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은 이제 제주도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각자 휴대폰으로 확인했다. 소안도로 들어가는 것이 내일까지 미뤄지면 화요일에 여수에서 있을 ‘한국 해양환경안전 협회 세미나’를 마치고 돌아와야 하는 시간상의 여유가 없었으므로 오늘 다닐 수 있는 육지의 김 공장을 다녀볼 계획으로 급 수정했다. 김 대표는 고흥에 계약 건이 있어서 다녀와야 했지만 하루 늦췄던 터였다. 우리는 아침으로 다시 순두부를 먹고 까만 콩 카페에서 오전을 몽땅 전략을 짜는 회의를 마치고 지난 3년 간의 애환이 집대성되어 있는 해남의 업체를 방문했다.
대부분의 김 공장들이 전라도와 서산 쪽에 집중되어 있는 이유가 급격한 조류와 조수간만의 차이가 커야 한다는 상식과 더불어 가을부터 봄까지만 작업이 가능한 계절 바다 양식장에서 캐 온 물 김을 김 공장에서 바닷물로 씻어내고 다시 민물로 씻어내는데 폐수처리 설비가 필요했다. 인터넷 상으로 찾아보니 폐수가 바다로 흘러 들어 계속 민원이 발생했고 이 명박 정부 때 사라졌던 해양환경안전협회가 부활을 하기 때문에 업체를 방문하는 것이었다. 더욱이 환경부에서는 바다 환경 보존을 위해 폐수처리 시설을 의무화해서 10월 중순부터 시행한다는 법령이 발효된다고 했다.
조수 간만의 차가 많은 곳에 위치한 김 공장
저 멀리 우리가 지나왔던 달마산의 자태가 설악산 울산바위 같기도 하고 더 아기자기 한 것이 두륜산 도립공원과 더불어 해남의 명산으로 우뚝 솟아 아름다움을 더 했다. 바다로는 길게 뻗어 있는 개펄 위로 수 없이 놓여진 저것이 무엇인지 궁금하기만 한데, 흩날리는 빗줄기는 이곳 땅끝마을에서 위력을 잃었는지, 피해갔는지 태풍이 왔다는 느낌도 없이 영향권을 벗어난 듯 했다.
볼일을 마친 김 대표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의기소침한 기색 없이 금방 털어버리고 다음 행선지로 향한다. 마침 볼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주인이 안으로 우리를 들여 커피를 제공한다. 바닷가 사람들이라 거칠 줄 알았는데 웬걸, 언행이 부드럽고 논리 정연하다. 옷차림도 시골의 어부들 같지 않게 깔끔하니 그들의 대화에 몰두했다. 나는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거의 없는 전문분야라 커피만 홀짝거리다 나왔다.
거짓말처럼 평온이 찾아온 완도 앞바다.
바람이 잦아 들었다.
비도 다 내린 듯 간헐적이라 태풍은 완도, 해남을 벗어난 듯 했다. 부산에는 지금부터 저녁 9시까지가 고비라 했다. 내일은 소안도에 들어갈 수 있을지 해양경찰청에 문의했지만 신참 해경으로부터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우리는 다시 숙소로 돌아와 어제 일찍 문 닫은 횟집으로 갔지만 다시 문이 닫혀 있었다. 옆집에서 해물거리를 샀다. 김 대표는 이전에 이곳에 와서 5일 동안 한 집에서 같은 음식을 먹었다고 했다.
같은 횟집을 5일 동안 다니자 주인이 놀라서 이상한 사람 보듯 하더란다. 이 정도면 일편단심 한 횟집 명예고객으로 등록할 정도인데, 해물을 먹을 수 있는 집은 문이 닫혀 음식을 싸 들고 55호집에서 먹기로 했다. 완도 현지에 3년 동안 일을 해오던 김 사장은 한 번의 이혼 후에, 지금의 한족과 결혼해서 난 아들을 동반하고 나타났다. 나보다 두 살 위였지만 아직 사십도 안되어 보이는 동안이었다. 내일 고흥으로 계약하러 가는 일을 상의했다.
잦아든 바람에 나는 태풍이 지나갔다고 했고 효재 형님은 오늘 저녁에 부산을 지날 것이기 때문에 내일 본격적인 태풍의 영향권 안에 든다고 우겼다. 그리고 두 분의 에너지 넘치는 토론이 밤늦도록 모텔을 울렸다. 나와 띠 동갑인데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저 열정은 술에서 오는 것일까, 꿈이 현실화 되는 현장을 눈 앞에 둔 환희에서 오는 것일까? 일찍 자겠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화흥포항에 도착해서 내리는 승객들 사이로 인형을 꼭 껴 안은 꼬마숙녀의 흥얼거림이 신난다. 차량이 나오는 만세호
아침은 고요했다.
