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내기, 막걸리 한잔

중심

by 바스락

2남 3녀 중 막내인 나는 유일하게 농사일 경험이 많다. 봄이 되면 모내기하고 가을이 오면 추수하고 밭으로, 논으로 하교 후 집에 오면 엄마 찾아 이리저리 뛰어다녔던 그때 나에게 꿈이 있었다.


시골 논길을 질주하는 경운기 운전사. 무거운 짐도 척척 실어 날라 주고 먼 거리도 손쉽게 갈 수 있는 시골의 교통수단. 엄마의 발이 되어주고 짐꾼이 되어주는 경운기를 직접 운전 하고 싶었다. 무거운 짐을 머리에 위고 지고 걸어가다 보면 신작로를 쌩하고 달리는 경운기가 부러워 한참 넋을 놓고 쳐다봤다.


빨리 커서 이양기, 경운기 운전을 배워 든든한 농기구 마스터가 되고 싶었다.

이른 아침부터 우리 집은 모내기로 분주하다. 엄마는 힘센 장정들도 버거워하는 모판을 번쩍번쩍 들어 올린다. 봄에 모판에 볍씨를 심어 푸르게 잘 자란 모판들이 오늘 우리 집을 떠나 논에 쏙쏙 박히는 날이다. 농촌은 품앗이로 바쁜 농번기를 이겨낸다. 초봄부터 시작한 엄마의 품앗이는 오늘을 위한 투자였다.


여기저기 분주한 사람들 속에서 아버지는 못줄을 챙기고, 마을 사람들이 볏모를 한 줌씩 뽑아 들고 곱게 갈아놓은 논으로 향하면 나는 아버지가 풀어놓은 못줄을 잡고 아버지 반대편으로 향한다. 질퍽한 논을 가로질러 아버지를 마주 보고 줄을 당겨 본다.


“어엉차” 아버지 구령에 따라 못줄을 당겼다가 놓기를 반복한다.


꾸부정하게 엎드려 모를 심다가 하나둘 허리를 펴기 시작하면, 아버지와 나는 못줄을 확 잡아당겨 뒤로, 뒤로 못줄을 이동시킨다. 아버지는 선장이 되고 나는 선원이 되어 “못줄 댕겨”를 외치며 합을 맞춘다.


손에 힘이 빠지면 양쪽 다리를 삼각형으로 벌리고 빳빳하게 힘을 준다. 그러다 다리에 힘이 빠지면 발바닥을 땅에 고정이라도 시킬 생각으로 온 힘을 발바닥으로 쏟아붓는다. 몸이 불편한 아버지는 상체가 반이 접혀 못대를 지지대 삼아 버티고 있지만, 입술을 앙다물고 있었다.


곱게 갈아놓은 논에 초록 물결이 반쯤 넘실거리면 시원한 음료수와 삶은 국수를 담은 소쿠리를 이고 엄마가 저만치서 소리친다. “새참 드시고 하 씨요”


음식솜씨 좋은 엄마는 국수를 삶고, 빈대떡을 부쳐 오셨다. 논에 뿌려진 초록 물결은 실바람에 흔들흔들 춤을 추고, 못줄을 잡고 있던 아버지도 허리를 굽혀 모 심던 아저씨, 아주머니도 엄마의 새참 소리에, 질퍽한 논을 가로질러 논두렁으로 향한다.


달달한 막걸리 한 모금으로 허기를 채우는 아버지를 따라 밀키스를 벌컥벌컥 마시고 "캬" 하면 동그란 아버지 눈이 반달이 되었다. 바싹하게 익은 빈대떡 가장자리를 떼어 아버지와 안주 삼아 먹는 동안 봄의 웃음이 주위를 맴돌았다.


“아따 아제가 오늘 큰일 하시구만, 못줄을 잘 잡아 주싱게 솔찬히 빨리 끝나것어라”

“아짐네 일하러 오믄 새참이 맛나서 힘든 줄 모른당 게”

“아짐도 한잔 하세라”


엄마는 막걸리를 받아 들고 망설임 없이 시원하게 마시더니 잔을 툭툭 털어,

나이 지긋한 아저씨에게 잔을 내밀었다.


“다들 감사혀요 언능 끝내고 저녁은 집에서 자시고들 가세라”


expatsiam-rice-transplanting-983760_1920.jpg 출처 : Pixabay


그해 봄 모내기, 아버지는 술에 취하지 않았다. 모내기하고, 벼를 베고, 탈곡할 때면 일꾼들보다 먼저 취해서 일을 방해하고, 논두렁에 쓰러져 주무셨던 분이, 파릇한 모처럼 얌전한 소년이 되어 동네 사람들이 놓고 간 농기구를 정리하고, 어수선한 집 안 청소를 마다하지 않으셨다.


하루 종일 못줄을 잡아당겨서 온몸이 욱신거렸고, 목장갑을 두 개나 꼈지만 손가락에는 커다란 물집이 생겼다. 볏모를 줄 맞춰 심기 위해 못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겨야 할 때와 느슨하게 놓아줘야 할 때를 알고 있는 아버지는 '못줄 댕겨'를 외치며 중심을 잡아 주셨다.


매일 술을 드셨지만, 가끔 아버지는 해야 할 일에 몰두하시곤 하셨다. 아주 많은 날 중 며칠이었지만, 원망보다 이해하는 삶을 택하고 살아가는 힘이 되어 주기도 했다. 엄마처럼.



엄마의 봄,

아버지의 봄,

파릇했던 그날 함께였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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