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튼 사이로 희미한 빛이 드리우는 새벽. 한 소년의 움틀거림. 뒤이어 보이는 것은 달리는 소년의 이미지이다. 아버지와 둘이 사는 소년 찰리의 달리는 이미지는 영화 속에서 반복하여 등장한다. 찰리는 운동처럼 달리고,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고아가 되지 않기 위해 달리고, 경찰의 보호를 피하기 위해 달린다. 달리는 소년의 모습으로 영화의 도입부를 장식한 영화는 이를 반복하며 소년의 행로를 쫓는다. 한 소년이 작은 마을에서 출발하여 경마장을 지나 황량한 벌판을 경유하여 도시에 도착하는 행로 속에서 소년의 달리기는 멈추지 않는다.
찰리의 달리기는 일변 집에서 머물렀을 때 느끼는 불안감의 연장선에 있다. 긴장한 표정과 함께 본인의 집에서 물을 마실 때도 물어보는 찰리의 모습에서 그가 집에서조차 편안함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러니 새로운 안식처를 소개해줄 테니 잠시 기다려보라는 경찰과 의사의 말에 찰리가 기다릴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황야에서 잠시 머문 낯선 집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오며 “계속 가야 해 여긴 우리 집이 아니야”라는 찰리의 말은 그렇기에 어디에나 적용될 수 있다. 어떤 곳도 찰리에게 보금자리가 되어주지 못한다. 혹은 찰리는 그 어느 곳도 자신의 안식처로 여기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찰리의 달리기는 위태로운 정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움직임이다.
반면 영화 속 여성들은 대부분 어딘가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남자들에게 음식을 해준다. 찰리의 아버지가 말한 ‘웨이트리스’라는 표현은 아마도 이 여성들 모두를 아우르는 단어일 것이다. 영화 속 여성들은 남성에게 음식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웨이트리스’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전쟁을 얘기하며 주먹을 휘두르는 남성들은 항상 그녀들에 기생한다. 웨이트리스의 속성을 가진 것은 찰리의 고모 역시 마찬가지이다. 찰리는 고모가 자신을 돌봐줄 것을 기대하며 그곳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모가 돌봐주는 그곳은 찰리의 진정한 도착지가 될 수 있을까.
찰리와 동행한 말, 피트는 어떤 존재일까. 달리기를 즐기는 찰리는 우연히 지나친 경마장에서 말에게 매혹된다. 단단한 육체와 거친 숨소리. 달리기 위해 태어난 것 같은 말의 존재에 찰리는 단번에 이끌린다. 찰리와 피트가 가지는 이상한 연대 의식은 달리기라는 공통된 움직임에서 생겨났다. 그렇기 때문에 피트가 다시는 달릴 수 없어 죽을 위기에 처하자 함께 떠나는 것은, 단순히 인간과 동물의 우정으로 설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위태로운 정착에서 벗어나기 위한 찰리의 이동과 달리지 못한다는 이유로 죽을 위기에 처한 피트의 이동은 결코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어떠한 보호자도 없이 갈 곳을 잃은 찰리는 그 순간 자리에서 떠나고, 때마침 더는 달릴 수 없게 된 피트는 거기에 동행한다. 달린다는 것. 정확히 말하면 지금의 여기에서 다른 어딘가로 이동한다는 것. 그 운동을 지속하기 위한 과정에 찰리와 피트의 동행이 있다.
그 경로에 갑작스러운 피트의 죽음은 이 영화에서 가장 충격적인 순간일 것이다. 저 멀리 도시의 불빛이 가까워지며 자동차의 소음도 빈번해질 때, 이전까지 얌전하던 피트는 갑자기 날뛰며 달리는 자동차와 충돌하고 만다. 그 죽음을, 그 동행의 종결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뒤에 이어지는 시퀀스를 통해서 조금의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찰리는 도시에 도착한다. 그곳은 피트가 살 수 없는 공간이다. 피트를 사겠다는 찰리에게 델은 “무슨 돈으로? 그리고 어디에 두게?” 라고 반문하며 조롱한다. 돈 만큼이나 피트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지낼 수 있는 공간이다. 찰리는 고모의 집을 향하며 피트에게 말한다. “말썽만 안 피우면 고모가 지내게 해줄 거야” 그것은 찰리에게는 해당할지 모르겠지만, 피트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말이다. 자동차가 달리는 도시에 피트를 위한 공간은 없다. 피트는 오직 좁은 마구간이나 쭉 뻗은 경마장에서만 살 수 있다. 죽음을 피하고자 출발한 피트가 잘못된 곳에 도착해 죽음을 맞았다면, 아직 도착하지 못한 채 여정을 계속해야만 하는 찰리의 도착지 역시 안심할 수만은 없다.
피트의 죽음에 이어 도착한 도심에서 찰리는 배식소를 배회하며 길거리를 전전하는 도시의 빈민이 된다. 그런 그에게 손을 내미는 것은 비슷한 처지의 캠핑카에서 사는 남자다. 그러나 그는 술에 취해 찰리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찰리가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갈취한다. 뒤이어 찰리는 돈을 되찾기 위해 스패너를 가져와 캠핑카를 두드리며 남자를 내리친다. 스패너를 휘두르는 찰리의 모습은 어딘지 앞서 그의 집에 침입하여 아버지에게 폭력을 가했던 덩치 큰 남자와 닮았다. 앞서 웨이트리스가 이 영화 속 어른들의 하나의 세계라면 폭력과 전쟁을 말하며 ‘웨이트리스’없이는 밥조차 먹지 못하는 남자는 또 다른 하나의 어른들의 세계이다. 집에 잘 들어오지 않으면서도 자기만 믿으라는 말뿐인 찰리의 아버지와 경마대회를 떠돌아다니며 말을 혹사시키는 델 그리고 황야의 집에서 맥주를 마시며 전쟁을 얘기하는 남자들 역시 그 세계에 속한다. 그들은 웨이트리스로서의 여성에게 기대어 살면서도 어떠한 존중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서로 닮았다. 찰리가 앞서서 폭력의 목격자였다면, 이번에는 폭력의 행위자가 되어 있다. 뒤이어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며 오래도록 자신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찰리의 모습은 그 남자들의 세계에 본인이 도착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담겨 있다.
마침내 찰리는 고모의 집에 도착하고, 고모는 언제든 함께 지내자며 따뜻하게 맞아준다. 이렇게 찰리는 자신을 위한 편안한 안식처에 도착한 것일까. 혹은 이것은 찰리의 안락한 미래를 보장하는 해피엔딩일까. 영화의 엔딩 속 찰리의 달리기는 거기에 의구심을 남긴다. 여전히 찰리는 달린다. 어쩌면 이것은 단순히 럭비를 계속할 찰리의 체력단련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돌연 멈춰서 카메라를 향해 고개를 돌린 그의 표정을 그렇지 않아 보인다. 이 순간 찰리가 떠올린 것은 무엇일까. 그는 죽은 아버지를 떠올리고 있을까. 차에 치여 죽은 피트를 생각할까. 아니면 물도 마시지 못한 채 걸어온 그 경로를 떠올린 것일까. 그것이 무엇인지 확신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확실한 것이 있다면 어딘가를 출발하여 다른 어딘가에 도착한 찰리의 이동 사이에 웨이트리스의 세계와 폭력의 세계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어느 세계에도 속하지 않은 한 소년은 자신의 장소를 잃은 한 육중한 육체의 죽음을 보았다. 달리기 위해 태어난 육체가 제 도착지에 닿지 못하고 끝나버렸다면, 소년 역시 달리는 것만으로 자신의 세계에 도착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