 Actemium등에서 근무한 친구들은 한국의 코로나 대응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으며 한국에서 안전하게 일하는 것에 자긍심을 가졌다. 또한 프랑스 테크닙 본사에서 일하는 프랑스 친구도 마크롱 대통령의 무능을 질타하며 어쩌면 한국으로 파견 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과 함께 한국의 대응을 극찬했다. 카타르에 가있는 한국 여자와 결혼한 프랑스인 매니저도 아내와 딸이 있는 한국으로 휴가를 와 자가격리를 지키면서도 그렇게 한국을 칭찬하게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딱 꼬집어 표현할 수 없는 큰 변화가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프랑스 사람들에게 시간 외 근무를 시키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회사도 시킬 생각을 않고 직원들도 할 이유가 없으므로 업무 외 시간은 오롯이 자신의 몫인데, 그 중심에 가족이 있다. 우리나라처럼 퇴근 후 한잔은, 맥주나 와인 한잔의 검소한 대화 문화이지, 마셔라 부어라 하는 문화가 아니므로, 간단하게 마시거나 대부분 집으로 초대해 간단한 파티를 연다. 외식이 너무 비싼 이유이기도 한데, 그들에게 한국은 음식 값과 노동비가 싸고 고품질 노동력을 제공하고 있어 내 친구들의 만족도도 아주 높았다.


 정직원이든 계약직이든 업무에 대한 만족도도 높은 데다 세계를 업무와 연계해 여행하듯 다니면서 만나는 로맨스도 그들의 자랑거리였다. 많은 친구들이 자녀도 서넛 가졌으면서도 이혼하고 세계를 주유하며 돈을 벌어 전처에게 자녀 양육비를 주면서도 자유로운 삶을 영위했으니 과연 그들에게 구속되고 통제된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잘 알 수 있었다. 그들에게 코로나 방역에 대해 물어보았다.


"프랑스가 방역에 실패한 건 노동조건 때문 아냐? 8시간 맞춰 일하고 자신의 휴식이 더 중요한?"


"무시 못하지! 독감처럼 여겨 내가 걸려도 답답하게 마스크 쓰고 다녀야 할 만큼 그다지 심각한 문제라고 여기지 않았던 데다, 자유분방함이 더 크다고 볼 수 있어! 우리는 한국인들처럼 일하지 않지!


그런데 그때, 오만한 프랑스가 이렇게 물었다.


"너희 한국인들은 의료진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거 아냐?"


 문득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우리의 품앗이 전통에 취해, 자아도취되어 있을 때, 심장을 찌르는 것 같은 질문이었다. 그 어떤 노동에도 충분한 휴식과 공간을 보장해야 하는 유럽 선진국들에 비해, 우리나라는 전분야 노동환경에 충분한 휴식과 공간은커녕, 눈치와 군대조직과 같은 서열로 이루어진 나라였기 때문에, 그 질문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금방 눈치를 챘던 것이다. 조선소 현장에서 한국인들처럼 열심히 일하면서도 일사불란하게 조직화된 노동자들을 보지 못했던 그들이, 노동자들에 대한 칭찬보다 권리를 요구하지 않는 것을 비난했다.


 세월호의 잠수부들의 연대와 희생에 대처한 해경의 범죄 행위나, 삼성의 태안 기름 유출 사고의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의 희생에도, 어떤 배상도 하지 않았던 삼성중공업의 윤리 없는 대기업의 참모습을 보면서 정부 권력보다 힘센 삼성이라고 추종해 마지않는 노예 의식의 소유자들, 그들에게 떡고물을 얻어먹었던 판, 검새들이 퇴직 후, 대기업 임원으로 자리를 꿰차도 되는 나라, 국민은 위대해도 기업과 정부의 무책임하고 무능한 범죄 집단의 카르텔만 남아 있던 한국 사회였으니, 그 질문 뒤에 남아 있는 이러한 배경에는 분명 한국의 노동 문화에 대한 조롱이 포함된 것처럼 보였다.


"ㅎㅎ,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런데 여러 번 이런 대형 사고가 생겼을 때, 한국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많은 이들이 도움을 주러 갔어. 공무원이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사람들도 있고 어떤 이익도 바라지 않고 자원봉사를 하러 간 사람도 있지만 이번엔 정부와 시토와양(Citoyen: 국민, 시민)의 자발적 참여라 할 수 있지! 너희도 대통령 잘 뽑았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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