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감동스러운 것은 넘어설 수 없는 이원성이 존재자들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이 이원성은 끝까지 지울 수 없는 관계이다. 이러한 관계는 그 사실 자체로 타자성을 마비시키기는커녕 오히려 타자성을 보존한다....타자로서의 타자는 여기서 우리 것이 되는, 또는 우리 자신이 되는 그러한 대상이 아니다. 타자는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신비 속으로 물러선다.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
레비나스의 ‘타자’는 어렵다. ‘주체’를 배제한 이원적 ‘타자’. 내 손에 거머쥘 수 없는 ‘타자’이기 때문이다.
타자는 나와 공동의 존재에 참여하는 존재도 아니고, 나와 유사하다고 인식하는 공감과도 다른 아닌 '신비'이다. 타자는 나의 일부로 융합되지도, 상호적이지도 않은 소유할 수도 인식할 수도 그 의미를 장악할 수도 없는 신비이다. 이해하기 어렵다.
난 공통개념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왔다. 나와 같은 취향, 나와 같은 관심, 나와 비슷한 성향. 그런 사람들에게 끌리고 그런 사람들과 있는 것이 편했다. 나와 '다름'이 있는 대상에게조차 나와 '같음'을 찾았다. 나와 같은 인간이며, 나와 비슷한 사회적 훈육을 받은 존재로 생각했다. 이렇게 '같음'을 발견하면서 이질성을 극복해 나갔다. 그렇게 하면 그와 나의 '다름'은 작게 축소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다름'은 끝까지 불편함이었다. 그 '다름'이 타자의 개별성 일 테지만 그 '다름'은 늘 관계의 어려움이었다.
어떻게 나와 다른 타자와 이원성을 유지한 채 관계할 수 있는가? 어떻게 나의 일부도 아닌, 나와 상호적이지도 않은 이원적 타자가 나의 미래를 구성하는 것일까?
호아킨 소로야 <어머니> 1895년, 캔버스에 유채, 169 x 125 cm
상호적이지 않은 사랑은 가능할까
한 편의 시가 생각났다. 이해하기 어려운 시. 내게는 타자 같은 시. 아직은 내 삶이 살아내지 못했기에 이해하지 못했고, 그래서 위로받지 못한 시 한 편이 있다.
<아침 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 베르톨트 브레히트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이 시에서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당신은 내게 '필요'하다고 말한다. 사랑은 상호적인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그가 “사랑해요”라는 말 대신 “필요해요”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정신을 차린다. ‘나’는 작은 빗방울 까지도 조심하며 길을 걷는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삶을 조심하여 살아간다. 그가 필요로 한 것을 주기 위해, ‘나’는 살 이유를 찾는다.
이 시를 읽고 답답해졌다. 나는 이 시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상호적이지 않은 사랑이 가능한지. 그런 사랑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또한 내가 그동안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사랑이 아닌 것 같았기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난 그저 상대가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내가 위로받기 위해, 내가 혼자 있지 않기 위해, 내가 인정받기 위한 마음을 사랑한다고 말해왔던 것은 아닐까? 필요했기에 참아주고 이해해 주고 들어주고 안아주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니 다시 내게 "사랑해요"는 말을 돌려받지 못해 슬펐던 것이 아닐까? 나는 과연 “사랑한다”는 말을 돌려받지 못하더라도 그저 “필요해요”라는 사람에게 내 온몸을 다 바칠 수 있을까?
이 시를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쓴 <인생의 역사>에서 찾게 되었다. 글을 쓸 당시 갓난아이를 키우고 있었던 저자는 아이를 돌보는 마음에서 이 시의 화자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고 했다. 그랬다. 부모는 자식을 살리기 위해 천근 같은 몸을 이끌고 직장으로 가고, 출퇴근 길에 차를 조심하며, 부끄러운 부모가 되지 않도록 함부로 살지 않는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는 그 모든 순간에도, 자식이 "사랑해요" 라고 말하지 않는 순간에도, 그저 필요로 하는 것 만으로 자신을 내어 준다.
