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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공방 Apr 29. 2022

꿈을 포기하기 직전인 당신께!

현실적 낙관주의자


소년원은 소년이 잘못하면 가는 곳, 대학원은 대학생이 잘못하면 가는 곳이라 했던가. 그래서인지 대학원 시절은 꽤나 고단했다. 학업과 생계를 책임지면서 결혼까지 했으니 지칠 법도 했다.


일이 쌓여갈수록 의무도 늘어났고, 책임져야 하는 일도 점점 많아졌다. 제한당하는 사람에서 제한하는 사람으로 역할이 변했고, 규정을 따르라고 외치며 악역을 맡는 날이 잦아졌다. 열심히 사는 악역은 최선을 다해 욕을 먹는다. 아무나 버틸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책임감에 대해서는 둘째가라면 서럽던 내가 무너진 것도 그때쯤이었다.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툭, 하고 끊어졌다. 그리고 생전 처음으로 모든 것을 내팽개쳐두고 도망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도망치듯 휴가를 내어 제주로 떠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제2의 인생이 될 꿈을 만났다. 우연히 들어선 책방에서 말이다.


예전에 나는 책을 사랑하는 아이였다. 하지만 성인이 된 이후로 활자란 온갖 공문서와 논문만으로도 벅찼다. 분주한 삶 속에서 독서는 사치이자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 하루하루가 벅찼다. 그렇게 책과 데면데면한 사이가 되었다. 그러다 그날 제주의 책방에서 나는 다시 책을 만났다. 그날 책에서는 다디단 향기가 났다.


제주 책방은 도시의 대형 서점과는 사뭇 달랐다. 독립출판물과 개성 넘치는 책이 가득했고, 이를 보고 있노라니 새로운 세상으로 초대받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책을 하나하나 구경하던 중 내 눈길을 사로잡는 한 권의 책을 발견했다. 얇고 투박한 물성의 초록색 책. 펼쳐보지도 않고 책을 계산했다. 그리고 차에 타자마자 이렇게 선포했다. 오빠! 나 다 그만둘 거야. 그리고 이 출판사랑 책 쓸 거야.


하던 일을 그만두고 책을 쓴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우려의 눈빛을 보냈다. 어떤 이는 끝을 보지 못한 나를 포기에 익숙하다며 비난했다. 또 다른 이는 그동안의 노력이 아깝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래도, 그래도 하던 것은 끝마쳐야지, 이 말만 반복했을 뿐이다. 하지만 왜인지 나는 될 것만 같았다. 아니 되어야만 했다.


정말 밑도 끝도 없는 결단이었다. 그 결정은 현실로 이루어졌을까? 그렇다. 이번 5월에 나는 꿈꾸던 출판사와 세번째 책을 출간하기로 했다.


*


할 수 있다. 될 수 있다. 이 주문의 말이 마법처럼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그 일은 종종, 아니 자주 일어난다. 긍정적인 생각은 실제가 된다. 기대가 현실이 되는 것이다. 나는 이전 글에서 긍정의 힘을 흉본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긍정을 이야기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세상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말한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격려한다. 하지만 이게 정답이 되려면 두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현실적일 것 그리고 근거가 있을 것.


어릴 때부터 근거 없는 칭찬과 보상을 받은 아이가 있다. 넌 무조건 잘될 거야. 이 말만 듣고 자란 아이는 잘되지 않는다. 당연히 잘될 거라 믿으므로 애써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력하지 않았기에 딱 그만큼의 결과가 따른다. 기대에 못 미치는 현실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아이는 자신의 부족함을 탓하지 않는다. 대신 믿었던 긍정을 증명해주지 않은 세상을 향해 분노한다. 감히! 잘 되어야 할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다니!


근거 없는 낙관주의는 준비할 기회를 박탈하고, 실패 상황에 대비해야 하는 이를 무력하게 만든다. 그럼으로써 성장할 가능성마저 줄인다.


낙관주의자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모든 낙관주의자가 아름다운 결말을 맞는 건 아니다. 현재의 자아와 미래의 자아를 연속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만이 원하는 바를 쟁취한다. 연속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지금의 나와 미래의 나를 동일선상에 놓고 본다는 것이다. 지금의 내가 자라서 그날의 내가 된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느냐고? 있다. 아니, 많다.


사람들은 미래의 나를 현재의 나와 동떨어진 사람으로 본다. 우리가 일을 미룰 수 있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오늘의 내가 해내지 못해도 내일의 나는 해낼 거라고 믿으니까. 하지만 내일의 내가 곧 오늘의 나다. 오늘 하지 못하면 내일도 하지 못한다. 오늘 하기 싫은 건 내일도 하기 싫다. 미래의 나를 오늘의 나와 같은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그날의 노고를 공감할 것이다. 그러면 차마 일을 미루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미래의 나를 마치 다른 사람 보듯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보니 언젠가 마법처럼 어떠한 일이 벌어져 있을 거라 기대한다. 바람을 이루어지기 위해서 오늘의 내가 희생해야 한다는 사실은 간과한다.


현재와 미래의 자아를 연속적으로 느끼는 사람은 미래를 위해 당장의 즐거움을 포기하고, 즉각적인 작은 만족보다 유예된 큰 보상을 추구한다. 그런 삶의 모습을 쌓아 기대를 현실로 바꾸는 것이다.


*


스무 살 때부터 책을 쓰겠다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언젠가는, 살다 보면, 한 권은 쓰겠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연한 기대였을 뿐이다. ‘언젠가는’이라는 말은 나를 행동하지 않게 만들었다. 어떻게든 될 거라는 생각으로 현실에 안주하도록 만들었다. 내일의 나를 너무나도 믿었다. 하지만 오늘 행동하지 않는 한,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와 동일 인물일 뿐이다. 더 나은 사람으로 될 리가 없다. 그런 내가 어째서 행동하게 되었을까?


사람들은 궁지에 몰리면 두 가지 중 하나의 선택을 한다. 포기하거나 새로운 길을 찾거나. 나의 목표도 벼랑 끝에 다다라서야 생겨났다. 뒤돌아서지 않으면 죽겠다는 그 시점, 더 이상 가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느낀 그 순간. 여태까지 살던 대로 게으르게 걸을 순 없었다. 몸을 틀고 걸어야 했다. 새로운 방향으로 행동을 옮겨야 했다.


사람들은 어디가 벼랑인지도 모른 채 가던 길을 걸으라 했다. 하지만 때로는 듣지 않는 것도 지혜가 될 때가 있다. 나의 삶을 대신 살아줄 이들의 목소리가 아니기에. 선택하고 행동했다.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나를 만든다는 것을 믿었다. 그렇게 당장에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그렇게 조금씩 꿈에 가까워지는 나를 만날 수 있었다.


지금 어둠을 헤매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어둠이 지나간 자리에 빛이 들어오게 마련이라고, 그 빛이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안내할 거라고. 그때 부디 긍정하라고, 막연한 긍정이 아닌 빛을 따를 수 있는 자신에 대한 긍정. 걸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그 빛을 따라 걷기만 하라고. 그러면 어느새 그 끝에 닿은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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