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롭지 못한 내가 더 가엽구나
지난 주말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가여운 것들>을 보았다. 이 영화에 대해 아는 게 있어서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광고로 나온 몇몇 씬들에 흥미가 있었다. 구도나 화면비, 색감의 독특함이 궁금했던 것이다. 대체 엠마 스톤이 무슨 역이길래 저런 옷을 입고 있나 궁금하기도 했고.
영화를 보러 간 롯데시네마엔 사람이 많았다. 맥주와 치토스 팝콘을 사서 자리에 앉았다. 그렇다. 난 영화를 볼 때 팝콘 씹는 소리 따위를 내지 않는 예술 애호가와는 거리가 멀다.
영화는 매우 야했다. 세상에나 엠마 스톤은 그 아름다운 몸으로 저런 연기를 해내는구나.
대충 어린아이의 뇌를 달고 있는 벨라 백스터가 매우 본연의 성욕을 드러내고 이 덕에 거침없이 세상을 탐험하고 자신도 알아간다는 내용이다.
이 영화를 보자고 서둘러 예매를 감행했던 나는 넘실대는 섹스씬에 어딘지 모르게 민망해져서 "여성주의를 말할 때, 섹스를 빼면 정말 그렇게 할 말이 없는 건가?"라고 물었고, 이내 동행의 "성을 빼고 성을 말한다는 것은 가능한가. 잘 모르겠다"라는 말에 여러 생각이 들었다.
영화 <바비>가 생각났다. 여성주의를 말하며 섹스는 빼고 말하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여성 감독과 남성 감독의 시선차는 아닐까 생각되기도 했다.
이토록 아름다운 여주인공이 나온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기도 했다. 일단 이 서사를 펼쳐내려면 여주인공은 예뻐야 했다. 저렇게 맘껏 섹스하고 탐험하는 캐릭터엔 아름다운 용모가 있어야 관객을 설득한다는 사실이 우습다.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전제 하에, 주인공이 부럽다. 멋진 모험을 실컷 하고 나중엔 자신의 진짜 꿈을 찾았고, 동료도 생겼고, 자신을 온전히 존중하고 추앙하는 파트너도 가졌다. 게다가 자신을 못살게 굴던 놈은 동물로 만들어 네 발로 기게 만든다. (어떤 동물인진 기억이 안 난다) 꿈의 삶이다.
이 모든 게 아름답고 헤프고 모자랐기에 가능했던 모험이라니. 사회화가 되지 않아 시종일관 수치심을 몰랐기에, 갓윈의 과보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적당한 때에 좋은 인생의 스승도 만났다.
엠마 스톤 정도 나와서 저 정도 벗어줘야 상도 받고 흥행도 하니 이거 참 서럽고, 못생긴 여자가 나와서 서사를 끌고 가면 니들이 공감이나 하겠냐 하는 감독들에게, 시도나 해보고 이런 소리 하라고 하고 싶기도 하고..
버지니아 울프의 글이 떠오른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행하고 빈둥거리며 세계의 미래와 과거를 사색하고 책들을 보고 공상에 잠기며 길거리를 배회하고 사고의 낚싯줄을 흐름 속에 깊이 담글 수 있기에 충분한 돈을 여러분 스스로 소유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오늘도 돈 생각을 하고야 말았다. 사실 중요한 건 딱 저 문장까지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