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희주 Oct 21. 2023

움켜쥠과 놓아줌

나희덕  <허공 한 줌>

 자녀가 중학생이 되면 부모님의 카톡 프로필 사진이나 휴대폰 배경화면이 아이의 어린 시절 사진으로 바뀌는 것을 종종 목격한다. 아이가 초등학교때 까지는 최근 찍은 사진을 올리다가도 중학생이 되면 프로필 사진이 유아기로 돌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물어보면 사춘기를 지나 너무 변해버린 아이를 보면 어린 시절의 아이의 모습이 그립다고 한다. 내가 사랑하던 그 아이가 그립다고 말한다. 그리고 아이를 사랑했던 그 시절의 자신의 마음이 그립다고 말한다.


사랑은 변한다. 부모자식 간의 사랑도 변한다. 아니 모든 사랑이 변한다. 사랑은 생생히 살아있는 것이기에 변할 수밖에 없다. 살아 있는 것은 변질되며 죽음을 맞이한다. 변하지 않은 것은 인공물뿐이다. 조화는 변하지 않는다. 시들지도 죽지도 않는다. 우리의 사랑은 생생히 살아 있는 꽃과 같기에 변화는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다.


사랑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을 때 강하게 붙잡고 싶어 진다. 사랑했던 시간의 소중함을 알기에 너무나 간절해진다. 이전처럼 얼굴 만지고 싶고, 몸을 비비며 안아주고 싶다. 지금은 잠자는 아이들 방 문을 몰래 열고 머리카락을 슬쩍 한번 쓸어 주고 나오는 일이나 가능할까. 그나마 이마저도 얼마나 더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이들은 자라나고 있도 저마다 다른 필요가 생겨나고 있다. 존의 사랑이 시들고 다른 사랑으로 변화하고 있다. 기존의 사랑이 죽고 새로운 사랑이 자라고 있다.


로댕 <동굴 속의 젊은 어머니>, 필라델피아 로댕 미술관





사랑은 소중한 것이다. 내게 기쁨을 주기에 중요하고 귀한 것이다. 그러기에 그 사랑을 놓고 싶지 않다. 꽉 붙잡고 싶다. 그러나 변해가는 사랑을 꽉 붙잡고 싶다고 해서 그 사랑이 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죽음과 같은 숙명은 피할 수 없는 일처럼, 변하는 사랑도 마찬가지다. 내 손에 꼭 쥔 소중한 것을 놓아주어야 할 때가 있다. 간절히 붙잡고 싶은 그것을 놓아야 할 때가 있다.


나희덕의 시 <허공 한 줌>은 사랑의 강한 움켜쥠과 놓아줌에 대해 모성의 사랑을 빗대어 말한다.


< 허공 한 줌 > - 나희덕

이런 얘기를 들었어. 엄마가 깜박 잠이 든 사이 아기는 어떻게 올라갔는지 난간 위에서 놀고 있었대. 아기가 모르는 난간 밖은 허공이었지. 잠에서 깨어난 엄마는 난간의 아기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이름을 부르려 해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어. 아가,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엄마는 숨을 죽이며 아기에게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어. 그러고는 온몸의 힘을 모아 아기를 끌어안았어. 그런데 아기를 향해 내뻗은 두 손에 잡힌 것은 허공 한 줌뿐이었지. 그 순간 엄마는 숨이 멈춰버렸어. 다행히 아기는 엄마 쪽으로 굴러 떨어졌지. 죽은 엄마는 꿈에서 깬 듯 우는 아기를 안고 병원으로 달렸어. 아기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 말고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울음을 그치고 아기는 잠이 들었어. 죽은 엄마는 아기를 안고 집으로 돌아와 아랫목에 눕혔어. 아기를 토닥거리면서 그 옆에 누운 엄마는 그 후로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어. 죽은 엄마는 그제야 마음 놓고 죽을 수 있었던 거야.

이건 그냥 만들어낸 얘기가 아닐지 몰라. 버스를 타고 돌아오면서 나는 비어 있는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어. 텅 비어 있을 때에도 그것은 꽉 차 있곤 했지. 수없이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그날 밤 참으로 많은 걸 놓아주었어. 허공 한 줌까지도 허공에 돌려주려는 듯 말이야.      


