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상 나의 예술은 내 자유의지가 낳은 고백이자, 인생에 대한 관조를 명료하게 드러내려는 시도와 다름없다. 나의 예술은 근본적으로 자의식의 표출이다. 하지만 내 작품을 통해 다른 사람들 역시 나처럼 자신의 인생을 명료하게 관조할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뭉크의 그림은 자기고백적입니다. 그의 작품을 보면 마치 그림으로 된 일기장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미술치료에서는 그림으로 감정을 기록하는 '비주얼 저널'활동을 합니다. 자신의 감정을 구체적 형태로 그리거나, 혹은 색과 선으로 추상적으로 표현한 후 그림의 의미를 해석하게 됩니다. 이 활동은 자신의 감정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능력에 도움을 줍니다. 뭉크는 자신의 인생을 관조하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고 했습니다. 뭉크는 자신의 기억을 그림으로 표현하여 외부로 드러낸 후, 그 감정과 거리 두기를 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고 보살폈던 것입니다.
특히 뭉크와 연인들의 그림을 보면 그의 감정이 어떴을지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뭉크는 사랑과 이별에 대한 감정을 연작으로 그리면서 자신의 마음을 살폈습니다. <생의 프리즈> 연작에는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삶과 죽음 사이에 있는 사랑. 그 '사랑'에 대해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랑의 시작 : 오직 너만
뭉크, <목소리(한여름 밤의 꿈)>, 1893년, 87.5×108㎝, 보스턴 미술관
뭉크는 평생 독신으로 지냈지만 몇 번의 소중한 연애를 경험하게 됩니다. 젊은 시절 만났던 여인은 작품의 주요 동기이자 소재가 되었습니다. 특히 뭉크의 첫사랑 밀리와 약혼까지 했던 툴라는 사랑의 깨달음과 고통을 알게 했던 관계였습니다.뭉크의 첫사랑 밀리는 뭉크보다 두 살 연상의 유부녀였습니다. 뭉크는 21살에 가족들과 함께 한 여름 휴가지에서 밀리와 운명적 만남을 가지게 됩니다.
<목소리>라는 그림에서는 순진해 보이는 한 여성이 수수한 표정으로 서 있습니다. 뭉크는 이별 후 첫사랑 밀리를 팜므파탈적 이미지로 표현했지만 이 작품에는 사랑이 시작되는 시기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서로에게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가는 조심스러운 시작 말이죠. 여인의 뒤로 깊고 넓은 바다가 방대하게 펼쳐져 있지만 해안가 안쪽으로는 나무가 수직으로 자라나고 있습니다. 수평으로 넓어진 공간이 나무로 인해 시선을 가두고 있는 효과가 있습니다. 마치 뭉크의 마음이 저 여인에게 강하게 집중된 것처럼 보입니다. 사랑을 할 때는 오직 '너'에게만 온 마음과 시선이 집중되는 것처럼 말이죠.
사랑의 깨달음 : 나는 네가 되고, 너는 내가 되고
〈키스〉 캔버스에 유채, 73×92cm, 1892, 노르웨이 국립 미술관
1892년에 그려진 <키스>는 밀리와의 연애가 얼마나 비밀스러운 연애였는지를 보여줍니다. 창 밖에 사람들은 일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창문 안에 있는 두 명의 남녀는 커튼 안쪽으로 숨어 둘만의 격정적인 키스를 나누고 있습니다. 마치 창문 안쪽은 다른 시간이 흘러가는 것처럼 말이죠. 밀리와의 관계는 6개월 남짓한 시간이었지만 이때 사랑의 기억은 뭉크의 가슴에 강하게 남게 됩니다.
뭉크 <키스> 1897년, 99 x 81 cm, 오슬로 국립미술관
1997년에 그린 <키스>는 이전보다 표현이 좀 더 단순해지면서 과장되어 있습니다. 키스를 하는 두 연인이 보입니다. 둘의 얼굴과 몸은 하나가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둘은 서로에게 녹아들어 가는 것처럼, 혹은 서로가 서로를 집어삼키는 것처럼, 자기의 존재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사랑을 할 때는 자신의 존재를 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시간을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베르그손은 그의 저서 <물질과 기억>에서 이를 '지속'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지속은 수학적인 시간과 다릅니다. 서로에게 몰입되어, 시간을 잊고, 자신의 존재마저 잊게 되는 '지속'이라는 시간일 것입니다. 서로에게 녹아들어 침투하며 다른 존재가 되게 하는 그런 '지속'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사랑을 할 때 저 또한 그런 기억이 있습니다. 자의식으로 가득 찼던 '나'가 사라지고 사랑하는 '우리'만 존재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것은 남녀 간에만 경험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이를 낳고 엄마로 살면서도 '나'자신을 잊게 됩니다. 온통 아이와 가족에게만 집중되는 시간을 보내게 되죠. 그러나 이 시간이 계속되다 보면 문득 공포가 찾아올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시간을 잊고 나를 잊다가는 영영 '나를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공포 말이죠.
