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정신은 어떻게 기억되는가

수원시립미술관 <머무르는 순간, 흐르는 마음>

by 정희주

한계 앞에선 예술가의 삶


수원시립미술관에 귀한 자료 한 점이 전시되었다. 수원시립미술관은 2017년 유족으로부터 이 사진첩을 기증받았고, 2022년부터 진행된 연구 결과를 이번 전시를 통해 선보이고 있다. 이전에 나혜석 화가에 대해 떠올리던 이미지는 불나방에 가까웠다. 죽음을 알면서도 불길로 뛰어들 수밖에 없는, 감당할 수 없는 욕망을 지닌 인물 말이다. 그러나 사진첩 속의 그녀는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예술가로서의 화려함이나 특별함보다는 가족과 지인들과 함께한 평범한 일상과 개인이 겪어야 할 삶의 고뇌가 응축되어 있었다.


전시 전경


전시장에는 원본 앨범과 함께 이를 복제한 영인본을 앨범의 순서대로 펼쳐 배치했다. 일반적인 가정의 사진첩이 가족의 어린 시절부터 시간 순서대로 배열되는 것과 달리, 나혜석의 사진첩에는 남편의 일본 유학 시절부터 나혜석이 해인사에 머물던 1930년대의 기록까지가 뒤섞여 있다. 이러한 배열에는 나혜석 개인의 의미와 의도가 담겨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나혜석의 사진첩 일부


사진첩의 왼쪽 페이지에는 나혜석과 남편 김우영 부부가 함께 찍은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김우영은 일본 외무성의 고위 공무원이었으며, 이 사진은 그가 만주 부영사로 발령받아 떠나기 전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오른쪽에는 장녀 김나열 장남 김선, 그리고 남편 김우영의 독사진이 붙어 있다. 비어있는 자리는 본인의 사진이 붙어 있는 자리였는데 사진은 떨어져 나가고 이름만 붙어 있는 상태이다.


사진 아래에는 붉은색 글씨로 인물 이름이나 메모가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나혜석이 직접 앨범을 만들면서 쓴 글씨이다. 사진첩에는 사진 아래마다 나혜석이 직접 제목을 달아두기도 하고, 사진 뒷면에는 당시의 생각이나 짧은 메모를 남기기도 했다. 필체가 조금 흔들리고, 무너져있는 것으로 보아 이 앨범은 그녀가 수전증을 앓던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진을 복원 과정 중에 사진첩에서 촛농 자국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 촛농의 흔적은 어두운 방 안에서 홀로 작은 촛불 하나에 의지하여 떨리는 손으로 이 사진들을 작업했던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그래서 이 사진첩은 역사적 기록물을 넘어서 한 인간의 생애가 응축된 결과물로도 보이기도 하다.


(좌) 세계일주 여행길에 단발로 머리를 자른 나혜석 (우) 나혜석 <자화상(여인 초상), 1928년 추정


나혜석은 생전에 많은 풍문을 몰고 다녔다. 첫사랑과의 이별 후 오빠의 소개로 김우영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된다. 그녀는 남편에게 세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결핵으로 세상을 떠난 첫사랑의 무덤에 함께 찾아갈 것, 전처의 자식과 함께 살지 않을 것, 그리고 자신의 일을 방해하지 말 것. 김우영은 이 조건을 받아들였고 두 사람은 결혼했다. 나혜석은 남편에 대해 “취미는 없지만 남의 취미를 방해할 사람은 아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들의 이야기는 당시 사회에 큰 화제가 되었고, 신식 결혼식은 신문에 실릴 정도였다. 결혼 후 나혜석은 남편과 함께 유럽을 여행하며 현대미술의 흐름을 직접 체험했고, 서구 여성들의 삶에서 깊은 영감을 받게 된다.


나혜석의 <자화상>을 보면 사진 속의 둥글고 복스러운 인상과는 달리 서구적이고 강인한 분위기를 풍긴다. 처음에는 언뜻 수심에 찬 듯 보이지만 그림을 계속 볼수록 인물의 강한 자존감과 내면의 힘이 느껴진다. 이는 단순히 외형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인물의 성품과 내면까지 드러내려는 접근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나혜석은 왜 자신을 서구의 여성으로 표현했을까? 이 작품은 그녀가 프랑스 파리를 여행하던 시기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나혜석은 1927년부터 1년 9개월 동안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했으며, 이는 조선 여성으로서는 최초의 세계 일주였다. 여행 중 서구 여성들의 삶을 접하며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되었고, 특히 영국 여성들의 참정권 운동을 보며 자신이 여성운동의 선각자가 될 수도 있겠다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오늘의 시점에서 보면, 나혜석은 ‘0세대 여성운동가’로 불릴 만한 인물이다.


