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노 세갈 개인전> 리움미술관
수상한 상황
티노 세갈(1976년 런던 출생) 개인전에는 전시 제목이 없다. 전시장에는 작가의 이름만 있을 뿐이다. 이전 작품에 대한 레퍼런스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의 작품은 물질이 없는 퍼포먼스이며 공식적인 사진 기록도 남기지 않는다. 심지어 계약서도 쓰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작품은 물질로 소유될 수 없고 오직 경험 속에서만 기억된다.
이 전시는 결국 경험을 얻는 전시다. 그래서 나중에 볼 사진을 찍을 수도 없다. 오늘, 지금, 이곳에서 일어나는 순간에만 집중해야 한다. 작품의 의미 역시 그 순간 안에서만 존재한다. 이 전시는 어떤 경험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미술관 입구에서 회색 정장을 입은 가이드들이 보였다. 가이드 복장이 바뀌었나 보다 생각하며 입구로 들어가려는 순간 세 명의 가이드가 춤을 추며 소리쳤다.
“Oh! This is so contemporary!”
순간적으로 무언가 반응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눈을 맞추려 했지만 그들은 나와 상호작용하지 않았다. 미술 작품으로 치면 그들은 그저 움직이는 조각 같았다. 아직 내 눈에는 그들만의 퍼포먼스일 뿐이었고, 잠깐의 구경거리처럼 보였다.
초록색 커튼을 열고 첫 번째 전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 왼편에는 로댕의 <칼레의 시민>이 구석자리에 놓여 있었다. 이전 전시의 작품을 아직 치우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제멋대로 놓여 있었다. 칼레의 시민 사이로 제프쿤스의 <작은 꽃병>도 보였다. 제프쿤스의 작품은 지난번 전시에는 없던 물건인데 연출된 것일까? 리움이 이렇게 전시물 치우지 않고 둘리가 없지 않나? 수상한 전시장이었다.
구성된 상황
티노 세갈의 작품은 ‘구성된 상황(constructed situations)’이라 불린다. 작가가 미리 설정한 대본과 규칙에 따라 ‘해석자(interpreter)’들이 움직이며 작품을 만들어 간다. 그들은 춤을 추거나, 몸짓을 하거나, 노래를 부르고, 짧은 대사를 주고받으며 공간 속에서 다양한 소리와 행위를 한다. 전시장 안쪽, 원래 작품이 놓였을 자리에는 의자들이 둥글게 배치되어 있었고, 해석자들은 그 원 안에서 천천히 움직이며 서로의 동작과 소리에 반응하고 있었다.
관객은 그 주변에 서 있거나 앉아 그 장면을 바라보게 되는데, 그 순간 전시장은 더 이상 물건을 전시하는 장소라기보다 사람들의 움직임과 관계가 펼쳐지는 하나의 상황처럼 보였다. 해석자들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름과 사는 곳을 묻는 짧은 대화였다. 이런 식의 과정은 관객이 작품의 일부가 되는 경험이라고 설명되지만, 나는 여전히 객석에 앉아 있는 관객의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한 기분이었다. 나는 여전히 작품과 멀찍이 떨어져 있는 의심하는 관찰자였다.
어쩌면 이 퍼포먼스가 공연장이거나 야외무대에서 진행되었다면 나는 더 자유롭게 즐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술관이라는 엄숙한 공간은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다른 관람객들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도 탄성을 내거나 박수를 치지 않았다. 모두가 오케스트라 공연장에 처음 온 사람처럼 지나치게 조용했다. 나는 그들과 멀찍이 떨어진 객석의 관객이었다.
혼란스러운 상황
다음 공간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키스 퍼포먼스가 진행되고 있었다. 커플로 추정되는 해석자 두 명이 서로를 포옹하고 키스를 하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로댕, 브랑쿠시, 클림트 등 미술사의 주요 키스 장면을 이들이 재해석하여 몸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커플 주변에는 로댕의 조각들로 둘러싸여 있고, 관람객은 조각이 놓인 것과 같은 높이의 의자에 앉아 해석자들의 움직임을 지켜보게 된다. 커플의 생생한 움직임 보면서 이상하게도 내가 조각처럼 돌덩어리가 된 기분이었다. 마치 나는 움직임이 없는 존재, 생명이 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퍼포먼스를 하고 있는 저들만이 살아있고 나와 로댕의 조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말이다. 저들의 생생함 앞에 로댕의 작품은 힘을 잃어버렸으며, 지켜보기만 하는 내 모습은 초라해졌다. 남의 사랑이나 보고 있는 구경꾼이 된 기분이었다. 나는 관람객이고 구경꾼인 것이 맞지만, 이 상황에서 관찰자 역할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씁쓸해졌다. 이 작품은 미술관이라는 공간 속에서 나를 소외시켜 버렸다. 내가 작품의 일부가 된다는 어떤 해설과는 달리 오히려 깊은 소외감을 느꼈다.
