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허스트 <진실은 없어 그러나 모든 것은 가능하지>
내가 알지 못하는 '죽음'
데미안 허스트(1965-)에게는 실제 죽음을 다룬 작가, 상업적 예술가, 악동 등의 별칭을 가지고 있는 작가이다. 이미 그의 작품은 1990년대에 화제를 몰고 왔으며 현대미술사에서도 많은 평가가 이루어졌다. 그러기에 다소 식상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더욱이 죽음과 예술은 함께 다룰 수 있겠지만, 예술과 상업 까지도 함께 묶어 생각할 수 있겠지지만, 죽음과 상업은 거부감이 들었다. 아마도 내가 죽음은 엄숙하고 진지한 것이기에 가볍게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와 다르게 죽음을 바라보는 사람의 세계는 어떤 것 일지 궁금해졌다.
데미안 허스트가 실제 소 머리도 자르거나 동물을 박제시키고, 심지어 사람 뼈까지 예술의 매체로 등장시켰던 이유는 무언인가? 죽음이라는 강한 충격으로 화제를 몰고자 했던 것인가? 그런 충격을 통해서라도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일까?
똑바로 봐. 이것이 죽음이야.
데미안 허스트는 10대 시절부터 죽음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시신안치소에 보관된 잘린 시신의 머리
미생물학을 전공하고 있는 친구를 따라 시체 안치소에 따라가게 되고 친구를 졸라 시신의 머리와 사진을 촬영한다. 마치 기념사진처럼. 그는 사진 속에는 웃고 있는 표정이지만 속으로는 공포에 질려있었다고 한다. 이 사진은 첫 번째 전시의 출품한다. 데미안 허스트에게 죽음은 일찍부터 그의 작품에 주요한 주제였다.
데미안 허스트가 대학에 다니며 자신의 작품세계에 대해 고민할 무렵 옆 건물에 살던 노인이 갑자기 요양원에 가게 된다. 그는 노인이 살던 빈 집에 들어가 그 집을 구경했다고 한다. 노인은 저장각박증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집안에는 천장 가득 물건이 가득 차 있었다. 허스트는 노인이 남긴 물건으로 콜라주를 만든다. 죽어가는 노인이 남기고 간 쓰레기와 부서진 물건들로 젊은 데미안 허스트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갔다.
죽음은 인간에게 누구나 찾아온다는 보편적인 주제이며, 과거 미술사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소재이기도 했다. 데미안 허스트가 젊은 시절 활동하던 당시 1980년대 후반의 영국은 대처 내각의 과감한 개혁과 긴축 재정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불안한 정서가 만연했으며 미술계에서도 젊은 작가들이 정부 지원을 받지 못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영국의 혼란스러운 정국과 죽음이라는 주제는 영국 미술계에 시의적절하게 받아들여졌고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가 죽음을 표현하는 방식은 충격이었다. 작품에는 죽음 그 자체가 사용되었다. <천 년>에는 두 구역으로 나눠진 큰 유리관 한편에는 피를 흘리고 있는 죽은 소의 머리를 놓고 반대편 방에는 구더기가 파리로 부화하고 있다. 두 구역 사이에는 작은 구멍이 있어서 파리들이 먹을거리를 찾아 소 머리가 있는 구역으로 날아든다. 하지만 소 머리 위에는 작은 구멍을 통해 나오는 피냄새를 맡으며 먹이를 찾아 소머리를 찾아 이동하지만 소 머리 위에 푸른색 빛을 내는 전기 살충기가 설치되어 있다. 파리들은 양분을 얻기 위해 소 머리에 다가갔지만 환하게 빛나는 빛을 향해 날아가는 순간 허망하게 죽고 만다. 삶과 죽음의 순환이 1평 정도 되는 좁은 공간에 적나라하게 압축되어 있다
그러나 결코 알 수 없어
상어를 포름알데히드에 넣어 박제시킨 작품도 있다. 커다란 상어가 입을 크게 벌리며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다. 하지만 죽어있는 상어이기에 이것을 보는 내게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다. 상어는 그저 구경거리일 뿐이다. 이 작품의 제목은 <살아있는 자의 마음속에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이다. 살아있는 자의 마음속에는 죽음이 물리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다. 내가 상어를 직접 마주하기 전에는, 내가 죽을 위기에 처하기 전에는 나는 죽음을 알 수 없다. 살아있는 자의 마음속에는 죽음은 실재할 수 없다.
데미안 허스트는 실제적인 죽음을 터부시 하거나 자신의 일이 아닌 것처럼 무심한 사람들에게 "내가 죽음을 보여줄게. 이것이 죽음이야."라는 것을 매우 직설적으로 고약한 방식으로 환기시킨다. 그리고 그러한 의도에서 한발 더 나아가 삶과 함께 존재하는 죽음이더라도, 죽음 그 자체를 살아있는 상태에서는 알 수 없음을 말한다.
불가능하다면 멈추어야 할까?