나혜석은 파리에 유학 온 한국 예술가들의 모임에서 최린을 만나 예술과 삶에 대해 깊은 공감대를 나누게 된다. 이후 두 사람의 관계를 둘러싼 불륜설이 한인 사회에 퍼지며 결국 이혼에 이르게 된다. 나혜석은 결혼과 이혼 과정에서의 심경을 정리한 글 <이혼 고백서>를 잡지에 발표한다. 이는 여성에게만 강요되던 정조 관념을 비판한 내용이었다.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글이었고, 사회적 논란은 물론 여성들로부터도 비판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나혜석은 작품 활동을 멈추지 않았지만, 화재로 작품을 잃고 건강 악화와 생활고까지 겹치며 점차 어려운 시기를 맞이한다.


나혜석 <염노장>, 1930년대


나혜석은 말년에는 수덕사와 해인사 같은 사찰에 머물며 그림을 그렸다. 늙은 비구니라는 뜻의 <염로장>은 수덕사에서 그린 그림이다. 괴나리봇짐을 메고 지팡이를 짚은 노파의 얼굴에서는 나혜석의 말년 모습이 겹쳐 보이기도 한다. 나혜석은 이혼 이후에도 전업 화가로서 작업을 이어갔으나, 작품 대부분이 화재로 소실되는 비극을 겪었고 수전증으로 고생하게 된다. 결국 말년에는 서울의 한 요양병원에서 52세의 나이로, 무연고자 신분으로 생을 마감한다. 나혜석은 생전에 약 300여 점의 작품을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은 20여 점에 불과하다.


백남순 <한 알의 밀알> 1983년


나혜석은 파리에 머무는 동안 여러 예술가들과 교류했는데, 그중 백남순은 나혜석에 이어 조선의 두 번째 여성 서양화가로 평가받는다. 두 사람은 도쿄여자미술학교 동문으로, 1920년대 파리에서 다시 만나 예술적 교류를 나누었다. 백남순은 파리에서 임용련을 만나 결혼했고, 이후 부부 화가로 활동했다. 그러나 백남순의 삶은 6·25 전쟁을 기점으로 크게 변화한다. 정부 수립 이후 임용련은 서울세관 관장을 지냈는데, 그 이력으로 인해 한국전쟁 중 인민군에 끌려가 생사불명이 된다. 이후 백남순은 자녀들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고, 이민 이후에는 주변에서 화가라는 사실을 모를 정도로 거의 붓을 들지 않고 생활했다고 전해진다.


<한 알의 밀알>은 성경의 한 구절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되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구절을 시각적으로 풀어낸 것이다. 화려한 색채로 채워진 화면에서는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한 생명력과 생명의 신비가 느껴진다. 작품을 그리던 당시, 한 잡지 기자가 백남순을 찾아가 인터뷰를 했는데 다음과 같은 말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나혜석이나 내가 결혼을 하지 않고 그림 공부에만 전념했더라면, 피차 기구한 운명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좋은 작품을 남겼을 터인데….”


나혜석과 백남순은 끝까지 예술적 여정을 이어가지 못했다. 나혜석은 사회적 한계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 쓰러졌고, 백남순은 사회적 한계 앞에서 고통받다가 붓을 내려놓았다. 유언처럼 남겨진 백남순의 그림은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한국 1세대 서양 여성 화가들이 남긴 ‘열매’는 과연 무엇일까?



예술가의 정신은 어떻게 기억되는가?


(좌) 박래현 <작품 H>, 1966년 / (우) 천견자 <여인상>, 1985년


이번 전시는 나혜석과 교류했던 예술가들의 작품과 함께 여행을 계기로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확장해 간 현대 여성 예술가들의 작품을 함께 전시가 되었다. 박래현은 운보 김기창의 아내로 알려져 있지만, 동시에 동양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려 끊임없이 고민한 예술가였다. 가사와 육아를 병행하며 주로 밤에 작업했던 그녀는 예민하고 깨어 있는 감각을 지니기 위해 노력했다. 1960년대 이후 해외 전시와 비엔날레 참여를 통해 활동 무대를 넓힌 박래현은 미국 원주민과 중남미, 아시아 비서구 지역의 고대 문명과 문양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작품에 등장하는 원시적 문양은 이러한 경험에서 비롯되었으며, 외국 문화를 그대로 차용하지도, 한국적 전통에만 머물지도 않은 채 자신만의 조형 언어로 재구성되었다. 그녀의 작품은 점차 추상화되며 독자적인 화풍을 만들어 냈다.


