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희주 Aug 15. 2023

사유, 너의 자리에 서보는 일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은 의외로 평범하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에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으로 악이 특별함이 아니라 평범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1960년 5월 아르헨티나에서 도피 중이었던 독일 나치인 아돌프 아이히만은 이스라엘 비밀경찰에 체포되어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게 된다. 치철학자였던 한나 아렌트는 당시 뉴요커 잡지의 특파원 신분으로 이 재판과정을 기록한다. 나 아렌트는 자신이 유대인이었으며 프랑스에 거주할 당시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탈출한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나치가 저지른 참상의 직접적인 경험이 있었던 그녀였기에 여느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이 재판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지켜보면서 놀라운 점을 발견하다. 수백만의 유대인을 학살하는데 큰 역할을 했던 아이히만이 상상과는 달리 너무나 평범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아이히만은 셰익스피어의 비극에 나오는 오셀로의 아고도 아 또한 리처드 3세처럼 대놓고 악행을 저지르는 그런 인물도 아니었던 것이다. 모든 유대인이 잔혹한 악마라고 생각했던 인물이 자식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친절한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것에 놀란다. 그녀는 이토록 평범한 이가 어떻게 이런 극단적인 잔혹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하였다.


자신의 개인적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는 어떠한 동기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근면성 자체체는 결코 범죄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상관을 죽여 그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살인을 범하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문제를 흔히 하는 말로 하면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 것이다. (P. 391)


아이히만은 유대인을 수용소로 수송하는 운반책임을 맡은 담당자였다. 그는 유대인을 수송하는 열차와 트럭을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위해 근면하게 일했다. 그의 근면함은 많은 유대인을 수용소수용하는 것을 가능케 했다. 그리고 '최종 해결책'이라 불리는 학살이 가능하게 했다. 근면성 자체가 범죄는 아니었지만 아이히만은 그런 근면성의 가져올 결과에 대해 판단하지 못한 듯 보였다. 아이히만은 근면했지만 어쩌다 학살을 저지르게 된 것일까. 그리고 그런 자신의 행동에 대해 죽을 때까지도 가책을 느끼지 못했던 것일까?

한나 아렌트(1906-1975)


무사유한 근면함은 악이 될 수 있다.


아이히만은 '무사유(thoughtlessness)'했던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악은 악하기로 작정하는 특별함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보았다. 의외로 악은 너무나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이히만은 '무사유'했기에 악이 드러날 수 있게 되었다. 아이히만의 '무사유'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아이히만의 말을 오랫동안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말할 수 없음은 그의 생각할 수 없음, 즉 타자의 입자에서 생각할 수 없음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그와는 어떤 소통도 가능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거짓말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말과 타자의 현존을 가로막는, 따라서 현실 자체를 막는 튼튼한 벽으로 에워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P.106)


아이히만은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할 능력이 없었다. 아이히만은 진술의 과정에서 타자와 소통하는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심문을 받는 4개월 동안 자신이 고작 친위대 중령의 지위밖에 오지 못했으며, 자신이 진급하지 못한 에 대한 억울함만을 호소할 뿐이었다. 그는 그저 어린아이처럼 '나는...', '나는...', '나는...'을 반복할 뿐이었다.


그는 근면했지만 무사유했다. 상부의 지시에 복종하는 것에 근면했다. 하지만 다른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했다. 같은 인간으로서의 고통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근면함이 타자에게 어떤 비극이 될지 생각하지 못했다. 자신이 하는 수송 책임자 역할이 그 수은 유대인을 학살하는데 기여하고 있음을 생각하지 못했다. 자신이 하는 싸인 하나가 그 많은 사람을 죽음의 길로 내몰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자신의 행동이 '너'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하지 못했다. '너'의 입장을 고려하지 못했다. '너'의 고통을 느끼려 하지 않았다.


1961년 아이히만의 재판 장면


무사유는 고통을 회피하게 한다.

 

아이히만은 진술과 재판 과정에서 공직에서 일하며 사용하던 관용어나 상투어를 사용했다. 개인적인 자신의 현실을 느끼려 하지 하지 않았다. 아이히만은 자신의 감정 또한 회피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생각하지 않음으로  죄책감과 부끄러움이라는 고통스러운 감정을 적극적으로 피해 온 것으로 보인다. 무사유는 고통스러운 감정을 회피하게 해 준다. 같은 인간으로서 가지는 고통을 느끼지 않기 위해 한 사람으로서 말하지 않았으며, 한 인간으로서 사유지 않았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처형당하는 순간에도 장례식장에서 흔히 사용하는 상투적 표현을 사용했다. "잠시 후면 여러분, 우리는 모두 다시 만날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운명입니다."(P. 349)라고 말한 것이다. 그는 죽음 앞에서도 자신을 감추었다. 죽음 앞에서 조차 자기 자신과 직면하지 못했다. 그는 끝까지 자신의 비극, 슬픔, 죄책감과 만나지 못했다. 그는 타인의 자리는 물론 자기 자신의 자리에도 서보지 못한 것이다. 그는 타자에게 공감은커녕 진정한 자신에게도 공감하지 못했다. 그는 철저하게 한 사람으로서의 고유성을 포기했다. 교수형을 당하는 그 순간에까지 보여준 아이히만의 이러한 태도는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이 보여주는 비극이었다.