뭉크 <흡혈귀> 1895년, 91 x 109 cm, 뭉크 미술관
뭉크는 이 지속이 시간을 두려워했던 것 같습니다. 나를 잊는 시간이 나를 '잃는'시간으로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흡혈귀>에서는 사랑하는 여인이 흡혈귀로 변하여 남자의 피를 빨고 있습니다. 뭉크에게 사랑은, 특히 첫사랑 밀리는 자신을 파멸케 하는 두려운 존재였나 봅니다. 자아를 상실하게 하는 것처럼 두려움을 느끼게 했던 것 같습니다. 깊은 사랑은 자신을 잃게 만듭니다. 그것은 행복이기도 합니다. 나의 고통과 고민도 함께 없어지기 때문이죠. 온통 그 사람에게 마음을 주고 나며 그 사람만 보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나의 존재가 없어진다는 두려움이죠. 너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죽음과 같은 두려움입니다.
사랑의 죽음 : 널 잊을 수 없어, 벗어날 수 없어
믕크 <재> 1894년, 캔버스에 유채, 120.5 x 141 cm, 오슬로 국립미술관
뭉크〈이별〉1896년, 캔버스에 유채, 96.5×127cm, 1896, 뭉크 미술관
살아있는 모든 것이 변하듯, 사랑도 변화를 맞이합니다. 그 사랑은 애증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슬픔으로 변해 버리기도 합니다. 뭉크는 밀리와의 이별에 대한 고통을 연속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재>에서는 여인이 가슴을 풀어헤치며 여전히 자신을 유혹하고 있고 좌절하고 있는 남성에게 머리카락으로 휘감으려 하고 있습니다. <이별>에서 남자는 붉은 손으로 터지려는 가슴을 부여잡고 있지만 그녀를 온전히 잊을 수는 없습니다. 사라져 가는 그녀는 머리카락으로 계속 남자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이렇게 뭉크는 첫사랑 밀리와의 사랑을 고통스럽게 기억하게 됩니다.
인생이란 : 기쁨과 슬픔이 만드는 절묘한 긴장감
〈인생의 춤〉 캔버스에 유채, 25×191cm, 1899~1900, 노르웨이 국립 미술관
이후 뭉크는 툴라라는 여인을 만나 연애를 하게 되고 결혼을 약속하게 됩니다. 툴리는 뭉크에게 헌신적인 여성이었습니다. 앞서 만난 밀리는 뭉크가 더 적극적이었다면 이번에는 툴라가 적극적으로 다가와 온 것이었죠. 그러나 뭉크는 그런 툴리를 부담스럽게 여기고 파혼을 하게 됩니다. 이 일을 겪은 후 뭉크는 <인생이 춤>을 그리게 됩니다.
뭉크가 생각한 인생이라는 춤은 어떤 내용일까요? 그림 속 저 멀리 바다를 배경으로 하늘에는 달이 떠 있습니다. 달빛은 첫사랑과 만났던 그 해변의 달빛처럼 해안가 쪽까지 들어와 있네요. 해변가 부근의 잔디밭에서 사람들이 춤을 추고 있습니다. 가운데 있는 남자가 뭉크 자신입니다. 붉은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은 밀리로 보입니다. 밀리는 붉은색 드레스로 뭉크의 발을 휘감으며 뭉크를 잡아두고 있습니다. 양쪽에 있는 흰색옷과 검은색 옷을 입은 여인인 툴라입니다. 툴라는 두 명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왼쪽에 있는 흰색 옷을 입은 여인은 꽃을 꺾기 위해 다가서고 있습니다. 그리고 왼쪽에 있는 검은색 옷을 입은 여인은 멈추어 있습니다. 한 명은 꽃에 다가가려 하고 있고 한 명은 인생에서 소외된 듯한 인상을 줍니다. 뭉크에게 인생이란 기다림과 소외, 사랑과 이별,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이 극단의 정서가 함께 존재하는 하모니였던 것 같습니다.