맞은편에 전시되어 있는 천경자에게 여행은 삶과 예술을 잇는 중요한 통로였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유일한 여성 종군화가였던 그녀는 세계 여러 지역을 여행하며 기행문과 삽화를 발표했고, ‘기행 스케치’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1960년대부터 이어진 천경자의 ‘여인상’은 이국적인 여성상을 정밀한 채색으로 표현한 작품들로, 슬픔과 신비가 공존하는 정서를 보여준다. 고독한 눈빛을 하고 있는 여인의 머리 위로 보라색 꽃과 노란색 나비가 날아들었다. 식민지와 전쟁, 가족의 죽음, 이혼과 사회적 편견을 겪은 그녀의 삶은 작품 속에 ‘한’으로 스며들었지만, 이는 절망이 아니라 창작의 원동력이 되어 예술로 승화되었다.


두 화가 모두 전쟁, 결혼 등의 사회적 한계 앞에서 고민하고 절망했다. 박래현은 현모양처 예술가라고 불릴 정도로 사회적인 역할에도 충실하며 예술가의 여정을 걸었다. 외국의 이국적인 풍경 속에서 한국적 정서를 찾으며 약소국가의 서러움을 함께 느끼려고 했다. 그녀는 자신의 삶처럼 다른 세상도 기꺼이 포용하려 했다. 천경자는 예술적 영감을 위해 한계를 두지 않았다. 예술을 위해서라면 안락한 삶도 포기할 수 있었다. 그녀에게 한은 삶의 에너지이자 예술적 영감이었다. 두 화가 모두 자신이 사회적, 개인적 한계가 있었지만 자신의 조건속에서도 창작을 멈추지 않았다.


나혜석이 50대 초반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의 예술은 끝나지 않았다. 그녀가 자처한 희생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자기 생을 힘껏 살아 냈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부당한 것에 맞서고 저항하고 부딪혔다. 그녀가 부딪치고 쓰러진 자리에는 흔적이 남았다. 그녀가 남긴 몸짓은 진동으로 남아 박래현의 작품에서 처럼 켜켜이 쌓인 시간 속에서 메아리치고, 천경자의 그림처럼 꽃이 피고 나비가 되어 팔랑거린다. 예술가의 정신은 작품으로만 남지 않는다. 삶으로 남는다. 힘껏 살아낸 삶의 에너지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 기억은 같은 삶을 열망하는 이들에게 다시 기억되고 새롭게 펼쳐진다.


나혜석과 그녀의 자녀들


이번 전시에는 박수근, 이중섭, 장욱진, 이응노 등 한국 근현대 주요 작가들의 작품 55점이 전시되어 있다. 전쟁통에서 수많은 작품들이 사라졌지만 어떻게 이 작품들은 살아남아 우리 앞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한 예술가를 기억하려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가족, 동료, 학예사 그리고 미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억이 그 작품을 지속시킨다.


삶도 그렇다. 내가 욕망을 따라 정직하게 삶을 힘껏 살아낼 때, 비록 내가 바라는 결과를 직접 얻지는 못하더라도 나머지는 뒤따르는 이들의 몫이 된다. 내가 모든 것을 이룰 수 없다. 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내 아이들이 그런 삶을 살고, 내 모습을 본 후배들이 나의 흔적에 영향을 받게 된다. 돌아가신 부모님의 유지를 따르는 것처럼, 누군가의 그림이나 글을 보고 힘을 얻는 것처럼, 강렬하게 삶을 사랑하다가 사라진 사람의 정신은 잊히지 않는다. 제대로 된 길이라면 그것은 길잡이가 되고, 잘못 든 길이라면 경보를 울릴 수 있다.


예술을 사랑한 예술가처럼 삶을 사랑한다면 언제 어떻게 쓰러지더라도 삶의 진보는 끝나지 않는다. 내가 쓰러진 곳에서 나를 사랑하는 이들이 나의 기억을 이어 나갈 테니 말이다. 삶의 유한함 앞에 슬퍼하지 말고, 삶의 문제를 모두 해결하겠다는 자만 떨지도 말고, 주어진 삶 속에서 오늘의 내 할 일을 하며 살아가야겠다.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오늘 해야 할 일을 알고, 그 일을 해나가는 것이다.






Exhibition Details

머무르는 순간, 흐르는 마음

2025.09.26.~ 2026.01.11.

수원시립미술관(경기 수원시 팔달구 정조로 833)

http://suma.suwon.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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