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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주 Sep 01. 2023

뭉크(4) '죽음'을 통해 보여주는 '삶'

'너의 죽음'을 통해 알게되는 것들

죽음에 대한 탐구는 삶에 대한 탐구였다.

나는 날마다 죽음과 함께 살았다. 나는 인간에게 치명적인 두 가지 적을 안고 태어났는데, 그것은 폐결핵과 정신병이다. 질병, 광기, 그리고 죽음은 내가 태어난 요람을 둘러싸고 있던 검은 천사들이었다.
- 뭉크 -



프랑스의 철학자 장켈레비치(1903-1985)는 죽음을 세 가지 종류로 말했습니다. 그것은 1인칭의 죽음, 2인칭의 죽음, 3인칭의 죽음입니다. 1인칭의 죽음은 '나'의 죽음입니다. 나의 죽음은 미리 경험할 수 없는 것이며 알 수 없는 것입니다. 2인칭의 죽음은 '너'의 죽음입니다. 가족, 친구, 이웃 등의 가까운 지인의 죽음을 입니다. 3인칭의 죽음은 '제3자'의 죽음입니다.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지 않은 타인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나의 죽음, 너의 죽음, 그리고 제 3자의 죽음 중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은 '너의 죽음'입니다. '너'의 죽음을 통해 큰 상실과 슬픔을 겪게 되기 때문입니다. 너의 죽음을 통해 비로소 나의 죽음을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뭉크는 '너'의 죽음을 누구보다 강렬히 경험한 예술가입니다. 그리고 누구보다 '심원한 슬픔'을 잘 표현할 수 있었던 예술가입니다. 



'너'의 죽음에 대한 탐구


뭉크 <병든 아이> 1885-1886, 캔버스에 유채, 120X118.5cm,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미술관


뭉크의 죽음에 대한 그림은 <병든 아이>로 시작됩니다. 뭉크의 어머니는 뭉크가 5세 때 결핵으로 사망을 하고, 누나 소피는 뭉크가 13세때 결핵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그림 속에 누나는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며 침대에 기대앉아 있습니다. 누나의 얼굴 뒤에 있는 하얀 베개가 마치 후광처럼 그녀의 얼굴을 더욱 강하게 비추고 있으며, 소녀 그 옆에는 뭉크 가족을 돌보아 주던 헬렌 이모가 얼굴을 떨구며 비통해하고 있습니다.


뭉크는 동일한 심상이나 모티브를 반복해서 그리곤 했습니다. <병든 아이>도 40년간 반복해서 그린 주제입니다. 뭉크는 "어느 화가라도 작품 주제에서 내가 <병든 아이>에서 체험한 것과 같은 심원한 슬픔을 느끼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며 이 주제에 매우 몰입했습니다. 뭉크는 아픈 이들의 그림을 그리면서 그림 속 대상을 제 3자의 죽음처럼 관조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이 사랑했던 이들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연민했습니다. 사라져 가는 생명을 보며 안타까워했습니다. 자신이 사랑했던 모든 이들을 바라보는 애절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뭉크 <죽은 자의 침대> 1895, 하드보드 위 파스텔, 60 X 80cm, 오슬로 뭉크미술관


<죽은 자의 침대>에서는 망자가 흰색 이불로 업혀 있어 강조되어 있습니다. <아픈 아이>에서 아픈 아이가 강조된 것처럼, 죽은 생명에 환하게 빛을 주고 있습니다. 반면 오른편에 있는 가족들은 살아 있지만 검은 그림자 속에 숨어 있습니다. 살아 있지만 살아 있지 않은 것 같이, 몸에 난 구멍으로 겨우 숨을 쉬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습니다.


<죽은 어머니와 아이> 1899-1900년,  캔버스에 유채, 99 x 90 cm, 독일 쿤스트할레


<죽은 어머니와 아이>에서는 침대 위에 사망한 어머니가 누워있고, 침대 앞에는 어린 소녀가 귀를 틀어막으며 사람들이 슬퍼하는 울부짖음을 듣지 않으려 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는 수평으로 누워있고, 소녀는 수직으로 서 있습니다. 죽음과 삶, 수평과 수직, 어둠과 밝음 이 둘 간의 대립과 긴장감은 뭉크의 작품에 계속 반복하여 나타납니다.


