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고통과 상실에 몰두하면서도 그것에 영향받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물속을 걸어가면서 젖지 않기를 바라는 것만큼이나 비현실적인 생각이다.” - 레이철 나오미 레멘(Rachel Naomi Remen)
제주항공 여객기 사고 직후부터 많은 기자들이 현장에 도착해서 취재와 보도를 시작했습니다. 여객기 사고는 재난을 직접 겪은 1차 재난 경험자의 대부분이 사망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재난 대응과 언론의 관심은 2차 재난 경험자, 즉 유족과 가까운 지인들에게 향하게 됩니다. 현장은 트라우마가 가득합니다. 생존자 구조 등 긍정적인 측면이 매우 적고, 진상 규명 논쟁, 보상 문제, 미흡한 대처에 대한 비난, 대중의 혐오 반응 등 부정적인 측면이 몸과 마음을 힘들게 합니다.
생명 혹은 신체와 정신의 안위를 위협하는 충격적 사건을 트라우마라고 합니다. 자신이 직접 크게 다치거나 생명에 위협을 당하는 경험, 타인의 큰 부상이나 사망을 목격하는 것, 그리고 가족이나 친밀한 사람의 갑작스러운 죽음도 트라우마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이번 여객기 사고의 경우 항공 재난의 특성상 예상치 못한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가족과 지인이 사망한 대단히 충격적인 트라우마 사건입니다.
모든 기자들이 꼽는 가장 힘든 취재가 유족 취재입니다. 충격과 비탄에 빠진 유족을 대상으로 취재할 때 기자로서 직업에 회의감을 느끼는 도덕적 상해를 겪을 수 있습니다. 이태원 참사에서 딸을 잃은 어머니를 트라우마 분야 학술대회에 모셔서 말씀을 청했을 때 어머니가 들려주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기자를 비난하는데 나는 그렇지 않아요. 마음이 너무 괴로운데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을 때, 내 이야기를 그렇게 몇 시간이고 잠잠히 들어준 사람은 기자들 밖에 없었어요. 처음에는 인터뷰를 안 하려던 다른 유가족들도 나중에는 기자들을 만나서 목소리를 낼 수 있었어요. 유가족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됐는지 몰라요.” 기자에게 위로받았다는 어머니의 말씀이 다시 기자를 위로해 줍니다.
재난 현장에서 활동하는 경찰, 소방관, 응급구조대, 상담사, 의료진, 행정직 등 현장 대응팀 또한 트라우마의 영향을 받는 3차 재난 경험자이며, 업무 전, 업무 중, 업무 후에 트라우마나 소진에 대한 대비와 회복을 위한 교육과 프로그램을 갖추고 있습니다. 여기에 언론인이 포함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언론인으로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2차 트라우마(secondary trauma, 2차 외상)’입니다. 트라우마의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간접 경험을 통해 트라우마 반응을 겪는 현상을 2차 트라우마라고 합니다. 트라우마를 보고 들으며, 마치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것 같은 감정 반응을 일으켜 이에 압도될 수 있습니다. 원래는 트라우마를 겪은 환자를 치료하는 의료진이나 상담사가 2차 트라우마를 경험한다고 보고됐지만, 충격적인 사건과 생존자를 자세히 취재하는 언론인에게도 적용됩니다. 또한 트라우마 자료를 검토하거나 편집하고, 소셜미디어 사진과 영상을 검토하는 과정에서도 2차 트라우마를 겪을 수 있습니다.
