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1장 14-15)
자녀의 입시 성공에 눈이 멀어 결국 가정을 파멸로 이끌어간 부모, 그리고 이러한 부모의 습성을 이용해 본인의 욕망을 채우는 입시 카운슬러의 이야기를 담은 <SKY캐슬>은 한국 사회를 뒤엎은 가장 큰 욕망의 피사체인 입시의 밑 낯을 여지없이 보여주며 큰 찬사를 받고 있다. 특히 타인의 꿈을 본인의 꿈이라 착각하는 자녀와 본인의 꿈을 타인의 꿈이라 착각하는 부모 간의 환장의 하모니는 너무나도 현실적으로 한국 사회를 대변하고 있다. 하지만 이 드라마의 가장 큰 공로는 바로 뼈저린 현실처럼 느껴지는 입시 담론을 도덕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간 것이 아닐까 싶다. 언제,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하는지가 입시 담론의 전부였던 한국 사회에 “왜”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든 것이 <SKY캐슬>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SKY캐슬>이 입시를 도덕의 영역으로 끌고 올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희망의 이중성”을 적절히 표현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 드라마에서 희망은 크게 미시적 관점과 거시적 관점, 두 단계로 구분되어 나타난다. 먼저 미시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 드라마의 개별 장면은 철저히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홉스적 희망 (Hobbesian Hope)”을 닮았다. 토마스 홉스 (Thomas Hobbes)는 <리바이어던 (Leviathan)>에서 희망을 “무엇인가를 취하고자 하는 마음이 내포된 욕구 (an appetite with an opinion of obtaining)”라 정의했다. 홉스에게 인류의 가장 원초적인 자연 상태(state of nature)는 희망의 평등 - 모두가 동등하게 개인의 욕구를 성취하기에 거슬림이 없는 상태 – 이 있는 상태였다. 여기서 “취하고자 하는 마음(opinion of obtaining)”이 있다는 것은 곧 “가질 수 있을 것 같은 무엇”을 대상으로 발생한다. 그것이 누군가에겐 몸을 뉘일 곳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식량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가질 수 없다고 여겨지는 대상에 대해서는 취하고자 하는 마음도 생기지 않는다. <SKY캐슬>에서 홉스적 희망은 예서 가족에게서 가장 강하게 드러난다. 예서도, 예서의 엄마와 할머니도 모두 서울의대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은 목표”로 보았다. ‘차 교수’ 차민혁 또한 자식들의 입시 성공에 대한 홉스적 희망을 가졌지만 그의 가족은 그 희망을 공유하지 않았다.
시청자가 불편해하면서도 동감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장면 장면에서 표현하는 홉스적 희망이다. <SKY캐슬>의 배경은 의사 가족들이 모여사는 상류 사회인 반면 그들의 행위를 보며 시청자가 연상하는 것은 오히려 자연 상태의 사회에 가깝다. 원초적 본능에 따라 화내고, 숨기고, 싸우고, 질투하고, 목표를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는 모습이 마치 도덕적 발전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자연 상태의 인간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청자는 이를 보며 마음 한편이 불편하다. 하지만 동시에 시청자가 이들의 행태에 동감하는 이유는 이들의 희망이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가 좋은 대학에 갔으면 하는 마음, 대학으로 신분 상승을 하고 싶은 마음, 경쟁에서 승리하고자 하는 마음, 남보다 더 인정받고 싶은 마음. 이러한 마음은 한국 사회에 살고 있다면 자연스레 발생하는 “취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자연 상태처럼 사방에 위협이 도사린 사회에서, 교육 실패로부터 회복할 안전장치가 보이지 않는 사회에서, 나의 생존을 위해서는 입시 성공을 꼭 취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대부분이 같은 시험으로, 같은 커리큘럼으로 공부하기에, “취하고자 하는 마음”은 더욱 강하게 끓어오를 수밖에 없다. 입시의 성공이 “가질 수 있을 것 같은 무엇”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청자가 <SKY캐슬>의 미시적 장치에 불편한 동감을 하는 동안 드라마는 장면 장면의 홉스적 희망을 한데 모아 어느새 정 반대의 거시적 관점을 구성한다. 거시적 관점에서 드라마의 전반적 줄거리는 입시라는 환경 속에서도 인간 도덕의 진보와 기대를 담고 있는, 철저히 도덕적이고 종교적이기까지 한 “칸트적 희망 (Kantian Hope)”을 암시한다. 임마누엘 칸트 (Emmanuel Kant)는 <순수 이성 비판 (The Critique of Pure Reason)>에서 희망의 대상을 1) 자신의 행복, 2) 자신의 도덕적 발전, 그리고 3) 인류의 도덕적 발전이라 했다. 홉스적 희망과 비교해 보면 아주 이상적인 희망이다. 개인의 단순한 행복을 넘어 더 도덕적인 자신이 되길 희망하는 것, 나아가 전 인류가 이러한 길을 걷길 바라는 마음이 희망이라면 이는 불가능해 보일 뿐 아니라 오히려 홉스적 희망이 추구하는 “욕망”을 버리는 쪽으로 인간이 발전할 때에만 가질 수 있는 것이다. <SKY캐슬>에 순수하게 선한 캐릭터는 없다. 드라마는 모두를 흠이 있는 인간으로 묘사하고 그 흠은 삶의 궤적에 따라 커지기도 작아지기도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캐릭터는 욕망을 버리기보다는 욕망을 부풀리기 급하다. 이는 칸트적 희망보다는 홉스적 축제에 더 가까운 듯하다.
