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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근긍 Aug 23. 2018

<서치> 노트북 속 서스펜스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노트북 속 세상을 가능하게 하는 방식와 그것으로 불가능한 감동


0. 새로운 경험의 영화

영화 <서치>는 놀랍게도 노트북 화면만으로 진행한다. 갑작스러운 딸의 실종과 사라진 딸을 찾기 위한 아버지의 고군분투라는 상투적인 서사는 노트북 화면이라는 한계로 인해 우리에게 새로운 경험을 가져다준다. 최근 드라마를 보면 메시지를 보내는 핸드폰의 화면이 반드시 등장한다. 핸드폰의 화면 없이 서사를 전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노트북 속 화면만으로 서사를 진행한다는 것 역시 불가능한 상상만은 아닐 것이다.


영화사에서 한계를 가지고 영화를 진행하며 그것을 영화의 개성으로 삼는 경우가 적지 않게 있었다. 로드리고 코르테스의 영화 <베리드>는 영화 대부분을 관이라는 좁은 공간 속에서 진행하며 우리에게 폐소공포증을 느끼게 한다. 혹은 자파르 파나히의 영화 <택시>는 자동차 앞에 작은 카메라를 둬, 거기에 비치는 이란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이란 사회의 모순을 그린다.


물론 이러한 한계를 부여하는 영화들은 거대자본이 소요되는 영화산업에서 적은 비용으로 창작자의 재능을 발휘할 기회가 되기도 한다. 물론 <서치> 역시 이러한 제작 방식이 자본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노트북 화면만으로 영화를 진행하기 때문에 제작 비용은 당연하게도 줄어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제작 비용의 문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동시에 이 영화의 놀라운 성취는 영화가 설정해놓은 한계를 극복하는 방식이 서사의 진행을 추동하는 방식과 정확히 맞물린다는 것이다.



1. SNS라는 플래시백

갑자기 사라진 딸, 마고. 아버지 데이빗(존 조)는 딸을 찾으려 나서지만, 딸에 대해 아는 게 없다. 그가 선택한 방식은 딸의 SNS를 통해 사라지기 전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확인한 딸의 SNS는 예상과 다르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는 친구가 없던 딸의 외로움이 있다. 텀블러의 사진 속에는 딸이 혼자만 알던 휴식처가 있고, 유캐스트의 영상에는 딸의 유일한 친구가 있다. 다양한 SNS를 거쳐 가는 아버지의 추리 과정 속에 딸의 과거가 보여진다. 이때 딸의 컴퓨터 속 화면은 마치 '플래시백'처럼 딸의 과거를 비춘다.


노트북의 화면으로 영화의 이미지를 제한했을 때 당연하게도 영화의 시간은 지금 현재로 고정된다. 이때 시간을 과거로 되돌리는 것은 SNS 계정이다. 물론 파란색 윈도우 바탕화면으로 시작하는 영화의 도입부는 추억을 저장하는 엄마의 노트북 속 화면을 통해 딸인 마고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엄마가 암으로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빠른 속도로 그려낸다. 다만 SNS가 노트북 속 저장된 이미지와 구별되는 것은 그것이 누군가의 접근을 허용함과 동시에 자신2의 정체를 숨길 수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SNS는 사적으로 노출된 기록이며, 시간을 되돌려 누군가의 감춰진 마음에 들어가는 플래시백의 기능을 한다.



2. 어디에나 있는 카메라


노트북 화면으로 제한된 현재에서 SNS를 통해 딸의 과거 시간으로 플래시백한다면, 노트북 앞이라는 공간을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어디에나 위치한 카메라의 존재이다. 영화 속에서 카메라는 어디에나 위치하며, 데이빗은 이를 통해 노트북 화면만으로 어디든 볼 수 있다. CCTV 영상을 통해 도로 위와 경찰서를 오가고, 몰래카메라를 숨겨 용의자를 확인한다. 사고현장을 헤매고 다른 이와 다투는 아버지의 모습 역시 카메라를 피할 수 없다. 이 역시 누군가의 핸드폰에 찍혀 순식간에 유튜브에 오른다. 심지어 사고 현장의 증거물 사진 역시 불법으로 인터넷에서 확인할 수 있다.


노트북 화면을 통해 사건의 전개를 보여준다는 영화 속 설정이 당황스럽지 않은 것은 노트북 화면만으로 모든 것을 본다는 행위가 단순한 영화적 과장이 아니라 우리 일상의 현실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CCTV는 곳곳에 있으며, 모두의 손에 쥐어진 스마트폰 속 카메라는 언제든 세상을 기록할 준비를 하고 있다. 그 때문에 세상 어느 곳도 카메라의 렌즈에게서 숨을 수 있는 곳은 없다. 어디에나 존재하는 카메라는 아빠의 눈을 대리하여 어디든 바라본다. 그리고 그것은 이 영화가 공간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동력이기도 하다.



3. 낯설지만 익숙한 이미지


이 영화의 방식이 가능했던 것은 SNS와 카메라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거로 플래쉬백하게 하는 SNS와 어디에나 위치하는 카메라의 존재를 통해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극복하여 데이빗의 노트북 속 화면만으로 영화를 즐길 수 있다. 한편 데이빗은 SNS를 통해 사라진 딸의 흔적을 찾고 추적한다. 거기에는 딸과 아버지 사이의 보이지 않는 갈등과 딸이 사라진 이유, 그리고 가족을 아프게 하는 위협이 있다. 또한 세상은 카메라에 비친 그들의 모습만으로 그들을 얘기하고, 마치 모든 것을 봐도 된다는 듯 폭력적으로 카메라를 어디에나 위치시킨다. 21세기에 완벽하게 우리를 침투한 소셜네트워크와 그 크기가 작아져 어디든 존재하는 카메라는 이 영화가 성립할 수 있는 배경인 동시에 이 영화 속 사건의 원인과 해결을 결정하는 논리이다.


이 영화가 진행하는 방식이 조금은 낯설지만, 우리는 이내 익숙해져 노트북 화면 앞에서 벌어지는 서스펜스를 즐기게 된다. 그것은 우리의 세상이 영화 속 노트북 화면의 이미지처럼 '가상 세계'와 '보여지는 것'을 향해 급속도로 익숙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SNS와 카메라라는 이제는 익숙한 이미지를 통하여 세상을 경험하고 있는지 모른다.



P.S. 감동은 보여지지 않을 때 생긴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의 한 장면을 얘기해야 할 것 같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딸은 노트북의 바탕화면을 돌아가신 엄마와 찍은 사진에서 아빠와 찍은 사진으로 바꾼다. 이 단순한 마우스의 움직임은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아빠와의 관계 회복하는 딸의 심경변화를 그린다. 이 순간이 감동적인 것은 노트북 화면 속에 비친 이미지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우리가 딸의 표정과 마음을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딸을 잃은 아버지의 인터뷰가 유튜브 영상을 통해 그대로 보여질 때 그것은 슬픔이라는 감정에 하나의 벽이 쳐진 느낌이다. 이 영화는 모든 것을 보여주기 바쁘다. 타이핑했다가 지우는 것으로 말하지 못하는 감정을 표현하는 이 영화는 모든 것을 보여주려 한다. 하지만 앞선 장면의 감동은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게 하는 데에 있었다. 보이지 않는 빈틈을 통해 전해지는 단순한 마우스의 움직임이 주는 감동은 영화 속 '가상'의 '보여지는' 세상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될 수가 없음을 동시에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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