  이 시를 한 번에 읽어내기가 어려웠다. 설마 우려했던 일이 일어났을까 봐 마음을 조리며 읽었다. 아이를 잃을 것 같은 공포의 순간을 기억한다. 아이가 유치원 때, 메고 있던 가방의 무게에 쏠려 계단아래로 굴러 떨어진 일이 있었다. 함께 길을 걷던 중 갑자기 달음박을 치던 아이가 시야에서 한참 동안 사라진 일도 있었다. 내 손을 놓은 아이가 보이지 않던 그 순간에는 내 숨이 멈춰버린 것 같았다. 아니, 멈춰버린 것은 내가 아니라 세상인 것 같았다. 모든 호흡이 멈춘 진공의 세상을 나 홀로 아우성치며 헤매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때의 절절한 감정이 떠올라 <허공 한 줌>을 조금씩 천천히 마음을 졸이며 읽어 내려갔다. 시구에서 '다행히'를 발견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이 시의 내용은 너무나 놀랍다. 엄마는 아기를 구하기 위해 두 손을 내밀었지만 허공으로 떨어지는 아이를 붙잡지 못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아이는 무사했다. 엄마의 돌봄 없이도 아이는 살아남았다. 아이는 어떻게 무사할 수 있었을까? 엄마가 아니더라도 다른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무언가의 힘으로 살았다. 


그러나 엄마는 아이의 생존을 확인하지도 못한 채 숨이 멎는다. 아이의 위험 앞에 너무 놀라버려 심장이 멎은 것이다. 그러나 놀라운 이야기는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죽은 엄마는 죽어서도 아이를 포기하지 않는다. 죽어서도 죽지 못하고 아이를 위해 달린다. 아이를 꼭 안고 달린다. 허공을 잡은 것을 후회하며 아이를 안고 달린다. 그리고 아이가 잠든 것을 확인한 엄마는 그제야 온전히 죽는다. 


이 시의 첫 연에서는 마음 졸이는 놀라운 사건들을 통해 어머니의 절절한 사랑을 보여준다. 사랑하는 이는 소중하다. 그래서 움켜쥐고 싶다. 너를 위해서 움켜쥐고 싶다. 너무 소중한 것, 내 목숨과도 같은 것이기에 그렇다. 비록 너 대신에 잡은 것이 허공 한 줌이라도 놓고 싶지 않다. 손에 꽉 쥐고만 싶다. 


두 번째 연에서는 그 절절함을 놓는 것에 대해 말한다. 허공 한 줌에 가득 찬 것을 바라보며 허공에 여러 번을 놓아준다고 말한다. 손에 움켜쥔 '허공 한 줌'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내 손에도 가득 찬 것은 무엇일까? 비어있을 때조차도 꽉 차 있던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꽉 찬 것을 놓아주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로댕 <대성당> 1908년, 석고, 파리 로댕박물관





  10여 년 전 엄마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병원으로 가는 2시간이 그토록 고통스러울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힘을 내어 달라고, 몇 분이라도 제발 살아 있어 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내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엄마는 이미 임종하신 후였다. 내가 전화를 받았을 때는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 온 연락인 것이었다. 내가 병원에 오는 길이 힘들까 봐 아버지는 엄마의 임종사실을 숨기셨던 것이다. 엄마는 죽어서도 죽을 수 없었다. 딸이 자신에게 도착하기까지 엄마는 죽었어도 죽을 수 없었다. 아직도 온몸이 따듯한 엄마의 몸을 붙들고 하염없이 울었다. 보내드릴 수가 없었다. 허공으로 사라져 간 엄마를 잡을 수 없어 '허공 한 줌'만 쥐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애써 잡은 그 '허공 한 줌'도 놓아줄 수가 없었다. 악착같이 잡고만 싶어 졌다. 엄마의 온기, 엄마의 냄새, 엄마의 촉감을 붙들기 위해 엄마 위에 만 엎어져 버렸다.


그때 내가 놓지 못한 것은 엄마를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었을까? 엄마가 너무나 필요했기에 놓아주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엄마의 죽음이 갑작스러운 사고로 발생하기는 했지만 엄마는 죽음을 향해 가고 있었다. 산소 호흡기와 기도 삽관 장치 등 생존을 연장하는 기계를 온 몸에 감고 있었다. 난 엄마의 죽음 앞에 무기력했다. 그저 숨이라도 쉬고 있는 엄마를 최대한 오래 보고 싶었다. 내가 놓 못한 것은 엄마의 삶을 진심으로 아파하고 위하는 마음만은 아니었다. 소중한 엄마를 잃고 싶지 않은 집착도 있었다. 그랬기에 눈앞에 주검이 되어 있는 모습을 보고서도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꽉 쥔 집착은 소화되지 못한 돌덩이가 되어 오랜시간 마음을 짓눌렀다.