재난 현장에 머물며 유족과 친밀한 관계를 쌓은 경우 더욱 감정적으로 몰입하고 공감하게 됩니다. 폭넓은 인맥을 가진 기자들 중에는 여객기 사고의 사망자가 가까운 지인이거나 인연이 닿는 사람인 경우도 있습니다. 참사와 개인적인 연결점이 있는 경우 2차 트라우마를 겪을 가능성이 더욱 높아집니다. 트라우마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사건에 거리를 두고 개인적인 시간과 활동을 가지라고 하지만, 이미 몰입에 빠져든 경우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으며 매우 힘든 감정에 휩싸이고 죄책감까지 들기도 합니다. 이럴 때는 오히려 더욱 2차 트라우마에 주의하라는 신호로 인지해야 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자들은 ‘기자라면 냉정하고 강해야 한다’, ‘기자가 충격적인 사건을 겪는 것은 당연하고 고통을 참아야 한다’, ‘이런 일에 충격을 받으면 어떻게 기자를 하느냐’는 말로 트라우마의 존재와 영향을 부정하려고 애썼습니다. 이제는 바뀌어야 합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에서 주최한 ‘트라우마 예방을 위한 재난 보도 가이드라인 발표회’에 참석하신 은퇴한 원로 기자분이 ‘내가 젊을 때 취재를 다니면서 너무 끔찍한 일을 많이 겪었다. 예전에는 그냥 참고 술만 마셨다. 그때 겪은 일들이 평생 동안 나를 괴롭혔다. 후배들은 나와 달라야 한다. 트라우마를 알고 잘 대처해야 한다.’며 절절하게 고백하고 조언하신 것이 기억에 오래 남습니다.
누구나 트라우마의 영향을 받습니다. 충격적인 사건을 겪고 몸과 마음에 변화와 고통을 겪는 트라우마 반응은 인간으로서 당연하고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자신의 정서적 반응을 인정하고 꺼내놓는 태도가 진정한 전문성과 회복력의 증거입니다. 트라우마에 대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트라우마와 그 영향에 대해 이해하고, 동료와 대화하고 서로 적극적으로 돕는 것입니다.
언론인은 회복탄력성이 매우 높습니다. 언론인으로서의 사명감과 긍지, 직업적 독립성, 다양한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볼 줄 아는 능력, 자사·타사를 가리지 않는 서로 돕는 팀워크는 회복탄력성의 든든한 바탕입니다. 언론인은 직무 특성상 트라우마에 노출될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대부분 잘 대처하고 회복합니다.
트라우마를 겪었다고 모두 환자가 된다거나 외상후스트레스장애에 걸리는 건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은 큰 고통을 겪은 후에도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회복하는 치유력을 갖고 있습니다. 충격적인 사건으로 고통에 빠질지라도 몇 주 혹은 몇 개월이 지나면 많은 사람들이 일상을 회복합니다. 만약 고통이 크고 오래 지속되거나 일상에 지장을 준다면 정신건강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다음은 언론인의 트라우마 대응을 위해 활동하는 세계적인 단체인 다트 센터의 ‘뉴스 미디어를 위한 자기 관리 팁’ 자료를 중심으로 우리 실정에 맞추어 보완한 내용입니다. 부디 도움이 되시기를 빕니다.
정찬승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사회공헌특임이사)
잠재적으로 트라우마가 유발될 수 있는 업무 전에
트라우마에 대한 저널리즘이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여러분이 하는 일은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입니다.
편집자 또는 관리자와 발생할 수 있는 정서적 위험에 대해 이야기하세요. 진지하게 받아들이세요.
강력한 사회적 지지와 동료 네트워크를 유지하세요.
힘든 업무를 배울 수 있는 도전으로 받아들여 보세요. 낙관성과 긍정성을 유지하세요.
특히 어려움이 발생할 경우 어떻게 정기적으로 연락할지 합의하세요.
위급한 상황에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데 동의하세요.
영상기자 – 장비를 철저히 준비하세요. 장비가 오작동하거나 촬영을 할 수 없는 상황은 스트레스를 가중시킬 수 있습니다.
업무 중에
비극에 직면했을 때의 고통은 인간의 정상적인 반응이지 나약함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세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곧 회복됩니다.
적절한 식사, 수분 섭취, 수면을 취하세요. 이 모든 것이 기자의 판단력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음주, 흡연, 약물 남용에 주의하세요. 모든 것이 좋지 않다는 신호입니다.