태풍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지고 찾아 온 고요함에 서둘러 소안도로 들어가는 화흥포 여객터미널에 확인해보니 정상 운행을 한다 하니, 일정을 변경하여 아침에 소안도로 들어갈 수 있는지를 김사장에게 문의하자 곧장 불가능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효재 형님과 나는 남기로 하고 김사장과 대표는 고흥을 향해 출발했다. 왕복 5시간 거리였다. 새벽 두 시에 잠에서 깬 나는 조금 더 자기로 했고 효재 형님은 산책을 하기로 했다. 오후 1시가 되어서야 둘은 고흥에서 돌아왔다. 늦은 점심을 먹은 우리는 곧장 소안도로 들어갔다.
여객선은 대한호, 민국호, 만세호 세 대였다. 만세호가 제일 깨끗하고 운치가 있었지만 차량을 실은 상륙형 여객선은 밖에 있기에 너무 시끄러웠다. 그러나 부두를 떠난 배가 바다 길에 들어서고 점점 부두에서 멀어지자 눈 앞엔 완도 섬 전체가 조망되었다. 왼쪽으로 땅끝마을과 달마산의 위용이 아름답고 완도의 오봉산이 가까이 뒤 편 두륜산을 막고 있으나 항구를 떠난 여객선은 동천항에 들렀다 손님들을 내려주고 곧장 소안도로 이동했다. 거의 1시간의 여정,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목적했던 곳을 방문했다. 이 섬엔 영세한 김 생산업체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김이 대한민국 특산품이 되어 수출로 벌어들이는 돈이 5천억원을 넘어섰지만 아직 품질 면에서 중국에 비해 두 배 가격이 낮고 일본에 비해서는 세 배가 낮은 가격에 수출 1위를 차지하고 있어, 보다 많은 생산과 품질 향상을 위해 정부 지원이 엄청났다. 뿐만 아니라, 폐수처리설비 설치를 위한 정부지원도 막대했지만 사비로 들어가는 돈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영세한 생산업자들은 가을부터 재배를 시작해서 겨울에 채취하여 가공하고 봄까지 생산하는 제품에 인력 채용의 한계와 저가 판매의 애로사항을 겪고 있었다. 따라서 대량 생산에 성공한 몇몇 업자들이 기업화에 성공했고 영세 업자들도 이제부터 서서히 생산 준비를 위해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우리는 몇 개 업체를 돌다가 마지막 배를 급하게 타고 섬을 빠져 나왔다.
동천항에서 구도를 연결하는 대교
화요일 아침 7시 반,
일편단심 단골집이 된 순두부 집에서 아침을 먹고 김 사장을 만나서야 운전대를 넘겼다. 오늘은 오후 세시까지 이번 여정의 목적인 한국해양환경안전협회 세미나가 여수에서 있을 예정이었다. 이른 시간의 이동이라 김 사장이 땅끝 해안로를 따라 드라이브를 시켜 주겠다고 했다. 완도대교를 건너 해남 땅으로 들어오자 마자 왼쪽 도로로 접어 들자 해안로가 시작됐다. 멀찍이 보이던 달마산이 옆에서 나란히 달리기 시작했다. 기암 절벽들이 정상을 수 놓은 저 아름다운 산을 꼭 한 번은 등반해보리라, 산을 좋아하는 효재 형님과 죽이 맞아 달마산 예찬을 아끼지 않았다.
“여기 땅끝이 원래는 완전히 오지 중에 오지였어요. 원래 목포에서 진도와 보길도로 향하던 배가 두 척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 끊겨져 버렸어요. 그 뒤로 여기 땅끝마을에서 보길도로 가는 뱃길이 생기자 이러코롬 발전을 해버렸지요. 마을 정비도 제대로 되고 대중교통도 많아졌는데다 도로도 요로케 잘 닦여져 관광객들이 엄청 와부렸지요. 그라고 여그가 백두대간 시작점이자 끝점이기도 하니 해남 땅끝의 사자봉을 밟지 않은 자, 백두 대간을 끝낸 거이 아니라는 말도 생겨부렀지라! 저짜 저기 봐보소. 저기 서 있는 전망대가 사자가 엎드려 있는 것 같대서 사자봉이라 하지라!”
김 사장이 가이드가 되어 해남 얘기를 풀어냈다. 대표는 이 해안로 드라이브가 세계 어디다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아름다움을 자랑한다고 부연설명을 했지만 아름다운 다도해를 드라이브로 보기엔 전선줄과 차량 전복 방지 턱이 시야를 방해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시간이 되면 전망대에 올라가 다도해를 바라보는 여유를 부려보겠지만 차는 쉬지 않고 드라이브코스를 돌아 이번엔 달마산 반대 편을 돌아 원점으로 합류했다. 차는 이번엔 두륜산을 왼쪽으로 끼고 주작산에 들어섰을 때였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1억짜리 묘목을 구경시켜 드리지요”
김 사장이 주작산이 병풍처럼 둘러 싼 길가의 화원 앞에 차를 세웠다. 손짓으로 ‘쩌거요, 쩌거’라고 가리켰지만 우리는 어느 나무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내가 내려 이거냐고 물어보니 ‘그렇다’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