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워하다 보면 무엇인가 한가닥 살길을 모색하게 되지요. 즉, 반대 방향으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선이란 무엇인가』스즈키 다이세쓰-
혼자 여행하는 것을 좋아했다. 사람이 많은 곳이 싫었다. 평일에 휴가를 낼 수 있다면 작은 지방 도시로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왔다. 하지만 사람이 잘 안 다니는 곳을 가면 사람을 만날까 봐 너무 무서웠다. 마치 어두운 골목길에서 내 뒤를 쫒는 낯선 발자국 소리가 들렸을 때처럼 두려웠다. 특히 사람이 없는 산길에서는 더욱 긴장이 되었다. 거기다가 길을 잃게 되면 공포가 덮쳐 왔다.
2년 전에도 등산을 갔다가 길을 잃고 헤맨 적이 있었다. 그곳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등산로여서 길이 잘 닦여 있지 않았다. 그래도 겨울에 왔을 때는 마른 나뭇가지 사이로 길이 선명히 보였건만, 여름이었던 당시 계절에는 무성한 나뭇잎 때문에 길이 보이지 않았다. 길을 잘못 들어서서 엉뚱한 곳으로 갔다가 긴장을 했던 기억이 생생히 살아났다. 도로 내려가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몇 번의 시도를 더 해보기로 결심했다. 당시 나는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 보기로 비장하게 결심하고 있던 상태였다. 이깟 길도 찾지 못하고 포기한다면 내가 미워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길처럼 보이는 곳을 따라 이곳저곳으로 후비고 들어갔다. 그리고 예상치 못했던 엉뚱한 곳에서 길을 발견했다. 아, 그래 이 길이었지! 겨울에 지나다녔던 그 길을 발견했다. 그날 길의 풍경과 길을 찾은 내 마음을 잘 간직해 두었다. 길은 어디에든 있다는 것, 하고자 하는 마음이 길을 찾게 한다는 경험을 잘 간직해 두었다.
그리고 2년 사이 여러 계절동안 그 길을 다녔다. 그럼에도 등산을 갈 때마다 길을 한 번에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약간의 걱정이 있었다. 이번에도 갈림길에서 약간 걱정이 되었지만 2년 전만큼은 아니었다. 분명 길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찾으려 한다면 그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잘못된 길을 가게 되면 다시 올라와 다른 길로 가보면 된다는 것도 안다. 혹은 지나가는 등산객에게 길을 물을 수도 있다.
쓸데없이 비장했다. 이런 각오와 다짐이 무색하게도 나는 길을 한 번에 찾았다. 이미 내 몸은 그 길에 익숙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 몸은 걷고자 하는 그 길에 점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나는 산을 오르고자 하는 욕망을 가졌고 두려움 긴장했지만 계속 길을 찾으려 했다. 2년 전에 새로 샀던 단단한 등산화가 지금은 좀 더 부드럽고 편안해졌다.
산에 다닐 때처럼 삶에서도 길을 잃는 것이 두렵다. 길을 잃는 그 자체보다도 혼란에 빠졌을 때의 심리적 압박감이 견디기가 어렵다. 그래서 미리 어려운 상황은 피해 다녔다. 많은 돈을 버는 일은 아니지만 며칠간의 일을 하며 나의 유용함을 확인하고, 남는 시간 여유 있게 책 읽고 글 쓰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 만나고 만나기 싫은 사람들의 연락은 적당히 거절하면서 지내는 것도 할만했다. 갈등도 별로 없었고 원하는 것도 별로 없으니 번민도 별로 없었다.
그런데 <피해의식>에 대한 철학수업을 들으면서 피해의식과 관련한 6가지 감정으로 그림으로 그리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세상 속으로 들어가기 두려워하는 나를 만나게 되었다. 답답함과 갈증이 일면서 여기서 나가고 싶다는 충동이 일어났다. 사실 충동이 맞다. 충동적으로 하던 일을 정리하고 새로운 일들을 찾아 나섰다.
새로운 곳에 일을 하면서 그동안 잘도 피해 다녔던 열등감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나는 평가와 인정에 지나치게 몰두하며 내가 바라봐야 할 ‘너'를 보지 못하고 혼미해졌다. 덫에 걸린 것만 같았다. 덧없는 욕망(돈, 명예)에 끌려 욕심을 부린 나를 꾸짖기도 했다. 그러나 그동안의 나의 문제는 욕망에 대한 지나친 억압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치러야 할 관문이라고 생각했다.
지난 2년 사이 내가 배운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방법이 아니라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견디는 마음을 지니는 것이었다. 흔들림에 익숙해지기를 기다리며 혼탁한 마음속을 들여다보았다. 그 혼돈의 정체가 무엇인지 찾아보았다. 문제는 내 욕망이 아니었다. 세상 속에는 내 욕망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 뜻대로 살기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서로 저마다의 욕망이 있다. 저마다 사랑받고 싶은 욕망이 있다. 이 욕망이 서로 부딪칠 때 내 욕망만 부드럽게 미끄러져 나갈 수는 없다. 시기, 질투, 견제를 받으면서도 내 뜻을 밀고 나가야 한다. 때론 직진으로 때론 우회하며 때론 때를 기다리기도 해야 한다.
이것이 갈등이다. 나는 이 갈등을 피하고 싶었다. 욕망들 간의 갈등을 피하고 싶어 세상을 두려워했다. 이 욕망들 간의 갈등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내 뜻을 관철시킬 용기도 그리고 타자에게 굴복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난 회피를 통해 내 작은 세계를 보존하고 싶었다. 산을 도로 내려오고 싶었던 그때처럼 다시 돌아 나오고 싶었다. 왜 일을 벌이고 다녔는지 후회가 되었다. 하지만 이대로 다시 쪼그라들고 싶지도 않았다. 그 답답한 세계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기왕지사 이렇게 된 거 그 시간을 견뎌 보기로 했다. 그리고 내 길을 막아서는 두려움과 직면했다. 밑바닥에 숨어 있던 열등감을 만났다. 그 얼굴을 알아채고 나니 복잡했던 마음이 조금씩 정리가 되어 갔다. 열등감이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열등감이 나를 위축되게 만들고 또는 허세 떨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과제들이 있다. 덕분에 무엇을 해결해야 할지 더 선명해졌다.
산에 올라가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어디로 갈지 갈등하지 않는다면 선택할 수 없다. 선택하지 않는다면 내가 찾던 길이 원하던 길인지도 알 수 없다. 비록 내 선택이 원하던 그 길이 아니어도 괜찮다. 가보았기에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번에는 다른 방향의 길을 선택해 볼 수 있다. 결국 괴로움이 살 길을 모색하게 한다. 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걷지 않으면 갈 수 없다. 살지 않으면 깨달을 수 없다.
다시 2년 후가 되면 이 작은 비장함도 사라지게 될까? 그저 또 바람이 부는구나라고 생각하며 바람을 온전히 느끼게 될까? 2년 후에 난 또 무엇을 알게 될까? 2년이 지난 후 난 어떻게 늙어 있을까? 신발은 얼마나 낡아 있을까? 그 신을 신고 어느 길 위를 걷고 있을까? 괴로움을 이정표 삼아 유쾌한 삶을 향해 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