뭉크 <병실에서의 죽음> 1893, 캔버스에 유채, 134.5 x 160 cm, 오슬로 뭉크미술관


<병실에서의 임종>에서는 그림의 주인공이 주인공은 죽은 자에서 산 자로 이동됩니다. 죽은 자 보다는 '너'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을 그리게 됩니다. 침대 옆에서 간절히 기도를 드리고 있는 사람은 환자의 아버지로 보입니다. 여자들은 의자에 앉아서 고개를 떨구며 슬퍼하고 있고 서 있는 사람들도 서있기가 어려워 몸을 벽과 의자에 기대고 있습니다. 좁은 방 안에서의 고립감을 통해 '너'의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의 슬픔을 보여줍니다.


'너'의 죽음은 고통스럽습니다. '너'를 통해 내가 알았던 한 세계가 함께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너'와 함께 했던 그 세계가 사라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너'를 통해 사랑받았던 '나'도 같이 상실되기 때문입니다. 뭉크는 가족들의 죽음에서 사랑받았던, 사랑했던 수많은 '나'의 상실감을 경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너의 죽음은 '나'의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뭉크는 가족의 죽음을 지켜보며, 자신 또한 죽을 수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립니다.




그림자가 두렵다. 나는 죽은 자들을 데리고 살아간다. 어머니, 누나, 아버지 등등. 모든 추억이 세세한 부분까지 되살아난다. 두렵다.
- 뭉크 -




'나'의 죽음에 대한 탐구


'너'의 죽음은 '나'의 실존에 대한 두려움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래서 '나'의 죽음에 한 두려움은 죽음 그 자체보다도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에 압도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뭉크의 말년의 삶에서도 죽음에 대한 심상은 계속 등장합니다.


뭉크  <자화상, 시계와 침대 사이에서> 1940-42년, 캔버스에 유채, 149.5 X 120.5cm, 오슬로 뭉크 미술관


뭉크는 말년에 오슬로 외각에 있는 저택에 은둔한 채 지냈습니다. 그런 그와 함께 했던 것은 죽음이었습니다. <자화상, 시계와 침대 사이에서>의  오른편에 왼편의 시계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에 대한 압박을, 오른편에 있는 침대는 자신이 죽어 누일 자리를 의미합니다. 침대가 죽음이라면 여전히 흘러가는 시계는 삶입니다. 수평의 침대, 수직의 시계 옆에 뭉크도 서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도 죽음과 삶이 수평과 수직의 구도로 대립되며 나타납니다.


뭉크 <창문 옆에서> 1940년, 84 x 107.5 cm, 오슬로 뭉크 미술관


<창문 옆에서>도 삶과 죽음의 대비가 분명히 보입니다. 창문 뒤편의 마른 나뭇가지 위에는 눈이 소복이 쌓여 있습니다. 나무는 봄의 기대를 지나, 여름의 찬란함을 넘어, 가을의 풍요움을 끝으로 모든 영광을 내려놓는 겨울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아직 새로운 계절이 시작되기 전입니다. 나무는 홀로 있지만 개의치 않습니다.  눈이 하얗게 쌓여 있지만 춥지 않습니다. 또 다른 봄이 올 테니까요, 또 다른 태양이 떠오를 테니까요. 자연은 이러한 순환을 아니까요. 그런 자연 옆에 뭉크가 있습니다. 이목구비는 이전 그림과는 달리 분명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으며 눈을 또렷합니다. 마치 '난 이 순간 살아 있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죽음이 나를 찾아올 테지만 나는 지금 이 순간 서 있다.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다'.라고 말입니다.  


뭉크가 죽음에서 발견한 것은 바로 이런 '지금 살아있음'이 아니었을까요? 죽음이 올 테지만, 너도 죽었고, 나도 죽을 테지만, 이 순간 난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 그것이지 않았을까요. 수평으로 가려는 압박 속에서도 생명은 수직으로 솟으며 대립하고 있습니다. 죽음의 심상 옆에서도 삶은 계속 서 있으려 하고 있습니다. 뭉크의 의지, 생을 향한 의지, 그런 약동은 죽음의 자욱이 가득한 그림에서 조차 지속적으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탐구는 곧 '삶'에 대한 탐구


