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원 Jun 24. 2022

윌리어미나 플레밍

“우리 집 가정부가 해도 자네들보단 잘하겠네!”     

하버드 천문대의 천문대장이었던 에드워드 피커링은 스펙트럼의 분석을 맡은 직원들의 성과가 성에 차지 않았다. 분석해야 할 스펙트럼은 쌓여있는데 진행 속도는 느리고 꼼꼼하지 못했다. 직원들이 일을 못한다고 아내에게 불평을 늘어놓던 어느 날, 피커링의 아내는 가정부 이야기를 꺼냈다. “정말로 가정부를 천문대에서 일하게 해 보는 건 어때요? 집안일만 하기엔 아까운 인재예요. 재정 관리도 꼼꼼하게 잘하고 계산도 빨라요.”     

그리하여 윌리어미나 페이턴 스티븐스 플레밍이란 긴 이름을 가진 가정부는 천문대에서 일하게 됐다. 처음에는 서류를 복사하거나 사무 일을 주로 맡았다. 곧 피커링은 아내 말대로 플레밍이 영특한 인재라는 걸 눈치챘다. 그리고 플레밍에게 별의 스펙트럼을 분석하는 일을 맡겼다. 과연 플레밍은 피커링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피커링이 전에 천문대 직원들에게 한 말처럼, 가정부가 남자 직원들보다 훨씬 뛰어난 성과를 보인 것이다.     


플레밍은 미국이 아닌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님은 아이를 아홉 명이나 낳았는데, 플레밍이 일곱 살일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집안 사정이 어려워졌다. 공부를 잘했던 플레밍은 고작 열네 살에 아이들을 가르치며 돈을 벌었다. 하루라도 빨리 독립하는 것이 가족을 위해서도, 자신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었을 것이다. 플레밍은 열여섯 살이나 많은 남자와 서둘러 결혼했고 이듬해 미국으로 이주한다. 그러나 인생은 마음처럼 쉽게 풀리지 않았다. 남편은 플레밍과 뱃속의 아들을 버리고 집을 나가버렸고, 플레밍은 미국에 홀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먹고살 길을 찾기 위해 피커링의 집에 가정부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천문대의 직원들이 밤새 스펙트럼을 촬영하면, 플레밍은 스펙트럼이 담긴 사진 건판을 책상 위에 놓고 확대경으로 스펙트럼을 면밀히 관찰했다. 플레밍은 스펙트럼에 보이는 얇은 까만 실선을 가지고 별들을 분류하고, 비슷한 스펙트럼을 가진 별들을 묶어 하나의 그룹으로 만들었다. 이 방식은 피커링-플레밍 시스템이라 불린다(이후 애니 점프 캐넌이 이 분류법을 발전시켰다). 플레밍은 9년 동안 1만 개 이상의 별들을 분류했고, 그 결과를 드레이퍼 항성 스펙트럼 목록(Draper Catalogue of Stellar Spectra)이라는 이름의 논문으로 출간했다(논문에 플레밍의 이름은 적히지 않았다. 피커링의 이름만 적혀있을 뿐이다). 스펙트럼 분석뿐만 아니라 천문대에서 출판하는 모든 자료는 플레밍의 손을 거쳤다. 저술, 편집, 교정 등등... 아무리 일을 잘한다지만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많은 일을 주다니, 너무하는 것 아닌가? 플레밍도 비슷한 불평을 했다. 플레밍의 성과는 만족스러웠고, 스펙트럼은 쏟아지기에, 피커링은 여성을 더 고용하기로 하고 플레밍에게 인사권을 넘겼다.     


플레밍은 천문학에 재능이 있고 열정을 보이는 열두 명의 여성을 뽑았다. 이 여성들을 하버드의 컴퓨터(또는 하버드 컴퓨터스)라 부른다. 하버드의 컴퓨터 중에는 애니 점프 캐넌이나 헨리에타 스완 리비트처럼 유명한 이들도 있다. 플레밍은 이 여성들과 함께 지내며 죽기 직전까지 약 30년간 천문대에서 일했다. 그동안 무려 200,000개 이상의 사진 건판을 들여다보았고, 10개의 신성, 52개의 성운, 310개의 변광성을 발견했다. 또한 최초로 말머리성운과 백색왜성을 발견하기도 했다. 하버드 대학 천문대는 1898년에 플레밍에게 천체사진 큐레이터라는 직함을 주었고, 1906년엔 미국인 여성 최초로 영국 왕립 천문 협회의 명예 회원이 되었다. 멕시코 천문학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하기도 했다.     

에드워드 피커링(왼쪽)과 하버드의 컴퓨터들. 가운데 서 있는 여성이 플레밍이다(이미지: 하버드 매거진)




이 와중에 플레밍은 여성 후배들을 위한 활동도 이어갔다. 1893년엔 <천문학 분야에서의 여성의 노동>이란 논문을 출판했고, 남성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여성의 임금에 의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당시 하버드의 여성 조수들은 남성 말단 직원이 받는 것보다도 한참 적은, 시간당 25센트를 받고 일했다. 플레밍이 남긴 기록 중에선 분노에 찬 문장도 찾아볼 수 있다. “내가 여자치고 많은 임금을 받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 또한 남자 못지않게 지켜야 할 가정과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다는 걸 피커링은 모르는 것일까?”     


하버드 대학 천문대의 큐레이터이자 엄마였고(그러고 보니 이제까지 소개한 여성 천문학자 중 첫 엄마이기도 하다), 편집자였으며 여성 천문학자를 위한 운동가였던 플레밍은 폐렴으로 일찍이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플레밍의 성실함과 꼼꼼함, 그리고 후배 여성들을 위한 따뜻한 마음은 그녀가 떠난 후에도 피커링의 연구소에 오래도록 남았다. 그리고 하버드의 컴퓨터들은 플레밍이 닦아놓은 길을 계속 걸어갔다.

매거진의 이전글 마거릿 린제이 허긴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