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해결법
"야, 행복에 정답이라는 것이 어디있어?"
"나는 정치적으로 중도성향이야, 혹은 '중도'우파, '중도'좌파야"
"사회가 원하는 나의 모습에 맞춰야지 돈도 벌고 가정도 이루고 살지!"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가끔 철학적인 질문이 오가기도 한다. 대부분 인간의 행복, 사랑, 정치, 사회와 관련된 주제들이다. 그러다 보면 대부분의 친구들에게서 굉장히 재미 있는 공통점을 발견한다.
위의 대화 내용을 살펴보자.
재미있는 공통점이 여러분들에게도 보이는가?
1. 야, 행복에 정답이라는 것이 어디있어?
행복. 많은 인간이 추구하는 이 보편적 가치에는, 정답이 없고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정말 합리적이고, 맞는 말이다. 행복에 정답이 있다면 이미 많이 공유되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만 살도록 노력하지 않았을까.
2. 나는 정치적으로 중도성향이야, 혹은 '중도'우파, '중도' 좌파야.
실제로 많은 이들과 정치성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보면 높은 확률로 '중도'라는 말을 쓸 것이다. 그 뒤에 자신의 성향과 조금이라도 더 맞는 성향을 붙이기도 한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태도! 얼마나 아름다운가. 극단적인 성향의 극좌, 극우인 이들은 얼마나 꽉막힌 이들인가?
3. 사회가 원하는 나의 모습에 맞춰야지 돈도 벌고 가정도 이루고 살지!
10대에는 공부를하고, 20대에는 취업을 30대에는 결혼을 한다. 이제는 공식을 넘어 하나의 견고한 시스템이 되어버린 대한민국의 로드맵이다. 사회가 정해놓은 당연한 것들! 좋은 성적을 받아 좋은 대학을 가고 좋은 직장에 다니는 것! 아 상상만해도 얼마나 안정적이고 남들보다 뒤쳐지지 않는 삶을 영위할 수 있음에 얼마나 감사한가? 내가 좋아하는건 취미로 해도 충분하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단번에 알아챘겠지만, 바로 '사회가 나를 합리적으로 보았으면'하는 속마음이 투영된 말들이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두가지의 본질적인 행동 원인이 있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행복에 정답이 있다라고 말하게된다면, 그 말을 듣는사람으로부터의 비난을 감수해야한다. 당신의 그 말을 듣는 사람이 생각하는 행복과 정답이 달라도, 혹은 그들이 행복에 정답이 없다고 생각하여도 모두 듣는이들이 조금은 언짢아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중도성향이라고 하는 당신의 친구는 무엇을 할때마다 생각이 너무 많아지고 막막해한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있고 자신이 한 선택이 정말 옳은지, 때로는 병적으로 자문한다. 완벽하지 못할 바에는 시작하지 않는 것이 나은 편이라고도 생각한다. 그러다가 막상 또 하면 잘할 때도 많다.
사회가 원하는 바람직한 인재상이 되기위해 열심히 취업을 준비하여 원하던 회사에 입사한 당신의 친구는 미소를 짓고, 근면하며, 바쁘게 일상을 살아간다. 수시로 카톡연락을 확인하며 직장상사 혹은 동료에게 연락이 오진 않았을지 정신을 곤두세운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주말엔 집에 누워있거나 친한친구 몇명과 함께 술한잔하면 나름대로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하며 또 알찬 일주일을 시작한다.
현대인, 특히 한국인의 상당수가 위와 같이 생각하고 행동하여 합리적인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하는 두가지의 본질은 바로 정보의 과잉과, 사유책임회피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엔 자신을 '합리적인 나'로 정의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정보의 과잉은 생각보다 여러분 머리를 심각하게 뒤흔든다. 스마트폰, 인터넷, 유튜브, 인스타그램, 릴스, 쇼츠, 틱톡, ChatGPT, 페이스북, 그 외의 하루에도 수십번씩 울리는 알람들. 수없이 많은 매체로부터 수없이 많은 정보를 받는 뇌는 한가지 인간의 아주 고유한 능력을 퇴화시키기로 결정한다. 바로 '수렴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이다.