뭉크 <태양> 1916, 455X780cm, 오슬로 대학


오슬로 대학 강당에 그려진 벽화 <태양>입니다. 노르웨이의 긴 겨울 끝에 떠오르는 봄의 첫 태양입니다. 노르웨이는 여름내내 해가뜨는 백야 현상이 있지만 겨울에는 해가 뜨지 않고 밤이 지속되는 극야 현상을 보입니다. 해가 없는 겨울이 끝나고 난 뒤에 만나는 첫 때양. 삶의 절망 끝에서 만나는 희망, 어둠 속에서도 생존해 있던 태양, 아니 존재했지만 그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그 태양이 이글 타오르고 있습니다. 태양이 저리 빛나는 것은 보는 사람의 마음의 의지의 반영이기도 할테지요. 


뭉크는 공공미술 작업을 통해 개인적 경험에서 공적인 관심사, 인류와 민족, 역사, 희망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개인 내면의 심리를 탐색을 해오던 뭉크는 점차 외부로, 세상으로, 세계로 관심을 확장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런 <태양>을 노르웨이 국민들은 열광하게 됩니다. 


<태양>의 그림에서도 바다이 수평이 보입니다. 삶은 수평을 향해 갑니다. 그러나 다시 태양이 솟아오릅니다. 그 태양을 본 순간 우리는 살아 있음을 느낍니다. 그렇습니다. 삶은 '순간'으로 구성됩니다. 순간이 모여 하루가 되고 하루의 시간이 모여 삶이 됩니다. 때론 상실의 고통이 오더라도, 알 수 없는 불안이 오더라도, 우연히 사랑의 기쁨이 찾아오더라도 그러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살아 있는 이 순간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뭉크의 죽음에 대한 탐구는 바로 이 순간에 대한 탐구, 삶에 대한 탐구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내 썩은 몸에서 꽃이 피어나고, 나는 그 안에 있다. 그것이 영원이다.
-뭉크-






처음 뭉크에 대한 시리즈를 시작했을 '죽음'에 대한 글을 가장 먼저 쓰려고 했습니다. 죽음은 뭉크의 작품의 전체에 영향을 끼친 중요한 주제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을 가장 마지막으로 미뤄두었습니다. 글을 쓰는 내내 뭉크가 평생을 천착했던 '죽음'을 마음속에 계속 담고 가보려고 했습니다. 뭉크에 대한 글을 쓰는 내내 어떤 글에서도 죽음의 모티브가 빠진 적이 없습니다. 사랑 속에서도 불안 속에서도 모든 삶 속에 죽음이 늘 있었습니다. 


뭉크에게 죽음은 '파멸' 그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뭉크는 죽음을 그림으로써 고통스러운 기억을 담아내고, 휩쓸리는 감정을 조절하려고 했습니다. 두려운 감정을 그림으로써 두려운 감정을 잊을 수 있었습니다. 불안을 그림으로써 불안을 잊을 수 있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순간, 몰입하는 그 순간만은 죽음으로 잠식된 자아가 죽었던 것입니다. 뭉크는 이러한 자아의 죽음을 통해 새로운 예술을 창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뭉크의 작품에서 죽음은 창조의 에너지로 전환됩니다. 삶을 사는 에너지로 전환됩니다. 뭉크의 '죽음'은 우리에게 삶을 선물합니다. 삶에서 느끼는 감정. 슬픔과 기쁨, 불안과 우울이라는 섬세한 감정을 잊지 않고 직면할 수 있는 예민한 감수성을 선물합니다. 우리가 뭉크의 그림 앞에 공감한다면, 뭉크의 감정에 같이 진동한다면 그 순간 뭉크를 만난 것입니다. 뭉크의 에너지가 우리의 삶을 수직으로 세워 올리는 순간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에 대해 생각하는 일과 같습니다. 뭉크의 그림을 보며 살아있는 것의 마지막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게 사라질 인생, 그렇게 끝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삶을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꽃이 진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꽃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아이가 어른이 되어 독립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지금 내 옆에 있는 이 순간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이 언젠가는 끝이 나 버린다는 것을 알았을 때 지금 내게 있는 사랑을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이 하루가 끝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오늘 하루를 더욱 열심히 살아가게 합니다. 내 인생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자신이 진정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됩니다. '죽음'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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