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시립미술관 <블랑 블랑 파노라마>
불어로 흰색인 블랑(Blanc)과 영어로 검은색인 블랙(Black)은 ‘빛나다(to shine)’ 또는 ‘타다(to burn)’의 뜻을 지닌 인도유럽조어인 *bʰleg-에서 파생되었다는 설이 있다. 반대라고 생각했던 검정과 흰색이 같은 뿌리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이다. 촛불이 타는 타는 장면을 생각해 보자. 초는 하얗게 빛을 내며 불타지만 동시에 검은 그을음을 만들어 낸다. 흰 빛과 어두운 그을음은 불이 타는 하나의 과정인 것이다. <블랑 블랑 파노라마> 전은 흰색과 검정이 하나의 연속체라는 점에 착안하여 기획된 전시이다.
우리는 세상의 것들을 분절하여 보는 것에 익숙해 있다. 흑과 백, 너와 나, 삶과 죽음 등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가르고 필요한 부분만을 잘라보곤 한다. 흑과 백은 어떤 관계 속에 있을까? 흑과 백 사이에 생략된 것은 무엇일까?
나와 세계
석철주의 <자연의 기억>에서는 먹과 아크릴 물감을 칠한 후 대나무를 날카롭게 깎은 죽필을 긁어내며 그림을 그린다. 검게 칠해진 화면에서 형상을 찾아가는 방식이다. 언뜻 그림 속에는 들판 위의 풀을 묘사한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마치 추상화처럼 세로 선들이 날카롭게 뾰족하게 그어져 있다.
전통적인 동양의 자연관에서는 자연을 나와 분리된 대상으로 보지 않고 내가 자연의 일부인, 내가 곧 자연이라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사고가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석철주 작가의 작업방식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자연에서 받은 인상을 신체 안으로 응축한 후 그 힘으로 그림을 그리게 된다. 그래서 그림 속에 있는 풀 등은 저마다의 생명력을 지닌다. 추운 겨울을 버티고 살아남은 봄에 피어나는 새싹의 기운이 들어 있다.
그림을 조금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있으면 가까이 보았을 때와는 다르게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들에 난 길이 보이기도 하고 바람에 움직이는 풀잎과 햇살에 반짝이는 새하얀 잎사귀도 눈에 들어온다. 흑과 백으로만 구성된 화면을 계속 바라다보면 깊은 생각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흑과 백은 지금이 아닌 시간 속으로 이끌게 하는 힘이 있다. 영화 속 회상 장면을 흑백으로 처리하는 것처럼, 그림을 보고 있으면 수많은 기억과 감정이 무수히 떠오른다. 마치 죽필로 새겨진 풀처럼, 선명하게 잡히지 않는 기억과 감정들이 삐죽삐죽 긁히고 솟아오르고 바람에 흔들리고 햇살에 반짝거린다. 자연 기억이 나의 기억을 흔들고, 나의 기억은 다시 자연의 기억에 관심을 갖게 한다.
비어있음과 가득함
그림 속에 빛이 가득 쏟아지고 있다. 플라스틱 유리에 구멍을 작게는 0.35mm, 크게는 0.3m의 구명을 수만 개를 뚫고 그 구멍사이로 LED빛이 쏘아 만든 것이다. 이 작품은 보는 이들에 따라서 바다, 갯벌, 또는 항공사진으로 내려다본 장면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작품의 제목은 <빔_바다>이다. '빔'은 우리 말로는 비어있음 (Empty)를 의미하며 영어로는 빛을 쏘다의 '빔'(Beam)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비어있는 곳에 빛을 쏘는 방식으로 제작된 작품의 제작 방식을 설명해 주는 말이기도 하다. 빛은 비어있는 구멍을 통해 빛을 발한다. 비어있는 구멍과 빛은 다르지 않다. 비어있는 구멍에이 있기에 빛이 나오게 된다. 빈 공간과 빛은 서로가 있기에 모습을 드러낸다.
작품을 한곳에서 보지 않고 몇 발자국씩 움직이게 되면 더 재미있는 장면을 보게 된다. 내가 서 있는 위치에 따라 작품은 다르게 보인다. 빛이 비치는 찰나의 순간마다 그 작품은 매번 새롭게 변한다. 빛은 매번 다른 시간을 채운다.
상처와 치유
이순종 작가의 <향유 2>를 멀리서 바라보면 기름 방울이 부드럽게 떨어지는 형상을 하고 있으나 이 작품은 한의원에서 쓰는 침을 사용하여 만들었다. 흰색의 실크 위에 찔러진 침은 기울기에 따라 그림자가 생기면서 양감이 만들어진다. 실크의 연약함과 침의 날카로움이 위태로워 보이면서도 우아하다. 침은 막힌 혈을 뚫어 기운을 순환하게 한다. 의도적으로 상처를 내고, 상처 낸 곳이 회복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흔히 상처와 치유는 반대 개념이라고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상처는 치유의 과정이라는 점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둥글고 단아한 도자기가 아닌 깨진 도자기들이 이어 붙어 있다. 도자기 장인들 사이에서는 아주 작은 흠 하나만 있어도 그 도자기를 그 자리에서 깨어버린다고들 한다. 작가는 버려진 도자기 파편들을 모아 작업을 한다. 상처 난 부분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금을 칠해서 더 눈에 띄는 것으로 만든 것이다. 각각의 조각들은 단단히 결합되어서 하나의 새로운 형태를 이루고 있다.
