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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팡 Sep 13. 2021

무한

수학 에세이

호모 인피니투스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주인공 이반 일리치가 죽은 뒤 시작된다. 일리치의 친구들은 별 생각 없이 집어 든 신문에서 일리치의 부고를 발견한다. 그리고 이내 안도감을 느낀다. '죽은 건 내가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이야. 아, 그는 죽었지만 나는 이렇게 살아 있어!' 이후 소설 속 시간은 과거로 돌아가 일리치의 일생이 펼쳐진다. 어린 일리치. 젊은 알리치, 늙은 일리치, 아픈 일리치, 살고 싶은 일리치, 그리고 체념한 일리치까지. 체념한 일리치가 마지막 호흡을 하면 소설은 끝난다. 일리치의 삶이 유한한 것처럼, 그의 죽음에 안도하 주변인의 삶이 유한한 것처럼, 소설의 분량 역시 유한하다.


우리는 죽음에 관한 소설처럼 유한한 것들로 둘러싸여 있다. 우리 인생에도 끝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유한한 존재인 걸까? 이 질문에 대해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우리가 유한하더라도 무한에 대해 완벽하게 모르는 것은 아니라고 답했다. 인간은 무한하지 않지만 얼마든지 무한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한에 대해 떠들어대는 능력이야말로 다른 생물에게 없는 인간의 독특성일지도 모르겠다. 한번 인간만의 초능력을 발휘해 상상해보자. 육체의 삶이 끝나도 영혼이 계속 이어진다면? 그 영혼은 어디 있을까? 어떻게 될까?


어쩌면 영혼은 기억 속에 남겨질 것이다. 애니메이션 <코코>의 세계관 속에서, 인간은 죽으면 꽤 인프라가 잘 갖추어진 저승의 세계로 떨어진다. 이승에서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는 한, 죽은 인간은 그곳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다. 반대로 모두에게 잊히는 순간 영혼은 소멸해 버리고 인간은 다시 한 번 죽는다. '제발 혼자 울지 마. 매일 밤마다 와서 조용히 노래해 줄게, 널 다시 안을 때까지, 기억해 줘.'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던, 한때 잘 나갔던 뮤지션은 저승에서 죽을 걱정 없이 지낸다. 이승의 사람들이 이 가사를 흥얼거리면서 누가 이런 멋진 곡을 불렀는지 재차 확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모습은 많은 예술가들이 꿈꾸는 장면이다. 그들은 세월이 흘러도 감상되는 작품을 남겨 사후에도 그 작품을 통해 기억되길 바란다. 미술작가 박민준은 한 인터뷰에서 '인간은 영원할 수 없지만, 영원한 것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그의 목표는 '단 한 점의 그림을 남기는 것'이다. 한 점도 충분하다. 인생은 짧아도 예술은 길기 때문에.


아니면 영혼은 삶이 끝난 뒤 끊임없이 재구성되어 또 다른 삶과 죽음을 반복할 것이다. 불교 교리에 따르면 깨달음을 얻지 못한 영혼은 삶과 죽음의 반복, 즉 윤회에 속박된다. 석가모니는 다시 태어나지 않기를 소원하는 중생에게 말했다. "그 또한 집착이며 번뇌이니라." 이 집착을 버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죽은 뒤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 다시 한 번 죽는다. 그리고는 또 다시 태어나... 영원히 반복되는 영혼의 이미지는 자신의 꼬리를 입으로 삼킨 그리스 신화의 괴수 우로보로스의 모습을 닮았다. 우로보로스의 입에서 출발해 꼬리까지 손가락으로 따라가보자. 손가락은 도착지에서 멈추지 못하고 다시 한 번 출발해야 한다. 이 과정은 무한히 반복될 수 있다. 반복은 저주일까? 매일같이 가파른 언덕 위로 돌을 올리는 형벌을 받은 시지프스에게 묻는다면 반복은 저주일 것이다. 하지만, 반복은 축복이기도 하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서 조엘은 몬탁 해변에서 클레멘타인을 만나는데... 아니다, 짧게 설명할 자신이 사라져 버렸으니 직접 영화를 시청하길 바란다(1). 이왕이면 반복해서.


