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종 만들기
한여름은 농부들에겐 잠깐 쉬어가는 계절입니다. 아침 9시만 되어도 이미 기온은 섭씨 30도가 넘어가지요. 물론 제주는 바람이 불어 그나마 시원하지만 그것도 잠깐일 뿐, 땡볕에 쭈그리고 앉아있으면 금세 등이 축축해집니다. 작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잎채소는 녹아내리고 잡초마저 시들해지지요. 그러나 길쭉한 무언가가 자라고 있는 밭이 있다면 그것은 '참깨'일 겁니다. 참깨는 이 동네에서 한 여름에 수확하는 유일한 작물이거든요. 8월 중순에는 밭 가장자리에 깻단이 줄지어 서있고, 그 위에 비닐을 덮어놓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렸다가 며칠 뒤에 깨를 터는 것 같더군요. 더운 날에 일해야 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는데 깨를 털고, 깨를 골라내는 작업까지 해야 한다니 참기름이 왜 비싼 지 알겠더라고요. 누군가가 참기름이나 들기름을 선물한다면... 그건 사랑 표현(?) 일지도 모릅니다.
우리 가족은 다행히 깨 농사를 짓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마냥 놀 수도 없지요. 하반기 농사를 준비해야 하니까요. 이전과 마찬가지로 올해도 양배추와 콜라비를 심습니다. 농부들은 땅에다 바로 씨앗을 심지 않고, 모종을 만들어 키운 뒤, 모종을 땅에다 심습니다. 모종을 만드는 과정은 이렇습니다. 일단 모종판(포트)이 필요합니다. 저희가 사용한 모종판은 한 판당 200개의 씨를 심을 수 있습니다. 작년에 사용하고 겹쳐놨던 모종판이 흙 때문에 단단히 들러붙어있어 하나하나 분리해야 했습니다. 어머니 말로는 흙을 잘 털어도 이렇게 모종판이 잘 붙는다고 해요. 아무래도 물로 씻고 말린 뒤에 겹쳐서 보관을 해야 하나 봐요. 모종판은 재활용도 안 된다던데, 재활용도 되고 보관하기도 쉬운 재질로 만들면 안 되려나요? 망가지지 않으면 재구매율이 떨어져서 일부러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모종판을 분리하고 나면, 그 위를 상토로 채웁니다. 포인트는 꾹꾹 눌러 담지 않는 것입니다. 적당히 손으로 상토를 잘 펴주면 된답니다. 이제 씨 심는 기구가 필요합니다. 말로 설명하긴 좀 어려운데, 맨 위에는 씨앗이 들어가는 200개의 작은 구멍이 있어요. 이 구멍에 씨앗을 한 개씩 넣어준 뒤 버튼을 누르면, 호스를 따라서 모종판의 각 포트에 씨앗이 들어간답니다. 씨앗은 은단 크기만 해서 혹여나 두 개씩 들어가면 찾아서 빼기도 힘들지요. 처음에는 각 구멍에 씨앗을 한 개씩 넣는 일이 오래 걸렸는데 100판 이상 해보니 금세 익숙해지더군요. 이런 기구가 없었다면 그 작은 씨앗을 핀셋으로 집어 하나씩 심었겠지요. 그래도 아쉽긴 해요. 씨를 심는 더 쉽고 편한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혹시 좋은 생각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씨앗이 들어간 모종판 위에 다시 한번 상토를 깔아줘야 합니다. 이것까지 마치면 모종판을 일렬로 깔아줄 준비를 합니다. 모종판은 물이 잘 빠지고 통기가 잘 되어야 해서 판이 바닥과 닿지 않도록 띄워야 합니다. 중간중간에 컨테이너를 두고, 그 위에 기다란 막대 3-4개를 올리면 모종판을 올릴 진열대가 만들어지지요. 모종판은 힘이 없고 잘 휘어지거나 부서지기 때문에 두 손으로 소중히 들어 옮겨야 합니다(만일 실수로 걸어가다 모종판을 떨어뜨렸다면 온 가족의 질타를 받을지도 모릅니다!). 모종판 정렬이 끝나면 오늘 할 일은 끝입니다. 이제 흙먼지를 털고, 주변을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가 푹 주무시면 됩니다.
자 이제 일어나세요! 해가 뜬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왜 벌써 깨우냐고요? 그야 모종에 물을 줘야 하니까 그렇죠. 오늘부터 2주 정도는 아침저녁으로 모종에 물을 줘야 합니다. 물 분사기로 포트가 충분히 젖도록 정성껏 물을 줍니다. 하지만 물을 어느 정도 줘야 하는가에 대해선 농부마다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물을 주는 모습을 보면 저희 부모님은 '물을 대충 준다'라고 하시는데, 덕양이 삼촌과 영숙이 이모(지난 화 참조)는 '물을 너무 많이 준다'라고 하시거든요. 30년 이상 경력을 갖춘 농부들도 '적당히'가 뭔지 모른다니. 그들은 정말로 답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자연 앞에서 겸손해지는 법을 배운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씨를 심은 지 이틀 뒤, 멀리서 본 것인데도 모종판이 갈색이 아니라 초록색으로 보입니다. 싹이 난 것이지요! 해가 뜨기 전에 모종이 자라는 비닐하우스로 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식물이 자라는 데에는 물뿐만 아니라 농부의 책임감과 정성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알게 됐습니다. 비닐하우스에서 함께 모종을 키우는 농부님들도 모두 때가 되면 약속이나 한 것처럼 물을 주려고 나타났지요. 그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싹은 쑥쑥 자라고 있습니다. 이 작은 씨앗에서 이파리가 나고, 몇 달 뒤 커다랗고 단단한 양배추와 콜라비가 된다니, 참 신기합니다. 그들이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면 왜인지 저도 성장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이 듭니다. 쑥쑥 자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