작가가 말하는 ‘번역’이란,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파편들이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전혀 다른 무언가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의미한다. 버려지고 상처받았던 존재가 다시 새로운 형태로 창조된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외상 후 성장'이라는 이론이 있다. 심리적 트라우마를 겪게 된 후에 치유는 상처가 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전과 다른 무엇으로 성장한다는 이론이다. 우리 삶 속의 기억과 상처, 의미 없다고 느꼈던 시간이 모여질 때 그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 만들어진다. 한 여성의 상처 입은 기억이 여성운동으로 번져나간 것처럼, 어린 시절의 죽음의 공포가 많은 이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예술작품이 된 것처럼, 불행했던 과거의 경험을 통해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글을 쓸 수 있는 것처럼.
상처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으로 창조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상태이다. 상처 입은 곳이 이전의 기능을 할 수 없게 될지라도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것이 될 수 있다. 상처와 상실은 숨기기보다 드러낼 때 새로운 생명력을 가지게 된다.
빛과 어둠
김수철 작가의 <신비로운 직관>은 검은색으로 가득하다. 검은색이 이토록 다채로운 빛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검은색은 모든 빛을 흡수하는 색이기도 하고 동양에서는 삼라만상을 품은 색의 의미를 지닌다. 작가는 이러한 흑색의 의미를 흑연이라는 재료로 탐구해 왔다.
작품 속에는 아래서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나듯 상승하고 위에는 검정의 원형들이 부유하듯 떠다닌다. 검정이지만 무겁거나 탁하지 않으면서도 깊고 묵직한 느낌이 난다. 검정이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빛 때문이다. 아름답게 빛나는 고상한 광택은 작가의 땀으로 만들어진 빛이다. 이 작품에서는 흑연을 주 재료로 사용했지만 흑연은 어둠과 함께 빛을 표현한다. 선의 형태에 따라, 캔버스의 굴곡에 따라, 바탕에 칠해진 안료의 질감에 따라 검정은 다양한 빛을 발한다. 검은색은 빛이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빛을 머금고 포용하는 색이다.
이 작품은 수많은 시행착오와 반복을 통해 만들어졌다. 먼저 패널 위에 아크릴 물감과 고운 돌가루를 섞어 여러 겹 바르고, 그 위에 다시 흑연 가루와 그을음을 덧발라 바탕을 만든다. 그다음 일부는 세모나 둥근 조각도로 파내 들어 올리고, 다른 부분은 흑연을 묻힌 면천을 손가락에 감아 하나하나 문질러 광을 낸다. 이렇게 해서 둥근 원들이 겹친 이미지를 완성하게 된다. 표면을 연마하며 생긴 은은한 광택은 빛을 흡수하면서도 동시에 반사해서 보는 각도에 따라 화면이 미묘하게 달라 보이는 깊이가 생겨난다.
작품의 영문 제목은 <gnosis(그노시스)>이다. '그노시스'는 그리스어로 ‘지식’ 또는 ‘탐구’를 뜻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머리로 아는 정보가 아니라 직접 겪고 수행하며 얻는 내적인 깨달음을 의미한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에 형태를 만들거나 의미를 만들고자 하는 유혹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작품 속에서 미술사적 지식과 관련된 의미를 찾거나, 형태와 연결시키지 않고 검정이 만들 수 있는 다채로움을 탐구하기 위해 작업을 이어간다. 작가가 반복하는 수많은 몸의 움직임은 깨달음이 한순간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인내와 반복 속에서 서서히 다가온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전시는 서로 다르다고 생각했던 검정과 흰색뿐 아니라 추상과 구상, 상처와 치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이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파노라마처럼 연속한 하나의 장면을 이루고 있음을 시각적 이미지로 보여준다. 삶 또한 상처와 치유, 탄생과 죽음, 빛과 어둠이 이어진 하나의 파노라마이다. 뿐만 아니라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들, 차이가 나는 생각, 차이나는 사람들 조차 크게 보면 세상이라는 큰 파노라마의 일부이기도 하다. 나와 다른 것조차 나의 일부라는 생각은 좀 더 너그럽고 열린 마음을 갖게 한다.
하지만 그것은 지식적인 앎일 뿐, 혹은 순간적인 깨달음일 뿐, 그 깨달음은 오래 유지되지 않는다. 내가 몸으로 살아내고, 직접 부딪혀 경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순간의 경험에 그치게 된다. 나의 몸을 통해 경험한 것만이 내가 된다. 검정이 빛을 내는 일만큼 어렵고 고단한 일이다. 그러기에 아름답다.
블랑 블랙 파노라마
2026. 02. 12 ~ 2027. 03. 01
수원시립미술관 (수원시 팔달구 정조로 8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