우루보로스 (https://ko.wikipedia.org/wiki/%EC%9A%B0%EB%A1%9C%EB%B3%B4%EB%A1%9C%EC%8A%A4)

무한이 삶과 죽음 같은 심오한 주제에 국한된 개념은 아니다. 가령, 우리는, 기껏해야 네 그릇 정도 먹을 거면서, 무한리필 가게를 방문한다. 무한은 가게 주인과 손님 사이의 약속이다. 손님, 19,900원만 내시면 음식을 끝없이 시킬 권리를 드립니다(그렇지만 두 시간 안에 다 드셔야 한답니다). 다만, 권리와 권리 실행이 같은 개념은 아니라는 점은 짚고 가야겠다. 실제로 음식을 무한히 주문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면, 가게 출입문을 열기 전 바디우가 했던 말을 뒤집어 읽어 보자. "인간은 얼마든지 무한을 생각할 수 있지만, 인간이 무한한 것은 아니다." 우리의 위장과 식욕과 저녁 시간은 유한하다. 무한은 행동이 아니라 사유의 영역에 있다.


철학자들은 앞서 나온 무한의 예시들을 모두 '잠재적 무한'이라 부른다. 잠재적 무한은 시지프스의 형벌처럼 언제나 다음이 남겨져 있다. 다시 말해, 지속적으로 남겨지고, 반복되고, 시도된다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일은 잠재적으로 무한하다. 잠재적 무한은 관찰되지 않는다. 관찰되는 것은 오직 무언가가 유한하다는 사실뿐이다. 오히려 잠재적 무한은 관찰되지 않음으로써 드러난다. 시지프스도 언젠가는 화가 나서 돌을 부수고 도망갈까? 시지프스의 형벌이 정말 무한하다면 그 끝은 아무리 기다려도 알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볼 수 없거나 보지 못한 것을 상상하고 기다리며, 이 과정은 끝없이 계속될 수 있을 것 같아, 말하는 정도이다. 잠재적 무한은 상상과 소망, 이야기 속에 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 사람들이 있다. 마법진을 그려 귀신을 소환하는 주술사처럼, 이들은 기호를 적고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무한의 '실재'가 나타났다.


무엇을 상상하든

20xx 년 서울, 면접관 앞에서 잔뜩 긴장해 입이 마른 지원자가 말한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하를 보여드리겠습니다.” 면접관은 대체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어리둥절하다 당황한 기색을 숨기고 답한다. "바닥 밑에는 지하가 있지요. 당신이 무엇을 보여주든 그 이하를 상상할 수도 있어요." 이로부터 400여 년 전, 수학 문제를 풀던 라이프니츠가 일어서며 말했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보다 작은 수를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는 이 수를 무한소라 부르고 그걸로 온갖 도형의 넓이를 정확히 계산했다. 그러나 라이프니츠의 풀이를 본 수학자들의 마음은 어딘가 불편했다. "무엇보다도 작은 수라고? 바닥 밑에는 지하가 있는 법. 무한소가 얼마든 그보다 작은 수가 있을 텐데." 이들은 무한소의 존재를 의심했다. 라이프니츠는 궁시렁거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무한소... 있는데... 이걸로 계산 잘 되던데..."


200여 년 전까지 수학자들은 무한을 수학적인 언어로 잘 설명하지 못했다. 세 개의 거대 장벽이 있었기 때문이다. 갈릴레이는 어느 날 저녁을 배불리 먹은 뒤 노트를 폈다. 그리고 자연수 1, 2, 3, 4, 5, ... 를 차례로 적었다. 그 옆에는  제곱수를 짝지어 1-1, 2-4, 3-9, 4-16, 5-25... 같이 적었다. 생각할수록 이상했다. 이런 대응은 계속해서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면 자연수 개수와 제곱수 개수가 같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제곱수는 자연수의 일부분인데? 수학자 유클리드는 일찍이 '전체는 언제나 부분보다 크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 선언을 떠올린다면, 자연수(전체)는 제곱수(부분)보다 크다고 해야하지 않을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한참 고민하던 갈릴레이는 책상을 탕 내리치더니 말했다. "모르겠다!" 문학에 등급을 매기는 것은 잘못이라 말한 사르트르처럼, 갈릴레이는 무한 사이의 크기 비교는 잘못된 것이라 주장하고 더 이상 무한에 대해 연구하지 않았다. 전체는 항상 부분보다 크다는 유클리드의 전제는 수학자들의 무한 연구를 가로막은 첫 번째 장벽이었다.