A도 그럴듯하고 B도 그럴듯하네! 오 지금보니 C도 좀 그럴듯 하군! 많은 걸 알게 되었어.
많은 정보에서 하나의 입장을 선택하여 그것을 지지하는 것은 뇌에게는 너무나도 큰 부담이다. 따라서 우리는 편한 선택을 한다. 판단을 하지 않거나, 아니면 모두 맞을 수 있다는 열린 정답을 머릿속에 가지거나.
사유책임회피를 통해 우리는 생각의 주체를 나로 두는 것이 아닌 나의 외부세계로, 즉, 다른 사람 혹은 다른 단체, 사회가 따르는 아젠다를 그것으로 둔다. 내가 생각해서 행동한 것이 아닌 외부에서 그렇게 하라고 했기에 나에겐 생각할 책임도, 또 그에 따른 결과에 대한 책임도 줄어든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남들이 이미 생각한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그러나 생각의 주체를 여러분이 아닌, 외부세계가 정해 놓은 틀에만 맞추는 것이 정말로 바람직할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사회생활인데!
드디어 취직에 성공했다. 매뉴얼이 필요해! 어디있을까?
어느 업무를 할 때 매뉴얼을 지켜서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매뉴얼이 없다면? 매뉴얼보다 나은 생각이 났는데 감히 시도하는 것은 나쁜 것일까?
따라서 많은 현대인들은 다음과 같은 자신을 선택한다.
많은 정보가 모두 맞을 수 있고, 또 내가 한 생각보다 선대가 한 생각이 더 옳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업무를 효율적으로하기 위해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는, 합리적인 사람이 되자.
이러한 생각은 얼핏보면 매우 현대적이고 합리적인 인간군상으로 보일수있어 매혹적이다.
그러나 높은 비율의 인류가 이렇게 생각하게 된지는 불과 100년도 채 안되었다는 것을 아는가?
현대인의 심각한 문제는 다름아닌 정신건강인 것을 아는가?
정신병원을 가서 예약을 하면 족히 1달은 훌쩍 넘겨 기다리는 경우를 보았는가?
포스트 모더니즘 이후,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생각이 급속도로 퍼진다. 이성(理性)보다는 감성과 다양성, 존중이 더 높은 미덕이 되었고 우리는 우리의 정신을 의지할 두꺼운 버팀목을 잃어버렸다.
많은 정보를 접할수록 생각하는 능력이 오히려 낮아진다.
내가 주체가 되어 사유하면 그에 대한
책임을 오롯이 져야한다.
고통을 감수해야한다.
사회적으로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찍힐 각오도 있어야할 것만 같다.
잘난 척 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며, 우리에게 적당히 멋있는 지위를 부여하고 싶다.
바로 합리적인 사람.
그에 따른 부작용은 만성적인 정신적 피로와 두통, 시도때도 없이 찾아오는 머릿속 안개. 무표정. 아이 때의 순수함을 잃은 미소. 사회적 미소. 사회적 생존을 위함.
해결책은 간단하다. 바로, 자신만의 세상을 보는 렌즈를 만들어보는 것 이다.
모든 것이 맞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진리가 있다고 생각해보라.
남이 정해주는 진리가 아닌, 여러분이 직접 여러분만의 진리를 만들어보고 테스트 해보라.
많은 정보를 접하지 말라.
스마트폰을 꺼두고 업무를 해보자. 정말 유의미한 대화가, 그리고 연락이, 스마트폰이 있어야만 가능한가?
화장실에 스마트폰을 들고가지 말아보자.
온전히 여러분 자신에게 돌아가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미디어가 가공한 정보를 접하지 말고 진짜 정보를 찾아보자. 그리고 여러분 스스로 그 정보를 분별하는 렌즈를 만들어보자.
여러분 생각에 대해 책임을 져보자.
합리적인 사람을 자처하지 말라.
편향될 수도 있는 자신을 받아들여보자.
이 세상을 보는 견고한 당신만의 렌즈를 만들어 오롯이 당신만의 세상을 보고 느껴보자.
여러분의 머릿속은 놀랍게도 정렬되고, 절친이었던 머릿속 안개는 여러분의 날카로운 렌즈가 무서워 도망치기로 결심한다.
진정한 정신적인 자유와 행복을 만끽해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