타자와 맺는 가장 고귀한 사랑은 '어머니 같은 사랑'이다. 그러나 세상은 어머니의 헌신적 사랑을 희생으로 만들고 그들을 연민하곤 한다. 하지만 어머니들이야 말로 '타인만족'을 통해 '자기만족'을 추구한 사람들이 아닌가. ‘주체'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어머니의 사랑을 깎아내린 것은 아닐까? 어머니 자신도 ‘주체'적이지 못했다는 생각에 자신의 사랑에 자부심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침대에서>, 1893년, 마분지에 유채, 54X70.5cm,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
타자를 통한 행복은 가능할까
한국의 여성주의 미술의 대모라 불리는 윤석남 작가는 40 넘은 나이에 미술을 시작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한 삶에 큰 상실감을 느꼈던 것이다. 중산층 여성의 공허감이었다. 그녀가 처음 그린 그림의 주제는 어머니였다. 그녀는 어머니의 삶을 안타까워했다. 여성이 처한 사회적 현실, 그 속에서 희생한 어머니를 미술작품으로 그리고 그리고 또 그렸다. 그러던 어느 날. 윤석남 작가는 문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어머니의 헌신에 사랑이 없었더라면 과연 그것이 가능했을까?' 어머니가 단순히 어머니라는 역할 때문에 헌신한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았던 것이다. 어머니의 헌신은 사랑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어머니 또한 자식을 통해 기쁨을 느꼈으며, 자식을 돌보기 위해 자신을 돌보았을 것이다.
나는 언제 가장 나를 잘 돌보았을까? 아이를 임신했을 때다. 오직 아이를 위해 먹고 숨 쉬고 잤다. 결혼 5년 만에 어렵게 한 임신이었기에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아이만을, 오직 아이만을 생각했기에 위험한 일은 알아서 피했으며, 오직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먹고, 좋은 소리만 들으려고 애썼다. 그때처럼 행복할 때가 없었다.
7개월 만에 양수가 터지던 날 바로 휴직절차를 밟았다. 인수인계도 없이 병원으로 떠나버렸다. 산도가 열렸지만 통증이 없었기에 평소에 회사형 인간으로 살았던 나 같았으면 꾹 참고 인수인계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과는 다르게 회사에서의 책임과 의무는 뒤로한 채 그냥 나가 버렸다. 지금 중요한 것은 오직 아이였기에 나중에 욕먹을 각오를 했다. 아니 훗날 생각은 아무것도 나지 않았다. 오직 아이 생각만 했다.
아이를 키우는 몇 년은 감기 한번 안 걸렸다. 아파도 누울 수가 없었다. 아이 돌 무렵에 엄마가 돌아가셨지만 마냥 슬퍼할 수도 없었다. 아이를 돌보는 어머니는 아플 수도 무기력할 수도 없다. 나는 살아야 했다. 그런 힘은 사랑하는 이를 통해 나온다. 그가 나를 필요로 하니 말이다.
이 일을 처음 떠올렸을 때 나는 고작 타인이 있어야 나의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나는 스스로 행복할 수가 없어서 타인을 통해야만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라고 생각하며 나를 폄하했다. 지금 생각하면 이 역시 강한 주체의식 때문인 것 같다. 내가 느낀 행복은 분명 나의 행복인데 말이다. 어쩌면 이 ‘주체'라는 개념이 사랑을 파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모성애적 사랑, 다름과 상호성마저 뛰어넘는 사랑
어머니는 강하다. 이 말은 여성에게 사랑과 헌신을 강요하는 말이 아니다. 물론 이 말이 가부장제 사회가 부여한 성역할을 충실히 했을 때만, 결혼한 여성 그것도 아이를 낳은 여성만을 주류에 편입시 시키기 위해 이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말은 모성 이데올로기로 설명되어서는 안 된다. 대신 이 말을 수정되어 사용되어야 한다. 어머니는 강하다. 오직 사랑할 때 그렇다.
사랑하지 않는 어머니는 약하다. 불안에 잠식된다. 자식이 너무 소중하면 소유물로 생각하게 된다. 잃을까 봐
두려워하며 집착한다. 통제하며 불안해한다. 자식에게 자신을 투사하는 어머니는 불행한 사랑을 한다. 자신이 살고 싶은 삶을 자식에게 투사한 어머니는 자식을 은밀히 조종한다. 자신의 그림자를 투사한 어머니는 자식을 미워한다. 이들은 자기 자신을 자식에게 주입시키고 자식을 통해 자신을 보려고 한다. 그들은 자기의 사랑을 알아주기를 누구보다 간절히 원한다.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 한다. 너를 통해 자신을 확인하려 하기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그런 사랑은 사랑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소유하려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손에 쥐려고 하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부모가 자식을 자신의 일부로써, 자신의 연장으로써 자식을 본다면 그것은 자신의 일부를 사랑하는 것이지 타인으로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타자 속에 있는 자신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사랑하지 않았기에 돌아올 사랑도 없는 것이다. 자식의 ‘다름’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자신의 ‘다름’을 이해받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저 인정받는, 확인받기 위한 사랑을 했기 때문이다. 내가 인정받기 위한 사랑은 주었다면 타인도 자신이 인정받기 위한 사랑만 하려고 할 것이다. 타인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사랑을 하지 않았기기에 그러기 위해 자신을 돌보지 않았기에 비애가 찾아온다.