<천년>과 <살아있는 자의 마음속에 죽음의 불가능성>이 있는 전시실에는 또 하나의 재미있는 작품 전시되어 있다. <학습된 탈출 불가능성>이다. 앞서 본 다른 작품처럼 이 작품도 큰 유리관이 존재한다. 그 안에는 큰 사무용 책상, 의자, 담배, 라이터, 재떨이 등이 놓여 있다. 사람은 업지만 사람의 척추 모양처럼 보이는 의자가 책상 가까이에 붙어 있고 아마 이곳에 사람이 앉아있다면 쉽게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좁은 공간이다. 마치 죽어서 들어가는 관의 크기가 몸을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크기인 것처럼, 마치 이 유리관속에 사람이 있다면 움직일 필요가 없다는 것처럼, 그렇게 좁고 답답하다.
하지만 유리관 사이에는 하나의 더 공간이 있다. 책상 너머에 좁은 확장된 공간이 있지만 유리 벽으로 가려져서 넘어갈 수는 없다. 의자에 앉아 있으면 내가 있는 세계가 거울처럼 반사되어 보인다. 이때 어렴풋이 유리벽 너머의 무언가 다른 것이 있다고 상상하거나 희망할 수는 있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앉아 있는 이곳을 나갈 수는 없다. 현실의 한계를 넘어가고 싶지만, 결국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 불안과 공포, 그리고 절망을 느끼게 한다. '불가능'하다는 것은 절망일까? '
불가능하기에 가능하다.
나는 부모님을 포함한 지인들의 죽음의 사건을 가까이서 겪었다. 함께 이 전시를 동행했던 친구 역시 어린 시절 학교 대신 병원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정도로 생사를 오가는 힘든 시간을 보냈다. 친구는 '나'의 죽음으로, 나는 사랑하는 '너의 죽음으로' 죽음에 가까이 다가간 경험이 있다. 그래서였는지 화려하고 반짝이는 설치물들 사이를 걸으면서도 우리는 심각하다 못해 배가 아파왔고, 약병으로 만들어진 설치물 앞에서는 있지도 않은 소독약 냄새마저 느껴지는 듯했다. 친구와 나는 죽음을 매우 진지하고 무겁게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였는지 사람뼈가 정육점 고기처럼 매달린 것을 보며 경악했고, 그 주변을 나를 비롯한 관람객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고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죽음 그 자체보다 죽음을 대하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태도에 더 시선이 머물렀다. 병원, 장례식장, 납골당 등에서 죽음에 보다 가까이 다가갈 수는 있지만, 살아 있는 자는 죽음의 어디까지를 알 수 있을까? 결국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죽음에 대한 산 자의 두려움과, 죽음으로 인해 남겨진 슬픔뿐인지도 모른다. 전시는 죽음의 실제를 보여주는 작품들이었지만, 동시에 살아 있는 자에게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죽음의 불가능성’을 전시장 전체를 통해 드러내고 있었다.
데미안 허스트는 불가능한 것을 꿈꾸는 작가이다. 예술의 여정을 통해 영원한 것이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멈추는 즉시 부패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기에 그는 "불가능한 것을 꿈꾼다". 그리고 "불가능 것을 계속 시도"한다. 그것만이 살아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데미안 허스트에게 죽음은 엄숙한 것이 아니다. 그에게는 죽음은 알 수 없기 가능성을 지닌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멈출 수 없는 딜레마를 즐긴다". 그 딜레마 속에서 살아 있음을 느낀다. 그가 죽음을 대하는 방식이다. 그는 예술을 하는 순간이 재미있다고 한다. 그리고 예술은 재미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종교적인 믿음이나 약을 통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방식으로 삶과 죽음, 가능성과 불가능성 사이의 딜레마를 즐기고 있다. 그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하나의 가능성으로 남는다.
전시장을 돌아다니며 우리는 저마다의 죽음을 만났을 것이다. 나처럼 죽음을 진지하고 무겁게 생각하던 사람에게는 죽음이 지닌 또 다른 가능성을, 죽음이 내일처럼 느껴지지 않던 사람에게는 죽음의 적나라한 충격을 느꼈을 것이다. 죽음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 불가능한 것을 상상하는 동안 수많은 죽음에 대한 이미지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이 또한 죽음이 만드는 가능성이다. 알 수 없기에 생겨나는 가능성 말이다.
마지막 전시실에는 실제 사람의 뼈에 8,601개의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신의 사랑을 위하여>와 수천 마리의 나비의 날개에서 떼어내어 만든 <신의 무한한 권능과 영광을 묵상하며>가 있다. 죽음을 통해 아름다움을 만들고, 아름다움은 죽음으로 만들어져 있기에 마음속에 쉽게 휘발되지 않는다. 아름다움에만 경탄할 수도 죽음에만 슬퍼할 수 만도 없다. 아름다움을 경시할 수도, 죽음을 무시할 수도 없다. 삶과 죽음, 아름다움은 추함과, 기쁨 슬픔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삶은 그 모든 것과 함께 있다.
전시의 처음에 보았던 데미안 허스트가 16살에 찍은 기괴한 사진은 전시장 곳곳에서 시리즈처럼 반복되고 있었다. 영안실에서 죽은 사람의 머리와 함께, 해골과 함께 , 죽은 상어와 함께, 죽은 나비와 함께. 삶은 죽음과 함께. 불가능성은 가능성과 함께.
데미안 허스트 <진실은 없어 그러나 모든 것은 가능하지>
2026. 03. 20 ~ 2026. 06. 28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 종로구 삼청로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