두 번째 장벽은 무한은 신의 속성이라는 믿음이다. 아퀴나스 이래로, 유럽 신학자들은 신을 무한한 존재로 여겼다. 이들은 <아카데미 플랑세즈 사전>에 "신만이 무한하다. 오직 신 외에는 무한한 것이란 없다."라는 문장을 적었다. 이 무렵 무한은 곧 신의 특성이며 아둔한 인간이 감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무한을 이해하려고 애써서는 안된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중세 수학자들은 독실한 목사처럼 무한을 찬탄했을 뿐이지 철저히 분석해서 자기 손아귀에 넣으려 하진 않았다. 이들은 무한이 존재한다면 단 하나여야 한다는 믿음도 가졌다. 하늘 위에 두 명의 신이 있으면 곤란한 것과 정확히 같은 이유에서, 하늘 아래 수학자들은 두 개의 무한을 생각하지 않았다. 무한 개념에서 유일신의 모습이 겹쳐 보였기 때문에 유연하게 사고할 수 없었고, 서로 다른 두 무한을 구분하는 안목도 갖지 못했다.


마지막 장벽은 무한은 언제나 잠재적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다. 그에 따르면, 무한은 1,2,3,4,5,... 계속 적거나 선분을 끊임없이 절반으로 나누는 작업처럼 결코 끝나지 않는 과정이다. 아무리 큰 수라도 그 다음 수를 찾을 수 있고, 아무리 짧은 선분도 반으로 나눌 수 있다. 따라서 무한히 수를 세고 선을 나누는 일은 항상 미완성 상태다. 미성년 인간이 어떤 성년이 될지 쉽게 예상할 수 없듯이 미완성품의 정체 역시 제대로 알아볼 수 없다. 무한성은 언제나 숨겨져 있다. 잠재적이며 현실로 나타나지 않는다. 말뿐인 개념을 연구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과거에 무한 개념을 떠올린 수학자는 종종 있었지만 무한 연구에 몸바친 수학자는 별로 없었다. 수학자들의 사고는 아주 오랫동안 '무한은 말도 되고 이해도 되지만, 그저 말도 되고 이해도 될 뿐인 것' 정도의 수준에 정체되어 있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100년 전쯤, 세 가지 사고의 장벽은 결국 무너졌다. 주동자는 칸토어다. 그는 무한을 '전체와 같은 크기의 부분을 가진 실체'로 정했다. 무한의 영역에서는 더 이상 '전체는 부분보다 크다'는 전제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제 유클리드와는 안녕이다. 다음, 무한성은 오직 신만이 가진 특성이라는 글귀를 수정해서, 신의 무한인 '절대무한'과 인간의 무한인 '초한(transfinite)'을 구분했다. 그러자 수학자들의 임무는 인간의 무한이 가진 성질을 잘 설명하는 일로 변했다. 이로써 수학자가 연구할 무한의 의미와 경계가 명확해졌다.


마지막으로 칸토어는 무한을 소환하는 정교한 주문인 '집합론'을 창안해 아리스토텔레스와 선을 그었다. 자연수를 차례대로 1, 2, 3, ... 계속 적어보자. 끝없는 과정에 눈길이 간다면, 무한을 이해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방식을 따른 것이다. 이와 달리, 칸토어의 방식은 무한한 과정이 끝난 '결과'에서 출발한다. 자연수를 끝없이 적는 과정이 어떻게든 잘 끝나서 무한히 많은 자연수가 적힌 결과가, 짜잔, 나타났다고 해보자. 이 결과, 즉 무한히 많은 자연수를 싹 다 모은 상자칸토어는 자연수 집합이라 부르고 기호로 {1, 2, ...}와  같이 나타냈다. 보통의 사람들은 상자에 자연수를 계속 담다가 미처 뚜껑을 닫지 못했지만, 칸토어는 일단 상자의 뚜껑부터 닫고 그  상자에는 자연수가 들어있말한 것이. 마치 종이 상자를 그린 뒤, 그 안에 새끼 양이 들어 있다고 말한 어느 비행기 조종사처럼 말이다. 칸토어의 말을 들은 다른 수학자들 또한 어린왕자처럼 손뼉을 치며, 이거야 말로 우리가 바라던 숫자들이라고 좋아했다.