실로 위대한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이다. 진정한 어머니의 사랑이다. 자식을 타자로 인식하는 사랑이다. 나의 일부가 아닌 나와 다른 타자로 인식하는 사랑이다. 타자로서의 네가 필요로 한다면 그것을 주려고 애쓰는 사랑이다. 그것을 주기 위해 사랑하는 이의 필요를 위해, 자신을 돌볼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랑. 그런 사랑이야 말고 강하고 위대하다.
그러나 어머니가 자식을 타자로써 사랑하는 것은 그 어떤 사랑보다 어렵다. 어머니는 자식과 한때 융합된 사이였기에 아이가 더 이상 연약하지 않은 상태로 성장했지만 계속 돌봐주려고 한다. 소유하고 장악하려고 한다. 그러나 육아는 자녀는 독립시키기 위한 과정이 아닌가. 자녀가 성장하여 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어머니는 자녀에게서 멀어질 수 있어야 한다. 진정한 어머니의 사랑은 자녀와의 정서적 분리가 이루어질 때 가능하다. 아이가 "필요해요"라고 말하는 순간에도 "사랑해요"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조셉 로루소 <연인과 로트렉>
타인을 사랑하는 일은 결국 자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일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아침 저녁으로 읽기 위하여>는 시인이 연인에게 써서 준 편지의 일부분이다. 여기서 ‘나’는 연인을 말하고 ‘당신’은 브레히트다, ‘너’와 ‘나’가 바뀐 문장을 쓴 것이다. 처음 이 사연을 알게 되었을 때는 브레히트가 연인을 이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브레히트는 여러 명의 여자들과 동시에 연애를 했고 그의 연인들은 다른 여자가 난 자식까지 함께 키우며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수업 후기를 쓰는 지금에 와서 기존에 들었던 생각을 수정되었다. 브레히트는 이 글을 써준 그 연인을 진심으로 아꼈던 것 같다. 나는 네가 필요하니 너의 몸을 아끼라는 것 아닌가. 너를 잘 돌보며 살라는 말 아닌가. 이 글을 아침저녁으로 읽으며 마음에 새기라는 것 아닌가. 결국 너를 사랑하는 것은 자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일이라는 것을 이 시는 말해주고 있다. 아이를 사랑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라는 것을 이 시는 말해 주고 있다. 레비나스는 타인을 사랑하는 일이 결국 자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난 자식을 키우면서 겨우 타자를 통한 사랑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소유욕이 강한 어머니였다. 아이에게서 나를 보곤 했다. 아이의 성실하고 정직한 태도에서 나의 도덕성을 보았다. 아이의 자유롭고 무절제함에서 나의 욕망을 보았다. 아이의 충동은 나의 불안이 되었다. 그래서 불안하고 통제하려고 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들어 있는 나를 보고, 아이를 통해 나를 사랑하고, 아이를 통해 욕구를 통제하려고 했다. 아이게서 나의 모습을 보는 것은 아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 아이를 사랑하는 것은 타인으로써의 사랑이다. 나의 '다름'을 사랑해야 한다.
아이가 사춘기가 되면서 '다름'을 더욱 강하게 드러내려고 하고 있다. 때로는 과장되게 때로는 은밀하게 드러낸다. 나는 좀 더 먼 거리에 있으려고 한다. 어린 시절의 연약했던 아이를 대하는 방식으로는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소유하고 장악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도 안된다는 것을 안다. 나는 이 어려운 과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싶다. 그리고 이 수행이 좀 더 확장되길 바란다. 모성애가 아닌 모성적 사랑으로써, 타자를 향한 사랑으로써 확장시키고 싶다. 낯선 아이, 낯선 사람, 낯선 그림, 낯선 글을 사랑하는, 진정한 사랑을 하는 어머니가 되고 싶다. 그럼으로써 나를 잘 돌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를 잘 돌볼 수밖에 없는 마음을 지니고 싶다.
이제 레비나스의 <타자>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세계 1, 2차 대전의 참상을 겪은 철학자는 알려준다. '다름'을 지배하려 하지 말라고, '다름'을 지배하려 할때 그것은 폭력이 된다고, 과도한 주체성으로부터 해방되어 '다름'을 사랑하라고, '너'를 이해하는 것이 '나'가 이해받는 것이라고, '너'를 살피는 것이 곧 '나'를 살피는 일이 될 것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