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육자의 어두운 마음
“왜 당신은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뭘 더 해주지 못해 미안해하지 않아?”
어느 날 남편이 나에게 했던 말이다.무슨 말이지? 분명히 내 모국어로 들었는데도 무슨 의미인지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학창시절 수학은 썩 자신이 없어도 국어만큼은 늘 만점이었고, 오늘날도 듣기와 말하기로 밥을 벌어먹고 사는 심리상담사다. 남편은 내가 자기 말을 잘 못 알아듣는 이유는 자신이 나에게 상담료를 내지 않아서라고 투덜거리는데 당연히 그렇지 않다. 남편이 하는 말은 나에게 무척 중요하다. 가정이라는 사업체를 함께 운영하는 공동대표가 아닌가. 그것은 정말로 오해다.
하여간 이 말을 하면서 남편은 원망하는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았고, 그의 목소리는 그간 참을만큼 참다가 오늘에야 폭발한 듯한 감정으로 떨렸다.
그 비언어적 표현으로 그가 내 어떤 점을 몹시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것은 짐작했다. 문제는 그 내용이 뭔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나는 찬찬히 이 말을 이해해보려고 생각에 잠겼다.
이 문장의 맨 앞에 둔 ‘왜’라는 단어는 행동의 이유를 묻는 의문부사이긴 하나, 이런 상황에서는 이유를 묻는다기보다는 뭔가 마땅히 해야할 것을 엉뚱하게 하거나 안할 때 쓰는 표현이다. 남편의 생각에 나는 마땅히 아이들에게 미안해해야하는데도 ‘미안해하지 않는다’고 문제시하는 것이었다.
여기까지는 확실히 이해가 되었는데 그 다음이 난관이다. ‘조금이라도 뭘 더 해주지 못해’라는 부분이다. 나는 입 안에서 반복해 굴려보았다. 조금이라도 뭘 더 해주지 못해, 조금이라도 뭘 더 해주지 못해…하, 무슨 소리지? 혹시 내가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뭘 더 해줄 수 있었다면 이미 해줬을 것 같은데. 부모가 해야하는 것 중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제공하고 있는데. 오히려 이것들은 생일, 어린이날, 크리스마스 때 받고 싶은 선물을 물어도 한참동안 고민할 정도로 풍요롭게 살고 있어서 여기서 더 뭘 해주면 안될 것 같다.
나는 내가 가진 자원을 아이들에게 기꺼이 주고 있다. 나의 몸, 시간, 돈, 삶, 그리고 모든 다른 가능성들을 아낌없이 베어서 아이들에게 나누어줘 왔고 이 순간에도 그렇게 하고 있다. 억지로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내가 원하는 행복한 마음으로 말이다. 남편은 내가 엄마 역할 하는 것이 여전히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일까?
“나는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있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
라고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남편은 더욱 소리 높여서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는게 문제라는 거야!”
아하, 그랬다. 남편의 말은 나의 행동이 아닌 태도에 대한 지적이었다! 남편이 문제 삼고 있는 것은 내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었다. 내가 그것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태도’였다. 더 해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 즉 죄책감을 느끼며 자녀를 대해야 자연스럽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어째서 미안해하지 않느냐고!”
그는 한번 더 소리 질렀다.
“나는 하나도 안 미안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뭘 어떻게 그럴 수 있냐니, 그냥 안 미안하다니까. 나는 모든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고 있다. 아이들에게 좋은 환경과 자원을 제공하면 기쁘고 충만하다. 내 행복한 마음 어디에도 죄책감은 없다. 신이 천지를 창조한 후 ‘보기에 좋았다’ 하는 것과 꼭 같은 마음이다.
자녀에게 더 해주지 못해 마음이 무거운 상태, 미안하다고 느끼는 태도를 부모에게 권장하는 것은 우리 남편 뿐만이 아니다.세살 된 딸을 어린이집에 데려가는 길에 동네 할머니를 마주쳤다. 할머니는 혼잣말인것처럼 나에게 말했다.
“저런 애기들이 어린이집에 있는 것 보면 너무 짠하고 안쓰러워. 우리땐 다 엄마들이 끼고 키웠는데.”
그 할머니는 인류는 수십 수백만년에 걸쳐 공동육아를 해왔다는 사실을 모르시는 거다. 원래 인간은 혼자 아이를 키우는 종이 아니며 아이를 부모가 책임지는 방식은 오히려 아주 최근의 일이다. 공동육아의 맥을 이어가는 것이 오늘날의 어린이집이며 학교다.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교사들의 돌봄 아래 또래집단 안에서 아이는 적응한다. 양육이란 아이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살아남고 선택 받도록 훈련시키는 것이다.
나는 부모의 사랑에 죄책감이라는 옷을 입히는 것을 거부한다. 죄책감이 아름답고 숭고한것처럼 소개해봤자 나는 그것이 아주 몹쓸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미안한 마음으로 건네는 밥과 기꺼운 마음으로 건네는 밥은 다르다. 미안한 얼굴로 건네는 사랑은 아이에게도 미안함을 남기고 기꺼이 건네는 사랑은 아이도 기꺼이 받을 수 있다.
부모가 자원을 제공하며 죄책감을 느끼면 아이들 또한 죄책감이나 억울함을 느끼게 된다.
‘이것밖에 못해줘서 미안해’ 한다면 ‘엄마가 나때문에 미안해하는것에 내가 더 죄송하다’ 라거나 ‘아니 그럼 내가 더 받을 수도 있었는데 못받고 있다는 거야? 억울한데?’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부모가 자원을 제공하며 적절하다고 느끼면 아이들은 납득하고 감사한다.
‘이정도 주는 것이 충분한 거야’ 한다면 ‘아, 이정도 받을 수 있는 거고. 충분하구나’, ‘못 받을 수도 있는데 감사하다’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사실 자세히 관찰해보면 아이들에게 별걸 다 미안해 한다. 소아과에 가면 아기 엄마들이 예방주사를 맞히면서 “미안해, 미안해” 말한다. 듣는 아이는 세상이 나에게 아주 미안할 짓을 하는 걸로 오해할 것 같다.
나는 예방주사를 맞히기 전에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은 운이 참 좋아. 오늘 맞을 주사는 무서운 병을 예방해주는 아주 신기한 주사야. 그런데 이걸 우리나라에서 공짜로 너희에게 맞혀준대. 너무 감사하지 않니? 안 맞혀주는 나라도 많아.” 우리 아이들은 정말로 감사한 마음으로 예방주사를 맞았다.
나는 아이에게 기꺼이 주는 것들을 희생이 아니라 선택이라고 부르겠다. 희생에는 억울함이 따라오지만 선택에는 책임만 있다. 부모의 투자는 자신을 깎으며 아이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누는 것이어야 한다. 나는 하나도 미안하지 않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만큼 충분히 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홀가분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대한다.
나는 아이가 세상을 ‘여전히 부족한 곳’이 아니라 ‘이정도면 충분한 곳’으로 여겼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