집합론의 언어를 이용하면 무한 사이의 비교가 가능하다. 칸토어는 무한을 이것저것 견주어 보더니 무한에는 여러 '체급'이 있다는 것을 밝힌다. 한마디로, 무한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잠시 자연수를 일부분 선택하는 방법을 따져보자. 1과 3을 고를 수도 있고, 1부터 100까지의 숫자를 모두 선택할 수도 있다. 자연수 중 100만 빼고 모두 택하는 방법도 있다. 이렇게 자연수를 일부분 퍼내는 방법의 수는 무한히 많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방법의 수는 자연수 개수보다도 훨씬 더 무한하다. 다시 말해, '자연수 집합'과 '자연수의 일부분을 선택하는 모든 방법의 집합'이 있다고 할 때, 후자가 더 큰 무한성을 가진다. 정교한 논증을 거치면 이 성질은 일반화할 수 있다. 아무리 큰 무한 집합을 상상하든 그 일부분을 선택하는 모든 방법의 집합이 더 크다. 무한의 체급에는 한계가 없다. 더 큰 무한 집합을 계속해서 찾아낼 수 있다. 즉 무한은 무한히 다양하게 존재한다. 이것이 칸토어의 결론이다.


수학은 '과정'에 이름을 붙여 '사물'처럼 만드는 작업이다. 이건 복잡한 수학이든 단순한 수학이든 매한가지다. 어린 아이 눈 앞에 조약돌 다섯 개를 두고, 몇 개니, 하고 물으면 그 아이는 이를 하나 하나 센다. 하나, 둘, 셋, 넷, 다섯이요. 조약돌 세 개를 추가로 놓고 다시, 이제는 몇 개니, 하고 물으면 그 아이는 처음부터 다시 조약돌을 하나 하나 센다. 하나, 둘, ..., 여덟이요. 이 아이에게 '수'는 대상이 아니라 '세기'라는 과정이다. 이 아이가 조금 더 수학을 공부해야 '하나, 둘, ..., 다섯'이라는 세기 과정을 '5'라는 숫자로 붙잡아 사물 같은 대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칸토르가 한 일도 세기를 숫자로 표현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무한한 과정을 집합 기호를 사용하여 하나의 사물로 만들었다. 이건 그 이전 수백년 간 아무도 해내지 못한 어려운 일이었지만, 어떤 면에서는 세기를 숫자로 표현한 것과 다를 바 없는 친숙한 일이었다. 그가 한 건 수학이다.


칸토어의 집합 언어가 만들어진 후, 현대 수학에서 무한성을 지닌 대상이 처음으로 생겨났다. 드러나지 않음으로써 드러나는 잠재적 무한과 달리, 잘 만들어진 수학 언어를 통해 직접 드러나는 실재적 무한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긴장은 남아있다. 칸토어는 무한한 과정 그 자체를 하나의 사물로 만들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이건 말이 안되는 생각이다. 무한한 과정은 끝나지 않아 결과가 있을 수 없으니까. 무한은 정말 실재할까? 칸토어가 맞다면 그렇다. 아니면 무한은 잘해봐야 '유용한 허구'일까?아리스토텔레스가 맞다면 그렇다. 사실 이 두 사람은 검증할 수 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것은 유한뿐이기에, 아무도 무한을 보고 듣고 만질  없기 때문이다. 그럼 어떡하지? 고대 일본의 호족 오토모노 타비토가 쓴 시에 적혀있듯, 결론이 나지 않는 고민을 할 바에야 술을 한 잔 마시는 편이 낫다. 혹시 모른다. 술 속에 진리가 있을 수도(In Vino Veritas).









(1) 길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스포일러가 있다. 몬탁 해변에서 조엘은 클레멘타인을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진다. 이들은 연인이 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권태를 느끼고 헤어진다. 얼마 후 조엘은 클레멘타인을 다시 만난다. 그런데 그녀가 자신을 처음 보는 사람 대하듯이 하는 게 아닌가. 클레멘타인은 선택적으로 기억을 지워주는 회사 라쿠나에 들려 조엘에 관한 모든 추억을 지운 것이다. 조엘 역시 이 회사에 들려 클레멘타인을 잊는다. 단, 기억 속 클레멘타인이 남긴 작별 인사("잘 가 조엘, 몬탁에서 만나자.")는 빼고. 그 후 어느 날, 즉흥적인 마음으로 몬탁 해변으로 떠난 조엘은 그곳에서 클레멘타인을 만난다. 이들은 서로 사랑했던 이유를 모조리 잊었다. 그럼에도 이전의 그날처럼 다시 한 번 사랑에 빠진다. 이런 반복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일만 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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