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해를 정리하다 보니 기쁜 일과 슬픈 일이 비슷한 양으로 함께 있었다. 평생을 지킬 것이라 생각했던 신념이 무너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믿음이 자라났다. 오랜 신념조차 배신할 수 있는 것이며 그 배신을 통해서만이 새로운 믿음이 형성된다는 것을 알았다. 마치 개종을 하는 것 같이 어려우며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슬펐지만 기뻤다. 새로운 삶으로 가게 되었으니까.
신망이 두터웠던 인연과 이별했다. 그리고 새로운 인연을 만나게 되었다. 이별은 슬펐고 여전히 슬프다. 새로운 만남은 기뻤고 여전히 기쁨이다. 어쩌다 이런 불행한 일이 생겼는지 아프게 돌아보고 또 돌아보았다. 그러는 동안 또다시 고립될 위기에 처해지기도 했다. 이제는 슬픔인 것은 슬픔인 채로 두기로 했다. 그리고 기쁨은 기쁨인 채로 맞이하기로 했다. 슬프다고 기쁨이 오는 것을 막지 않을 것이며 기쁨이 있다고 해서 슬픔을 모른척하지 않기로 했다. 내게 온 것에 대해 올 때도 떠날 때도 소중히 대해야 함을 알게 되었다.
지나고 보면 매 순간이 만남과 이별의 반복이었다. 만남과 이별, 기쁨과 슬픔, 삶과 죽음은 매 순간 일어난다. 자연에는 밝음과 어둠이 함께 존재하며 이 둘은 순환한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다. 인간의 삶에 존재하는 기쁨과 슬픔도 함께 있으며 이는 순환된다. 미국의 추상화가 아서 도브(Arthur Dove, 1880-1946)는 삶의 밝음과 어둠이 순환하는 것을 자연의 모습으로 보여준다.
아서 도브, <일출Ⅲ>, 1937, 캔버스에 오일, 63×89cm
<일출Ⅲ>에서는 빛이 어둠을 밀어내고 있다. 노란빛에그어진 검은색 테두리는 더 크게 확장되고자 하는 빛의 의지를 강하게 드러내는 것 같다. 어둠이 캔버스 대부분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지만 곧 노란빛에게 자리를 내어줄 것이다. 일출은 그런 시간이니까. 밝음이 드러나는 시간이니까 말이다.
아서 도브, <일출> 1924, 패널에 오일, 46.4×53cm, Milwaukee Art Museum
<일출>에서는 빛을 산란하며 태양이 떠오른다. 밝음이 레이저빔처럼 터지는 순간이다. 빛이 저렇게 커지는 순간이 경이롭기도 하지만 때론 두려움이기도 하다. 자연의 폭발적인 변화나 타자의 성장은 경이롭게 바라보지만 나의 변화는 두렵다. 갑자기 환희에 터지는 순간에는 내가 터져버릴 것 같다. 어둠이 빛을 모조리 밀고 나가는 그 순간, 그 큰 변화의 순간을 잘 견뎌내고 싶다.
아서 도브, <일출, 노스포트 항구>, 1929, 캔버스에 오일, 38×51 cm
<일출, 노스포트 항구>처럼 조금 멀리서 바라보는 태양은 위협적이지 않다. 나의 변화도 항구반대편에서 바라보는 일출처럼 대할 수 있다면 좋겠다. 나와 거리를 둔 채, 그러면서도 그 빛을 온몸으로 느끼며 바라본다면 산란하는 빛이 좀 더 견딜 수 있는 것이 되지 않을까. 나를 너무 가까이 바라보면 내 감정에 휩쓸리고 만다. 지나친 자의식은 초점이 흐려져 나를 선명하게 보지 못하게 한다.
빛과 어둠을 이처럼 그려낼 수 있다면, 밝음은 밝은 채로 어둠은 어두운 채로
아서 도브, <붉은 태양>, 1935, 캔버스에 오일, 51x 71cm
<붉은 태양>은 빛과 어둠이 교차되는 일몰의 순간을 표현한 것이다. <일출>에서 해가 빛을 산란하는 것과는 달리 <붉은 태양>에서는 태양의 빛이 더욱 또렷해진다. 그리고 그 태양 사이로 어둠이 조금씩 드리워진다. <일출Ⅲ>에서는 빛과 어둠이 서로 겹치면서 힘을 대결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반면 <붉은 태양>에서는 빛과 어둠이 선명히 대비되고 있지만 서로는 위협적이지 않다. 마치 빛과 어둠이 서로의 존재를 받아들인 순간처럼 느껴진다.
난 기쁨을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했던 것 같다. 어쩌면 슬픔(어둠)보다도 기쁨(밝음)을 인정하는 것이 더 낯설고 어려운 일이었다. 정말 내게 있는 것일까? 내가 누려도 되는 것일까? 자격이 있는 것일까?라고 자문하며 스스로를 의심했다. 어둠(슬픔)을 인정하지 못하는 만큼 밝음(기쁨)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이제는 내게 비추는 해를 반갑고 고맙게 맞이해 보려고 한다. 내게 주는 관심, 사랑을 온전히 받아 내고, 내가 가지고 있는 힘을 인정하면서, 그리고 그 힘을 제대로 제때 쓰며 살아가려 한다. 그리고 내 선택으로 슬픔이 생기더라도, 역량의 부족으로 여전히 미해결 된 과제를 다시 마주치게 되더라도 무기력을 경계하며 내 몫의 짐을 짊어지고 가려고 한다.
올 한 해는 내게 기쁜 일만 있기를 소망하지 않는다. 꽃길만 걷기를 바라지 않는다. 올 한 해는 아서 도브처럼 빛과 어둠을 모두 그려낼 수 있으면 좋겠다. 어둠은 어두운 채로, 밝음은 밝은 채로, 그렇게 멋진 일몰의 순간을 경이롭게 맞이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