전복된 상황
계단을 타고 위층으로 이동했다. 대형 작품이 걸려 있던 그 공간에는 작품 대신에 한 해석자 한 명이 바닥에 누워 아주 느리게 조금씩 움직였다. 해석자 가까이에는 로댕의 <아리아드네 습작>이 있었는데 해석자의 동작이 작품의 포즈와 닮아 있었다. 로댕의 작품이 수만 가지 형태의 연속된 동작으로 재연하는 듯했다.
해석자의 주변에는 조각상으로 가득했다. 작품 간의 거리가 없이 가까이 붙어 있었고, 안전을 위한 가이드라인도 없었다. 좌대위에 올려놔야 할 토르소는 바닥에 내려놓은 채로 있었고, 어느 작품에도 캡션이 달려있지 않았다. 자코메티, 엘름그린 & 드라그셋, 안토니오 곰리 등 대가들의 작품들도 입구에서 보았던 제프쿤스의 꽃바구니처럼 어떠한 장치도 없이 놓여 있었다. 보통 미술관에서는 작품이 돋보일 위치를 마련하고, 작품을 좌대 위에 올려 전시한다. 미술관의 흰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은 작품을 현실에서 분리시키고 특별한 대상으로 보이게 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 전시에서 조각들은 더 이상 우러러보아야 할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나와 같은 위치에 존재하는 우리 중 하나가 되었다.
뒤샹이 변기를 미술관이라는 맥락 속아 놓은 것과는 반대의 발상이었다. 뒤샹은 공장에서 만들어진 변기를 미술관에 가져와서 예술작품으로 만들었다. 미술관이라는 배치 속에서 일상의 변기를 예술로 만든 것이다. 티노 세갈은 이와 반대로 미술관에 가야만 만날 수 있는 귀한 소장품을 일상의 소품처럼 느끼게 했다.
이제는 나와 비슷한 처지가 된 조각들은, 일제히 로댕의 조각 옆에 있는 해석자를 향해 서 있었다. 나는 조각 사이에 앉아 조각들이 보고 있는 것을 함께 지켜보았다. 마치 친구들과 함께 공원에 소풍 나온 무리의 일부가 되어. 그 순간 나는 관객이 아니라 이 장면 속 하나의 존재처럼 느껴졌다. 나와 예술 작품의 관계는 더 이상 응시하거나 응시당하는 관계가 아니었다. '우리'는 지금 여기서 하나가 된 기분이었다. '우리'는 이 순간 미술관이라는 거대한 좌대에 올려진 예술작품이거나, 혹은 바닥에 놓인 아무개가 되었다. 미술관 입구에서 들었던 요란법석했던 외침이 다시 떠올랐다. “Oh! This is so contemporary.”
지금-여기, 예술이 되는 순간
근대적인 미술관에서의 작품은 감상의 대상이 되고, 관람객은 작품 앞에서 멈추고 조용히 바라보는 존재로 설정된다. 현대적인 미술관은 더이상 작품을 보관하고, 소장품을 전시하는 장소가 아니다. 미술관은 어떤 방식으로 작품을 보게 만들 것인가를 설계하는 공간이다.
일반적으로 미술관의 흰 벽은 작품을 현실에서 분리시키는 역할을 하며, 작품에 강한 권위를 부여한다. 그렇게 미술관에 놓인 작품은 특별한 것으로 여겨지고,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려 애쓰며 때로는 그것을 신성한 것처럼 대하기도 한다. 미술관에서의 이러한 장치는 예술을 일상과 분리시켜 낯설게 보이게 했지만, 동시에 일상과 멀어지게 만들기도 했다. 예술을 통해 일상을 새롭게 바라보려 했던 시도가, 역설적으로 예술을 일상에서 분리된 세계로 만들기도 한 것이다.
티노 세갈의 작품은 좌대에 올려놓을 대상도, 상징적인 무대도 없다. 설정된 상황 속에서 작품이 만들어지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관계가 생겨난다. 더 이상 예술은 내가 바라보는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이 순간 함께 하는 존재가 된다. 지금-여기가 예술이 되는 순간이기에 그야말로 "동시대 예술(contemporary art)"인 것이다.
티노 세갈 개인전
2026.03.03.~ 2026.06.28.
리움 미술관(서울 용산구 한남동)
https://www.leeumhoam.org/lee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