다시 사랑하기 위해
뭉크에게 여성은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이는 뭉크 자신의 불안 한 정서를 투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불안정 애착을 가진 사람들은 타인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에 자신도 누군가를 사랑하기 어려워합니다. 뭉크는 관계를 통한 애정과 사랑을 느끼기가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사랑을 두려워하는 경우는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별의 상처가 크기에, 혹은 이별에 대한 두려움으로 사랑을 시작하기 어렵게 합니다.
저도 저를 매혹하는 것에는 불안을 느끼는 편입니다. 새로운 일,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데 어려움을 느낍니다. 왜 그런 어려움을 느끼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상처받았던 경험으로 인한 내면의 경고 때문입니다. 저는 젊은 시절에는 꽤나 열정적인 편이었습니다. 감정을 숨기지 않고 표현하다 보니 실수를 하게 되고 오해를 받을 일도 많았습니다. 그렇게 관계에서 상처를 얻다 보니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하는 방어기제가 과하게 작동될 때도 있었습니다. 나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였지만 관계를 막는 장벽이 되어 버렸던 것이지요.
친밀함이라는 것은 뭉크의 <키스>처럼 지나치게 가까워질 수 도 있는 상태일 겁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강하게 밀착되어 있기에 조심하지 않으면 상처를 주거나 상처받게 되는 관계가 되는 것이지요. 너무 친밀하지만 너무 위험해져 버리는 것입니다. 친밀함은 너무나 많은 위험을 가지고 있기에 내면에서는 조심하라는 경고를 계속 보내게 됩니다. 또한 관계는 혼자가 아닌 둘이기에 예측과 조절은 더욱 어렵다고 느껴집니다.
그래서 사랑은 위험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사랑한다는 것은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입니다.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모를 불확실성과 그 모호함을 온몸으로 껴안아야 하는 일입니다. 어쩌면 새로운 모험을 하는 것은 불안마저 껴안아야 하기에 '사랑'이 아니면 어려운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직 사랑할 때 만이 불안을 껴안고 새로운 경험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만을 의미지 않습니다. 좋아하는 친구, 좋아하는 일, 내가 욕망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는 그림을 그리고, 사랑하는 글을 쓰는 고, 사랑하는 책을 읽는 것. 내가 매혹된 그 모든 것을 말합니다.
뭉크는 연인과의 관계에서는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떠나간 연인에게 받은 상처가 툴라를 통해서도 치유되지 못했으며 오히려 자신은 연애를 하기 어렵다는 절망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뭉크는 이러한 상처를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킵니다. <생의 프리즈>라는 연작을 만들기로 결심하게 된 것이죠. 뭉크는 자신의 경험을 하나하나 그림으로 그리고, 그림이 품은 의미를 발견해 갔습니다. 그리고 평생토록 예술 작품에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뭉크는 하나의 사랑을 잃었지만 다른 사랑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뭉크의 바람대로 뭉크의 작품을 보며 각자의 삶을 돌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인생의 춤>에서 어떤 인물에게 가장 마음이 가시나요? 사랑이 남긴 상흔에 아직 머물러 있나요? 누군가에게 다가서기 위해 조심스러운 한 발을 내밀고 있나요? 아니면 아직도 사랑을 망설이며 머뭇거리고 있나요?
저는 사랑의 상흔보다 사랑이 남긴 '기쁨'을 더 많이 기억하려고 합니다. <인생의 춤>에서 기쁘게 춤을 쳤던 그 감정을 잡아두려고 애써봅니다. 기억은 편집되고 해석되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슬픈 기억도 있지만 기쁜 기억도 많이 저장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삶을 돌아보며 슬픈 기억은 그대로 안아주고, 기쁨 기억 역시 외면하지 않으려 합니다. 지난 과거의 이야기들은 저만의 이야기로 재편집되어 간직해 두려고 합니다. 지난 시간의 사랑이 슬픈 멜로드라마였다면, 이제는 코믹 액션 멜로로 편집되어 가고 있습니다. 과거에 있었던 사건이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기억이 어떻게 편집될지는, 과거가 기억이 오늘 현재의 삶에서 어떻게 재생될지는 편집자인 자신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