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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찬승 Oct 06. 2017

‘정신치료에서 포스트모던 의식(意識)' 강의 참관 후기

가와이 도시오 선생의 강의는 ‘정신치료에서 포스트모던 의식(意識) Postmodern Consciousness in Psychotherapy’을 제목으로 한 것이었다. 낯선 주제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강의실에 앉았다. 강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근대 의식(modern consciousness)은 서양의 문화적, 역사적 성취이다. 공동체의 권력, 물활론적 자연, 그리고 무의식으로부터의 해방이 근대 의식의 형성을 가져왔다. 근대 의식은 내적 갈등들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신경증과 정신치료와 연관성을 가진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갈등이 없이, 해리(dissociation)와 행동화(acting out)가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환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들은 범죄나 자해를 죄책감과 내적 갈등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행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의식은 소위 ‘포스트모던 의식’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변화해가는 것으로 보인다. 포스트모던 의식의 특징을 해리성 장애를 가진 환자들의 꿈을 예로 들어 설명하는데, 무의식과의 직접적인 대면이나 접촉이 아닌 먼 곳에서, 또는 완전히 유리되어 닿을 수 없는 곳에서 심리적인 갈등이나 충격이 없이 무의식을 보는 꿈들이다. 대상과의 뒤엉킴이 없이 그저 보는 것 만으로 나타나는 새로운 형태의 합일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꿈에서는 내용이 없이 그저 표면과 자기 투영만이 나타났다. 이런 포스트모던 의식은 미숙하거나 병리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며, 더욱 심화하는 것이 치료적으로 중요하다.


가와이 선생은 강의 중에 이해를 돕기 위해 ‘개가 쫓아오는 꿈’에 대한 해석을 했다. 개를 보고 두려워하는 환자의 문제를 두려움 자체에 있다고 해석했다. 개는 두렵지 않은 대상이지만, 꿈을 꾼 사람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있어서, 아무렇지도 않은 개를 보고 ‘무섭다’고 생각하여 도망가기 때문에 개가 더욱 쫓아온다는 것이다. 내가 듣기로는 이것은 인지치료의 기본 개념인 ‘잘못된 믿음에 의한 인지왜곡과 이로 인한 자동사고’의 틀에 의한 해석이다. 사실 그것은 심층심리학적인 해석이라기보다 개가 무서워 동네 어귀에서 개만 보면 달음질하는 아이에게 어른들이 해주는 말일 듯하다. 나는 가와이 선생의 해석을 들으며 당혹감을 느껴야 했다. 꿈에 나타난 상징을 통해 무의식을 진지하게 탐구하는 융심리학의 방법론에 이런 시각이 있었던가? 수많은 민담과 신화, 종교에 나타나는 개의 상징과 환자의 개인적 연상을 뒤로한 채, 인지적 오류만을 지적하는 해석은 마치 무의식의 강렬한 메시지를 거부하고 의식의 자아의 태도만을 중시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이어지는 포스트모던 의식을 가진 환자들의 사례를 듣고는 더욱 놀랐다. 자해행동, 범죄행위, 무분별한 성행위들을 반복하는 환자들의 마음속에 아무런 갈등도 없고, 그 행위들이 아무런 의미도 없어서 포스트모던 의식으로 볼 수 빆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표현은 신문기사나 소설에나 등장하는 묘사다. 그 부분에서 내가 이전에 치료했던 많은 환자들이 떠올랐다.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자살충동에 떠밀려 수없이 자살시도와 자해행위를 반복하는 환자들도 있었고, 윤리규범이라는 브레이크가 애초에 없는 사람처럼 죄의식 없이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환자들도 있었다. 그런 환자의 무의식을 탐색해가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아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그런 환자의 행동들이 문자 그대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더군다나 그 환자들을 치료하며, 그 정신세계가 근대의 의식을 넘어서는 새로운 시대의 포스트모던 의식의 출현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런 증상과 행동을 보이는 사람들은 현대에 불쑥 출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이든가, 아니면 그 의미를 아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운 것은 바로 무의식의 특징이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정신’이 바로 무의식이 아니던가.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아직 알 수 없는 것이다. 


