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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ssoud Jun Aug 19. 2020

프랑스 소매치기

전철 역과 루브르 박물관


 몽마르뜨에서 무장한 경찰과 군인들이 경비를 서는 모습을 보면서, 파리가 테러 때문에 여름이면 군, 경찰이 주요 관광지, 역, 변전소에 경비를 선다는 것을 외인부대 경험을 통해 알았다. 군인들이 다니는 모습을 보니 안전하다는 생각보다는 군인까지 투입을 해야할 정도로 치안이 불안정하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파리지앙들은 훌륭한 인성과 문화인으로서의 자긍심을 가지고 있지만 관공서 공무원, 경찰서, 거리 곳곳에서 인종차별을 경험하다 보면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이방인의 삶을 여행자들은 알 수 없겠지만, 몽마르뜨엔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가난한 예술가들이 가장 먼저 경험하는 것이 그러한 차별이었다.


 그러나 세계에서 모여드는, 성향을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공개된 도시 파리는 그야말로 세계인들의 인종시장이다. 그들이 프랑스어를 배우고 문화에 동화되면 놀랍게도 순종적이고 멋진 파리지앙으로 변모하는 것처럼 나도 순종적인 자유인으로 파리를 사랑했다. 파리 북쪽으로 향하는 전철 안에는 더 이상 프랑스인들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외국인들이 프랑스의 구성원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은 더이상 놀라울 것도 없었다. 그들은 프랑스의 철처한 노동문화 8시간에 익숙해져 최저시급(1.2천원)으로 급여를 받고 투잡을 뛰는 사람도 있고 단지 그 돈으로 소박한 파리지앙으로서의 삶을 영위했다.


퐁네프 다리 위의 집시 소매치기. 앞 뒤에서 시야를 가리고 가운데 꼬마가 소매치기를 한다.

 자신이 살았던 국가가 어디든, 인종과 종교가 무엇이든 프랑스의 자유, 평등, 박애는 관청이나 과격한 우파들에 의해 삐걱거리기는 하나, 전반적으로 지켜지고 있다. 어쩌면 너무 지나쳐서 방종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저런 마그렙인들에게도 관대할 정도이니, 세계의 깡패 국가 프랑스라는 말이 실제 프랑스에선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한 파리도 소매치기 천국임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이다. 스페인의 마드리드, 이탈리아 로마를 통털어 가장 고수들이 존재하는 파리는 여름철만 되면 소매치기로 넘쳐난다.


 몽마르뜨 언덕을 오른 여행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소매치기를 당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유명화가들이 살았던 집 앞에서, 화가들의 광장에서, 몽마르뜨를 올라오는 각 계단들에서, 몽마르뜨를 향하는 2호선 전철 역에서, 때로는 집시 소녀들에 의해, 발칸 반도에서 온 소매치기 조직들에 의해, 마그렙 출신들에 의해 곳곳이 소매치기의 표적이 되는 곳이었다. 파리의 낭만을 즐기러 올라간 몽마르뜨 언덕의 자유가 소매치기를 당하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 하는 것도 파리가 가진 아이러니다.


 물건을 두고 가도 돌아와 보면 그대로 있는 곳이 한국이라고 외국인 친구들이 말하곤 한다. 한국인들은 정직하고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면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모순된 사회구조 속에 어느 쪽이 좋은지 혼란스럽지만 전반적인 사회정의가 프랑스 사회를 70% 이룬다고 여긴다면 한국은 30%라고 말하면 짱돌을 맞을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

2호선을 타고 스탈린그라드 역에서 7호선으로 갈아탔다. 사람들 틈에 섞여, 휩쓸리듯 떠밀려서 탄 듯했다. 모든 것은 내 의지였고 내 발걸음에 의해 지정된 길을 가는 것이었지만 용케도 그 길을 잃지 않고 찾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곤하고 힘든 인생이 사람들의 얼굴에 그대로 녹아나는 지하철 내의 풍경이었다. 지하철의 한 칸에는 세상 모든 인종들이 다 섞여 있었지만 인생의 고단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들은 프랑스어로 엮여 있었고 프랑스 문화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이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을 바라 보는 내 시각 속에 아시아인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각도 묻혀 있을 터였다. 무엇보다 우리는 우리 앞의 앞가림을 하느라 타인의 삶을 신경 쓰지 못하는 부류의, 프랑스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전철에는 이상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전철 가득히 먼지 냄새와 기분 나쁜 냄새가 섞여 오감을 자극 했다. 여자 두 명과 남자 한 명이 베낭을 매고 같은 전철 칸에 탔는데 아는 체 하고 싶지 않았다. 한국 여행자들이었다. 반가운 마음 이면에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같은 얼굴과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이 역겹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세상 제일 증오스러운 사람들은 같은 언어를 쓰는 한국인들이었다. 얼마 전에 떠나 온 한국에서 나는 말세를 보았다. 마지막으로 프랑스를 여행하고자 왔던 파리에서 만난 한국인들이 반가울 리 없었다. 그 한국인들 뒤로 소매치기가 따라 붙었다.