  소중한 사람이 있었다. 그에게는 어려움이 있었고 나는 그를 돕고 싶었다. 그에게는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만이 그를 온전히 이해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만이 그를 그 답게 대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 그가 나를 떠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상상할 수 없던 일이 일어났다. 그는 더이상 나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그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살아 있는채 죽은것 같았다. 그는 여전히 위태로워 보였지만 나는 아무런 도움을 줄 수가 없다. 나는 계속 허공 한 줌만 잡을 뿐이었다. 무력하게 애만 태울 뿐이었다.


난 또다시 '허공 한 줌'을 계속 움켜쥐고 있었다. 나는 너를 위로하며 필요한 사람이 되려고 했다. 그렇게 너를 붙들려 했다. 그렇게 '허공 한 줌'을 놓지 못하게 했다. 내가 '허공 한 줌'을 쥐며 심장이 멎어 버렸을 때, 너에게는 또 다른 가능성이 있었다. 나는 너의 또 다른 가능성을 놓치고 있었다. 너의 잠재성까지는 보지 못했다. <허공 한 줌>에서 엄마는 아기의 무탈함을 확인 순간 그제야 마음을 놓고 죽을 수 있었던 것처럼 나 역시 너의 안녕을 확인하고는 그제야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사랑했던 내 마음이 그제야 죽을 수 있었다.


  아이를 키우는 어미의 마음도 그렇다. 아이의 위태로움 앞에서 부모는 불안해하며 애를 태운다. 그러나 부모가 항상 아이를 위한 최선은 아닐 것이다. 부모의 사랑보다 더 많은 가능성이 세상에는 존재한다. 그것은 아이의 잠재성이기도 하며, 다른 무언가의 도움일 수도 있다. 아이는 친구를 만나게 될 것이며 좋은 스승의 돌봄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좋은 책과 좋은 그림이 아이의 삶과 함께 할 것이다. 


내가 아니더라도 아이가 가진 생명력을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아이가 가진 잠재성과 아이가 마주칠 수 많은 가능성을 믿어야 한다. 아이가 가진 생명력을 믿을 때 연약한 아이를 돌보던 부모의 지난 사랑은 죽을 수 있다. 그럴 때 너는 살고 나는 죽는다. 너의 새로운 삶은 생성되고 나의 지난 사랑은 죽는다. 그렇게 네가 살아야 나는 안심하고 죽을 수 있다. 






 내 빈 손에 들어 있는 것은 변해버린 사랑이었다. 지나간 시간의 소중했던 기억이었다. 그 기억이 현재에서 리플레이되길 원할 때 그것은 빈 손을 꽉 채우고 있는 것들이 된다. 허공 한 줌뿐이라도 꽉 잡은 채 놓고 싶지 않은 집착이 된다. 소중하다는 것은 가지고 싶은 마음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소중한 것을 놓아줄 수 있는 마음까지 일 것이다. 그 사랑의 다른 가능성을 믿으며 놓아줄 수 있는 것이 최전선의 사랑일 것이다. 


허공 한 줌 마저 허공 위로 날렸을 시인의 마음처럼 내가 꽉 움켜쥐고 있는 것들을 놓아주고 싶다. 소중했던 시간, 소중했던 기억, 소중했던 너, 그리고 함께 해서 행복했던 과거의 나마저 허공으로 날려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 소중했던 시간만큼 소중히 대하며 작별하고 싶다. 엄마를 보낸 그날처럼 울고 불며 생떼 쓰지 않고 담담히 보내줄 수 있으면 좋겠다. 많이 사랑했다. 행복했다. 고마웠다. 그리고 미안했다고 말하며 지난 시간을 놓아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나 무력하게 놓아주고 싶지는 않다. 악착같이 잡아서도 안 되지만 약해서 놓치고 싶지도 않다. 놓아주기 위해서는 잡고 있어야 한다. 잡고 싶은 소중한 것이 있어야 한다. 소중한 것을 진지하게 꽉 쥐려고 애쓸 때만 놓아줄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은 삶을 진지하게 꽉 움켜쥐어야 한다. 그래야 놓치지 않고 놓아줄 수 있다. 그래야 삶에서 받은 것들을 놓을 수 있다. 그래야 왔던 곳으로 잘 돌아갈 수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감정인식과 직업병 그리고 친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