나는 포스트모던 의식을 가진 내담자들의 분석사례를 주의 깊게 들었다. 임상현장의 경험이야말로 이론을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이기 때문이다. 주로 해리증상을 겪는 환자들의 꿈이었다. 꿈의 자아가 무의식과 접촉하거나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 어떤 막이 차단하거나 아니면 하늘 높은 곳으로 부양하여 그저 바라보는 것으로 모든 것을 관찰하는 듯한 태도의 꿈들이었다. 무의식과의 직접적인 접촉은 전혀 없어서 감정적인 충격도 없었다. 그저 바라보는 것이었다. 가와이 선생은 그것이 포스트모던 의식의 중요한 특성이며 융이 말한 것과는 다른 새로운 합일이라고 했다. 나의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무의식을 외면한 일방적인 자아의 태도로 인해 생겨나는 것이 바로 해리증상이다. 그런 꿈들은 치료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일부일 뿐이지 그것이 치료의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와 비슷한 꿈을 꾼 적이 여러 번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전체 분석 과정의 일부일 뿐,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개성화 과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융이 말하는 개성화는 의식과 무의식을 아우르는 전체정신의 잠재력을 실현하며 전체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분석 과정에서 개인적 무의식을 넘어서는 집단적 무의식의 원형들의 세계와 접촉할 때, 일상적 감정의 범위를 벗어나는 엄청난 신성력(Numinosum)을 체험한다. 이런 과정에서 의식의 중심인 자아는 무의식에 관심을 두고 상징의 의미를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 내가 들은 가와이 선생의 강의는 그의 주장대로 융의 개성화 과정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의 정신치료의 관심은 무의식보다는 포스트모던이라 불리는 의식에 있었으며, 무의식이나 상징에 대한 언급은 강의에서 거의 없었다. 포스트모던 의식이라며 예로 든 꿈들보다도 더욱 포스트 모던한 것은 가와이 선생이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인 다양성, 탈권위, 탈이념, 자율성은 그로 하여금 융의 개성화 과정과는 별개의 다양성을 모색하도록 한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본다. 


강의가 끝나고 나서 느껴지는 감정은 씁쓸했다. 근대 의식에 머물러 있는 나의 의식이 새로이 탄생하고 있는 포스트모던 의식을 부정하여 억압하는 것은 아닐지, 혹은 감히 평생을 무의식의 탐구와 전체 정신의 실현에 바친 융의 이론이 설명하지 못한 것이 이 시대에 나타났다고 주장하는 젊은 분석가에 대한 반감은 아니었는지 생각해 본다. 그러나 내가 아는 정신치료는 철학의 일부가 아니다. 도대체 누가 인간의 의식에 철학 사조의 딱지를 붙인 것일까? 백 년 전에도 그랬듯이 여전히 인간의 정신세계는 미지의 대륙과도 같다. 어두운 대지를 탐험하며 자신의 손에 든 횃불로 불을 밝히고 자신이 지나온 땅에 이름을 붙이고자 하는 탐험가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땅은 발견되기 이전부터 거기에 있었고, 전체 대륙의 일부일 뿐이다. 포스트모던 의식이라고 이름할 만한 의식의 태도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신 인류의 의식의 전체적 특성이며 정신치료의 새로운 방향이라는 것에 동의하기는 쉽지 않다. 


가와이 선생의 강의에서 등장의 기회를 놓친 무의식의 상징들은 지금도 내 꿈속에, 환자의 꿈속에, 여전히 건재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신화와 민담 속에, 현대적으로 각색된 수많은 영화와 소설과 드라마 속에 여전히 살아있으며, 의식의 자아가 무의식의 의도를 알아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편집자 주] 가와이 도시오 교수의 Postmodern Consciousness는 흥미로운 착상이다. 시대가 바뀌면 사람들의 의식도 바뀐다. 이전에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덜 눈에 띄었던 특성이 현대에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집단적 의식의 변화된 성향이 있을 수 있고 그러한 의식은 무의식과 마찬가지로 분석심리학에서 진지하게 탐구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의식의 어떤 특별한 태도에 대해서 무의식은 어떻게 반응하며 ‘자기’는 어떤 방향을 제시하는가 하는 측면에서의 심도 있는 해석이 아쉽게도 부족했다. 꿈은 물론 의식 내용을 반영하기도 한다. 그러나 객체정신Objektpsyche으로서의 무의식, 무의식의 자율성, 의식을 보상하여 전체정신을 실현하고자 하는 자기Selbst의 의도가 바로 꿈에 담겨 있음을 Jung은 항상 지적해 왔다. 아마 시간 여유가 있었다면 이에 대한 언급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2006년 한국융연구원에서 열린 토시오 가와이 선생의 강의 ‘Postmodern Consciousness in Psychotherapy’의 참관기입니다. 당시 필자는 분석가 수련과정에 있었습니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 되돌아보니 여러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도 있겠다 싶지만, 무의식에 대한 진지한 고려가 중요하다는 관점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기록을 보존하기 위해 여기 남겨둡니다. 2007년 한국융연구원 회보 "길"에 기고한 글의 일부를 수정했습니다. 편집자 주도 함께 남겨 둡니다. 


글 _ 정찬승 (융 학파 분석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의학박사)

http://www.maumdream.com

[현] 마음드림의원 원장, 울산대학교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외래교수,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재난정신건강위원

[전] 한국분석심리학회 총무이사, 대한신경정신의학회 홍보기획위원, 대한노인정신의학회 평이사

[주요경력] 세계보건기구 서태평양지부 전문가회의 참가, 국제노년신경정신약물학회 젊은 연구자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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