팔레스타인 만평가 나지 알 알리의 만평


사유는 타자의 자리에 서는 일


악의 평범성은 개인적인 말과 사유를 허용하지 않을 때 드러난다. 사유하지 않음은 고통스러운 감정을 회피하게 한다. 이를 반대로 말하면 사유한다는 것은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는 것이다. 타자의 '현실'에 공감하는 것이다. 타자의 자리에 서 보는 일이다.


내가 아닌 타자의 자리에 선다는 것은 여간 불편한 일일 아니다. 익숙한 내가 아닌 불편한 너의 자리에 있는다는 것은 고통을 자처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는 누구나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  아이히만처럼 힘이 있는 경우도 있겠지만,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 나와 다른 타인의 처지에 공감하지 못했다면 자기 내면의 아이히만을 만나게 된다.


권력자에게 하는 공감은 복종에 가까울 것이다. 아이히만은 권력자의 이상에 복종했다. 그리고 성공하고자 하는 자신의 야심에 충실했다. 아렌트는 이러한 아이히만의 입장에 서보려고 했다. 사이코패스와 같은 병리적인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 그가, 비범한 악도 아닌 그가, 이토록 평범한 그가 어떻게 학살이라는 악행을 저질렀는가를 이해하기 위해 고통스러운 사유를 해야만 했다. 아렌트가 아이히만을 용서했다 거나 그의 말에 동의했던 것이 아니다. 그저 그의 입장에서 그가 처한 상황에서 문제를 바라보려고 했다. 그래서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찾아내게 된 것이며 후대의 우리에게 각성의 메시지를 줄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렌트는 이 글로 인해 같은 유대인들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된다. 이스라엘에서는 2000년 전까지 한나 아렌트의 책이 번역되어 나오지 않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이 독일 나치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분노와 복수심을 이해하고 있었. 그녀 역시 자신의 친구와 동포를 죽인 그를 저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악이 특별한 소수가 아닌  이토록 평범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에 경악했고, 이 의문을 풀기 위해 노력했다. 제2의, 제3의 아이히만이 다시 나와서는 안되기에, 아이히만이라는 타자 입장에서 생각하려 했던 것이다.


뱅크시 < 풍선과 소녀>


내면의 아이히만을 경계하며


끔찍한 이야기다. 인류의 비극적 사건이었던 유대인 학살이 아니더라도 일상에서의 작은 아이히만을 만날 수 있다. 악의 평범함은 큰 권력을 가진 조직에서 뿐만이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도 일어난다. 흔한 근면 성실함을 생각해 보자. 여기서의 근면함은 권력자에게 향한 것이다. 그리고 기존 제도와 관습에 향한 것이기도 하다. 나의 상급자에게, 어른에게, 기존에 존재했던 관습에 근면성실한 것이 타자의 입장을 고려하지 못했던 적이 언제였을까? '너'의 입장, '너'의 고통을 고려하지 않았던 적이 언제였을까?


개인적 관계에서는 부당한 일에 저항했던 일들이 있었다. 소외된 친구의 편에 서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직장생활에서는 이것이 어려웠다. 회사가 마치 나의 생사여탈권이라도 쥐고 있다고 생각 때문이었다. 대들면 나만 피곤하다는 생각이 무의식까지 가득 들어 있었다. 그래서 회사의 방침대로 인건비를 낮추기 위해 정규직보다 계약직을 더 많이 채용하고, 협력업체에 무리한 요구를 했던 일이 있었다. 동료 직원에게 역할만을 강조하며 책임을 물으려 했던 일도 있었다. 큰 집단(권력자, 문화관습)의 뒤에 숨어 조직의 논리로 작은(소수자, 약자) 사람들을 고려하지 못했었다. 대놓고 괴롭히지는 않았더라도 대체로 무관심했다. 내 책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결과에 대해 무거움을 가지지 못했다.


어쩌면 '너'란 대상은 애초에 소외되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온통 '나'로 가득 찬 세상에서 '너'는 설 자리에 없어지게 된다. 시인과 촌장의 노래 <가시나무>의 가사처럼 '내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에 쉴 곳 없네'의 상황이었는지도 모른다. 가시나무는 울타리가 울창하다. 아무도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못하게 한다. 자기만의 울타리 갇혀 나가지도 누가 들어오지도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소통의 단절은 '나'의 고통으로 이어지게 된다. 타인에게 무관심해져서 결국 자신을 고립시키는 외로움이라는 고통을 낳게 된다.


'악의 평범성'은 불편하다. 자기 내면의 아이히만을 성찰하는 것은 더욱 힘들다. 하지만 이런 불편함을 피하려 하면 무사유한 방법을 택하게 된다. 아이히만이 무사유를 통해 고통을 차단했듯이, 고통을 차단하려고 하면 무사유해 질 수밖에 없다. 진정으로 사유하는 삶을 살고 싶다면, 타인과 더불어 살고 싶다면 '너'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 고통을 감당하려 할 때 진정한 사유를 하게 된다. 사유함은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게, 추한 것은 추하게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선과 악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게 해 준다.


매거진의 이전글 상처 입으려 할 때, 상처 입지 않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