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가 만들어낸 집단적 죄책감과 죄없음을 증명하려는 위태로운 폭력
※ 이 글은 영화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한 소녀가 사라졌다. 소녀의 실종을 둘러싸고 경찰과 학교, 학부모 그리고 학생들까지 말들이 오간다. 하지만 무엇 하나 정확한 것은 없고, 그 누구도 소녀의 실종을 설명하지 못한다. 오직 남아 있는 것은 자살 직전 터널 cctv 속 영상뿐이다. 철저히 음향이 생략된 cctv영상 속에는 사라진 경민(전소니)과 같은 반 영희(전여빈)가 뽀뽀하는 순간이 담겨있다. 경민이 사라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난 영희가 의심의 자리에 서고, 영희가 경민이 자살하는 것을 보고 싶어 했다는 한솔(고원희)의 증언이 보태진다. 뒤늦게 경민의 시신이 발견되고 소녀의 자살은 더 큰 미지가 된다. 갑자기 발생한 거대한 미지 앞에서, 영희는 그 마지막을 함께 했다는 이유로 그 중앙에 불러세워 진다.
영화의 시작은 교실이다. 오랜만에 학교에 돌아왔다는 한 소녀가 교실 앞에 서고, 그녀는 말을 하지 못하는 듯 수화로 자기 생각을 전한다. 그 소녀가 영희임은 후에야 알 수 있다. 영화의 초반부에는 음성의 생략이 있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화장품 가게에서 세 소녀의 시선이 교차하고 대화는 귓속말로 전달된다. 화장품 가게를 나온 소녀들이 지하철에서 다시 만났을 때 오가는 대화조차 지하철의 소음과 함께 들리지 않는다. 그들의 말은 우리의 귀에 와닿지 않고, 거기에 담긴 정보는 생략된다. 이러한 생략은 자살한 경민의 죽음처럼 미지를 남긴다. 여기서 발생한 미지의 구멍은 밝혀야 할 미스터리가 아닌, 밝혀질 수 없는 심연이다.
밝혀질 수 없는 미지의 구멍 앞에, 나타나는 것은 남겨진 사람들의 반응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영희에게 책임을 묻는다. 하지만 어떠한 증거도 없는 이들에게 그것이 확신에 찬 반응이라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이유를 알 수 없는 죽음 앞에서 자신의 죄책감을 벗어나기 위한 태도일 것이다. 그들은 모두 경민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낀다. 경민의 엄마(서영화)는 일하느라 딸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소홀했다. 같은 반 친구들은 누구도 경민과 가까이 지내지 못했으며, 한솔은 경민에게 죽어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자살의 원인이 된 누군가를 찾아 자신의 죄책감을 떨쳐내는 것이다. 그들이 영희에게 보여준 폭력은 미지의 죽음에 대한 반응이자 자신의 죄 없음을 증명하려는 안간힘이다.
이건 폭력의 피해자가 된 영희 역시 마찬가지였다. 경민이 실종되고 경찰의 조사가 시작된 날. 영희는 경민의 지난 행적을 쫓는다. 뭐하러 다니는 거냐는 경민모의 물음에 영희는 경민이 살아있으며 죽은척해서 자신을 엿먹이고 있으니 내가 찾아서 증명하겠다고 말한다. 불안하면서도 광기에 휩싸인듯한 영희는 죄책감을 느끼는 동시에 자신의 죄 없음을 증명하려 한다. 경민의 장례식장에서조차 경찰관과 선생님에게 자신은 책임이 없으며 자신의 진술이 잘못된 것 같으니 고치겠다고 말하는 영희의 태도는 경민이 살아있다고 말하는 그 순간부터 이어져 오던 것이다. 그러므로 영희의 자살시도는 자신의 죄 없음을 증명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다.