 아무 것도 알리 없는 한국인 여행자들 뒤로 조용히 따라 붙은 소매치기들은 어떤 표시도, 이상 징후도 없었다. 오래 파리에서 산 사람의 특권인 것처럼 그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어쩌면 외인부대를 통해 배웠는지, 퐁피두 광장에서 초상화 화가를 하며 배운 눈대중인지 몰랐다. 그런 류는 표시가 났다.


 대장과 소매치기, 망보는 놈과 바람 잡는 놈 합쳐 네 명이었다. 모른 체 할까 했다. 조선족 민박집에 가는 여행객들이 분명했다. 파리 19구는 조선족들 민박집이 몰려 있는 곳이었다. 고맙다는 것도 모를 것이라는 생각이 미치자 뒤로 물러서서 관망하고 있었다. 소매치기와 바람잡이가 여행자들에게 바짝 붙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들 코 앞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운데 기둥 손잡이를 잡고 있는 그들이 한 곳으로 모여 나를 응시했다. 소매치기가 야릇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며 묘한 미소를 날렸다. 나는 그를 무표정하게 응시하며 창 밖을 응시하며 미동을 하지 않는 그의 대장과, 바람잡이를 번갈아 쳐다 보고 패거리가 더 없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들 네 명이 다였다.


일본 여자 앞으로 집시 소매치기가 길을 가로막고 뒤로 세 명이 서 있다. 이들을 막고 서서 소매치기 애들 얼굴을 하나씩 쳐다보자 '짱깨'라고 저주를 퍼붇고 사라졌다.

 한국 여행자 중에 남자에게 다가가, 소매치기가 따라 붙었다고 귓속말을 해주었다. 남자는 금방 얼어 붙었다. 패거리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도발적이었지만 아랑곳 않고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대장은 여전히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인 듯 딴청이었다. 행동책인 소매치기는, 헤어젤인지 물기인지 잔뜩 발라 물에 빠진 쥐새끼처럼 보였다. 그들은 발칸 반도쪽 애들이었다. 코소보 내전으로 집시 아이들과 함께 프랑스로 건너온 놈들임이 분명했다.


 나도 한 때, 어리석게 오페라 역에서 전철을 갈아타고 소매치기를 당한 적이 있었다. 그때의 아랍 애들 두 명이 머리에 각인되었다. 사람들이 시선을 발 아래 전철 티켓을 줍는 척 하면서 내 발목을 잡고는 혼란을 틈타 지갑을 빼갔던 것이다. 처음 그 경험을 당하고 얼마나 억울하고 분했는지 한동안 잠을 못이루었고 그 놈들을 잡고야 말겠다며 전철마다 눈을 부라리고 다녔던 적이있었다. 현금은 2만원이 다였지만 군인 신분증과 프랑스 운전면허증을 빼앗겼던 악몽이었다. 프랑스에서 신분증 재발급은 보통 1개월을 훌쩍 넘겼다.


 발칸반도 애들은 러시아나 동유럽 쪽 애들과 미묘한 차이가 났다. 얼굴이 하얀 금발이 많고 아시아 계통 피가 섞인 동유럽권은 헤어젤을 하는 일이 거의 없을만큼 머리 결이 부드러웠다. 하얀 피부에 약간 유럽인과 차이가 없어보이는데 비해, 발칸반도 애들은 피부에 윤기가 흐르고 약간 아시안의 느낌도 있었다. 유럽인도, 러시아인도 아닌 그들의 모습은 입은 옷과 침묵 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북아프리카 아랍 애들은 생긴 것 자체로 기분이 나쁜데 생쥐처럼 젤이나 물을 바른 머리, 건들건들 한 품행과 상대를 깔보고 업신여기는 듯한 어투로 가까이 하고 싶은 생각이 없게 만들었다.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에서 온 소매치기 일당도 대부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특징은, 여행자로 분장한다는데 있었다. 오래 전 여행 가이드를 하면서 어린 집시 여자애들이 우리 일행을 소매치기 하려던 것을 잡아 돌려 보냈던 것과 박물관 근처의 소매치기는 10세를 갓 넘긴 애들 수준이었다. 그런데, 발칸 쪽 집시 애들 중에 남자 성인들은 처음 보았다. 눈 싸움 한다고 사진을 못찍었네......ㅠ,.ㅠ;;;


경찰에 잡힌 집시 소매치기. 빈번히 이런 광경을 보지만 경찰은 오래잡아 두지 않았다. 아마도 그것이 어린 집시들이 소매치기 전문가가 되는 모양이었다.


 어린 여자 집시들은 임신을 한 애들이 많았다. 누가 보기에도 10대를 갓 넘긴 여자애들이 임신 한 채로 구걸을 하거나, 소매치기 팀의 바람잡이를 하거나, 사인을 해달라면서 접근했다. 프랑스는 그들을 인권 차원에서 받아 들였고 추후의 인권은 방치하는지 그들의 삶이 치열해 보였다. 파리 외곽의 음산한 곳에선 가끔씩 그런 사람들이 비바람 피할 은신처를 설치해 놓고 경찰의 감시와 통제를 피해 도망을 다니는 듯 했다. 밤이 되면 폭행을 당하지 않을까 염려되었다.


 여행객들이 내리자 소매치기도 따라 내렸다. 더 이상 개입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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