출장 중에도 가능하면 운동을 하세요. 가벼운 산책도 신체의 스트레스 반응을 조절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휴식을 취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휴식을 취하도록 권장하세요. 이렇게 하면 정보의 통합을 촉진하고 명확성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세요. 감정을 이해하는 것은 저널리즘에 정보를 제공하고 트라우마를 처리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세요. 자신이 목격하고 있는 상황과 이에 대응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보고 가능하면 동료들과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지세요. 생각을 공유하세요.
집에 전화하세요. 사랑하는 사람 및 동료들과 연락을 유지하세요. 특히 장기적인 과제를 수행할 때는 더욱 중요합니다.
너무 여러가지 가능성을 생각하지 말고 그 시점에서 적합한 결정을 내리세요. 필요하다면 나중에 재평가하세요.
잔혹한 이미지를 너무 오래 보지 마세요.
팀원들을 배려하세요.
자신의 한계를 파악하세요. 필요한 경우 교대를 요청하세요.
괴로운 기분이 든다면 숨기지 마세요. 그러한 반응은 인간적인 것이며, 이를 인정하는 것은 나약하거나 비전문적이거나 경력을 위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상기자 - 피드백과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데스크는 물론 동료와도 연락을 유지하세요. 놓친 기회에 연연하지 마세요.
영상기자 - 하루 일과가 끝날 때 장비를 정리하는 의식을 '스트레스 해소' 활동으로 활용하세요.
영상편집기자 – 현장 취재진보다 더 많은 트라우마 영상을 볼 수 있어 더 취약할 수 있습니다. 적절한 휴식을 취하고 영상 노출 시간을 조절하세요.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콘텐츠에는 경고 표시를 해서 재생 전에 미리 준비하도록 하세요.
업무 중 주의해야 할 트라우마 증상
방향 감각, 시간 감각의 왜곡이나 상실
공허한 느낌.
간단한 작업이나 문제 해결에도 어려움을 느낌.
허공을 응시하는 멍한 눈빛.
충동성, 극도의 분노, 논쟁, 폭력성.
지속적으로 주의가 산만함.
무의미함, 무력감, 공포, 삶에 대한 두려움, 심한 수치심.
육체적 또는 정신적 탈진.
과도한 죄책감
트라우마를 목격한 직후의 일반적인 반응
불면증
악몽
사건에 대한 침습적인 이미지 또는 생각
트라우마를 상기시키는 것을 회피
자신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
불안하고 쉽게 깜짝 놀람
트라우마 사건을 떠올릴 때 발한, 빠른 심장 박동, 현기증, 메스꺼움 등의 신체적 반응
이러한 반응은 휴식이나 교대가 필요하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증상이 지속되거나 극도로 힘들다고 느껴지면 정신건강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세요.
업무 종료 후에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 신뢰할 수 있는 사람과 대화하세요. 좋은 경청자를 선택하세요. 고립되지 마세요. 감정을 억누르지 마세요.
지연된 트라우마 반응이 나중에 당신을 놀라게 할 수 있으므로 모니터링하세요.
정상적인 일상과 활동을 유지하되, 속도를 늦추세요. 자신을 돌보세요.
고통이 3~4주 이상 지속되면 트라우마에 대한 교육을 받은 의료진의 전문적인 도움을 받으세요.
참고자료
정찬승, 2024, “언론인을 위한 트라우마와 스트레스 관리”, 한국영상편집기자협회, https://youtu.be/OVngGv2ronA?si=gJhtf_q-1ZKEQ9BS
한국언론진흥재단, 2022, “트라우마 예방을 위한 재난 보도 가이드라인 발표회”, https://youtu.be/ILcsos70Ee0?si=ZfbNR5D8Am7Ynr7O&t=677
한국기자협회·방송기자연합회·한국여성기자협회·Dart Centre Aisa Pacific·Google News Initiative, 2023, “언론인 트라우마 가이드북 1.0”, https://www.journalist.or.kr/data/banner/2023_trauma.pdf
국가트라우마센터·한국언론진흥재단, 2022, “트라우마 예방을 위한 재난보도 가이드라인”,
Dart Center for Journalism and Trauma, 2009, “Self Care Tips for News Media”, https://dartcenter.org/content/self-care-tips-for-news-media-personnel-exposed-to-traumatic-ev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