영희는 자살시도로 자신의 죄 없음을 증명할 수 있었을까. 언뜻 그렇게도 보이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자살시도로 증명되지 않았다. 자살시도 다음 날. 화장실에 모인 소녀들이 영희의 자살시도에 관해 얘기한다. 마지막까지 쳐다보며 피 흘리는 눈이 얼마나 독했는지. 진짜 자살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쇼였다든지. 만일 자살이 성공했다면 영희는 경민을 죽인 범인이자 독한 인간으로 남았을 것이고, 너무 쉽게 회복했다면 경민을 죽인 범인의 표독스러운 쇼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수평적으로 소녀들 각자의 움직임을 바라보다가 돌연 멈춰서는 화장실 속 소녀들의 대화 장면은 영희가 자살시도를 통해 자신의 죄 없음을 증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영희의 죄 없음을 증명하며 사람들이 영희에게 무릎 꿇도록 하였을까. 역설적이게도 영희의 죄 없음을 증명하는 것은 영희의 자살이 아니라 찢어진 육체와 그녀가 겪는 고통이다. 영희의 생리가 피 묻은 휴지를 통해 믿어질 수 있듯, 영희의 죄 없음은 피 흘린 육체의 고통을 통해 증명된다. 친구들이 영희의 병실을 찾는 장면에서 과도하게 유려한 트래킹 쇼트는 풍선을 붙이고 병실을 꾸미는 학생들의 태도를 낯설고 과장되게 바라보도록 한다. 영희가 자살하는 순간까지도 영희에게 죄를 묻던 그들은 병실에 누운 채 고통받는 그녀의 육체를 확인함으로써 그녀를 숭고함의 자리에 가져다 놓는다. 한솔의 손가락을 자신의 구멍 난 목에 넣는 것은 육체적 고통이 만들어낸 숭고함을 그리는 가장 인상적인 이미지일 것이다.
이제 적어도 학생들에게 영희는 '죄 없는 아이'이다. 그녀는 자신의 피로 자신의 죄 없음을 증명했다. 일면 종교적인 이 절차를 거쳐 그녀는 마치 그들의 죄 없음을 증명해줄 혹은 용서해줄 구원자가 된 듯하다. 이제 경민의 자살은 잊혀졌다. 영희의 자살시도만 남아 있을 뿐이다. 애초에 영화는 자살의 원인에 무관심해 왔다. 경민의 유서가 한참 뒤에 발견되지만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고, 신뢰할 수 없는 내용만이 학생들의 입을 통해서 전해질뿐이다. 영희의 유서 역시 피범벅이 되어 알아볼 수 없다. 그들이 죽든 살아남든 언제나 그것은 빈칸이며 미지의 영역처럼 다뤄진다. 거기에는 죽은자를 향한 애도조차 없다. 장례식에 참석한 이들의 태도는 마치 업무를 수행하듯 절차에 따라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오직 장례식에서의 천도재 장면만이 이 영화의 유일한 애도의 태도이다)
경민모를 찾아가는 영희의 마지막은 결국 자신과 동일한 경험을 겪도록 하는 것이다. 영희는 한솔과 함께 경민모를 찾아 과도하게 긴 시간을 보낸다. 아직도 영희를 향한 원망을 내려놓을 수 없는 경민모 앞에서 영희는 자신이 이제 자살을 하려 한다고 말한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는 영희의 죽음은 그 자체로 경민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미지가 되며, 자살의 이유를 찾아야 할 사람들은 당연하게도 마지막을 함께한 경민모에게로 칼끝을 갖다 댈 것이다. 그렇다면 한솔은 다시 한번 마지막 증언자가 되고 경민모는 영희와 마찬가지로 미지의 구멍에 빠진다. 이 복수의 탁월함은 영희를 의심하던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위태롭고 설명되지 않는 것들에 기반하고 있는지 생각하게 한다.
영희는 다시 한번 미지의 터널로 간다. 그곳은 경민의 마지막 cctv 영상이 담긴 흔적의 장소인 동시에 음성이 완벽히 생략된 미지의 공간이다. 미지의 터널 앞으로 다시 돌아오면서 우리가 영화를 통해 보았던 것은 '합리적 의심'이라는 미명아래 가했던 폭력이다. 죄책감이라는 수렁에서 탈출하기 위해 타인을 그곳에 밀어 넣는 그들의 행동은 방어적이면서도 잔인하다. 그럼에도 영화 속 개인들을 비난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미지의 흔적을 남긴 죽음들 앞에서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하려는 우리는 그들과 멀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런 우리를 비난하기 보단 그런 우리 모두의 나약함을 본다. 우리는 그 터널 안에서 영희를 보고 있다. 슬쩍 우리를 뒤돌아본 영희는 이내 깊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이제 우리는 이제 영희의 죽음을 막을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물론 그것은 영화관 밖에서 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