도대체 <SKY캐슬>은 어떤 부분에서 칸트적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실제로 많은 이들이 이 드라마를 보고 되려 현실 세계의 입시 카운슬러를 찾아 떠났다고 한다. 칸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철학자 모세스 멘델스존 (Moses Mendelssohn)도 예상이라도 하듯 이러한 행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관했다. “인류가 전반적으로 미세한 변화를 만들어 내긴 하지만 몇 걸음 나아가지 못하고 언제나 두 배는 더 빠른 속도로 제자리를 찾아온다.” 드라마도,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도 도덕의 진보를 보여주지 않는 것 같은데, 과연 칸트가 말하는 도덕적 진보가 가능한 것일까? 그 해답은 칸트가 희망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풀어가는지에 있다. 칸트는 희망의 세 가지 대상을 이야기하며 이 세 가지 희망을 이루는 것이 비록 불가능할지라도 여전히 인류가 그 이상향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야만 도덕 그 언저리라도 경험할 테니. 그리고 칸트는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인류는 기나긴 역사를 통해 지속적으로 진보해왔고 이러한 역사가 바로 인류의 희망이다.” 그는 인류가 비록 느리더라 할지라도 꾸준히 진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그는 진보의 원천이 자연 상태에서부터 내려오는 인간의 천성이 아닌 꾸준히 비도덕적인 인간의 행태 속에서도 어느 순간 더 나은 세상을 만든 인류사의 “섭리”라 주장한다.
<SKY캐슬>은 입시라는 리바이어던이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서 칸트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었던 것 같다. 드라마의 장면 장면은 홉스의 욕망적 희망을 묘사하지만 궁극적으로 <SKY캐슬>은 뒷걸음질 치는 것 같아 보이더라도 결국엔 진보를 향해 나아가는 인간의 도덕성을 보여준다. 분명 주인공들은 입시를 위해 친구를 저버리고, 가족을 공격하고, 거짓과 술수로 가득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그들의 행동의 총합은 행복, 도덕적 발전, 그리고 스카이캐슬 주민들 전체의 도덕적 진보다. 학교를 자퇴하고 묵묵히 걸어 나오는 예서의 발걸음도, 유출 시험지를 들고 경찰서로 향한 예서 엄마의 모습도, 결코 그들이 의도한 결과가 아니다. 캐릭터 개개인의 이야기가 주머니 속 이어폰처럼 꼬이고 꼬여 어느 순간 그러한 결과를 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본인의 희망에 따라 합리적 판단을 내리고 또 내리다 보니 어느 순간 가장 합리적인 선택지가 도덕적으로 우월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홉스적 희망을 가지고 순간의 선택을 내린 것이 어느 순간 칸트적 희망을 실현시킨 것이다. 개개인이 무기력하고 악하다고 하더라도 인류는 결국 도덕적으로 진보할 것이라는 섭리를 믿었던 칸트처럼, 드라마의 줄거리 또한 이러한 섭리를 따라 진행된 것이 아닐까?
신기한 것은, 칸트의 섭리에 인간의 능력적 진보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서울의대 합격은 힘들어졌지만 도덕적으로 진보한 예서는 어쩌면 칸트적 희망의 궁극적 아이콘이 아닐까? 여전히 누군가는 예서를 보고 “예서 책상”을 구매할 것이고 누군가는 입시 카운슬러를 찾아 나설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국의 입시교육과 이를 대하는 한국 시민의 총체적 도덕성은 느리더라도 꾸준히 진보할 것이다. 조급해하지 않아도 된다. 능력이 부족한 것을 탓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더 뛰어나려는 욕심에 너무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 인간은 욕심을 동기로 살아가는 존재기 때문이다. 단지 내 욕심의 끝에 더 정의롭고 도덕적인 섭리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따르자. 각자가 본인을 미혹하는 욕심의 종착역에 대해 조금만 더 사유해본다면 수많은 욕망의 선택들이 모여 정 반대의 결과를 가져다줄 것이다. 우리 사회는 언제나 그래 왔듯이 천천히, 하지만 확실히 이상향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