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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 사라지는 순간이기에 아름답다.

호아킨 소로야 <바다에 있는 아이들>

by 정희주

찰나에서 흩어지는 허무함


세상 모든 것은 변한다. 봄과 여름이 끝나면 가을과 겨울이 온다.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다.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다. 이러한 자연의 변화를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변화는 세상의 이치이니 말이다. 자연의 변화는 좋은 풍경을 선물하기도 한다. 봄이 되면 꽃이 피고, 여름이면 꽃을 대신하여 푸른 잎이 나온다. 가을이 오면 단풍이 들면서 자연은 다채로운 옷으로 갈아입는다. 이때 자연의 변화는 근사한 풍경이 된다. 멀리서 지켜보는 자연의 변화는 그다지 마음을 괴롭히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구경하면 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나 큰 애정을 주었던 대상의 변화는 자연을 볼 때와는 다른 태도를 보이게 된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돈이나 물질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명예일 수도 있다. 나에게는 변하면 안 되는 것은 사랑이나 우정과 같은 ‘마음’이었다. 나는 진정한 마음은 절대 변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해 왔다. 변하지 않는 것이어야만 진짜라고 생각했다. 내 마음에서 멀어져 가는 사람을 보면 배신감마저 느꼈다. 상대의 변심 앞에 저항했다. 관계의 변화를 부정했다. 소중한 것이 내 손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상실을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 결국 내가 남겨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물리적으로 혼자가 되어버렸을 때야 현실을 자각할 수 있었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마음을 속절없이 지켜보며 마음이 아팠지만 마음의 변화는 내가 막아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것이 모든 것이 변한다는 자연의 이치를 받아들이는 수용의 자세는 아니었다. 낙심에 가까웠다. 내가 어찌할 수 없기에 포기할 수밖에 없는 마음이었다.


인생이 덧없고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행복한 순간조차 사라지고 만다는 것은 얼마나 고통인가. 너무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그 상실은 지독한 고통이 된다. 절망감을 겪고 나면 더는 애정을 쏟고 싶지 않다. '인생은 덧없는 것이다 ‘라는 누군가의 말에 쉽게 동의하게 된다. 더는 상실감을 느끼고 싶지 않기에 삶의 기쁨과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싶지 않게 된다. 하지만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슬픔이다. 상실을 피하려고 아름다움을 느끼지 않게 된다면 결국 삶의 허무에 갇히게 된다. 인생은 정말 덧없기만 한 것일까? 관계의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찰나여서 찬란한 기억


스크린샷 2025-06-19 150516.png <발렌시아 해변의 정오>, 1904, 캔버스에 오일, 64 x 97 cm


'찰나'를 충실히 그려낸 화가가 있다. 스페인의 화가 호아킨 소로야(1863-1923)는 곧 사라지고 마는 '찰나'를 포착했다. <발렌시아 해변의 정오>에서 보듯이 그의 바다는 빛 가루를 뿌려놓은 것처럼 반짝거린다. 그림 속 아이는 해변 가까이에 서서 바닷속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다. 이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출렁이는 바다 위를 춤추듯 반짝거리는 햇살은 이 세 사람을 모습을 잊지 못할 한 장면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림 속의 해변은 소로야의 고향인 스페인에 있는 발렌시아 해변이다. 호아킨 소로야는 두 살 때 부모님을 잃고 이모 집에서 성장한다. 비록 부모님이 계시지는 않았지만, 이모로부터 돌봄을 받고 자랐으며 발렌시아의 푸른 바다와 햇살에 위안받았다. 소로야는 10대 후반에 공모전에 입상하였고 30대 중반에 스페인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가 되어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세계 각지에서 전시회를 열며 왕성한 활동을 한다. 하지만 소로야는 매년 여름이 되면 고향 발렌시아로 돌아와 바닷가의 풍경을 그렸다. 언제나 바다를 그리워했다.


스크린샷 2025-06-20 082254.png <발렌시아 해변의 아이들>, 1916, 캔버스에 오일,
스크린샷 2025-06-19 151205.png <발렌시아 해변의 아이들>을 그리고 있는 호아킨 소로야


바다에는 삶이 있다. 바다는 생명과 죽음이 있다. 밀물이 있고 썰물이 있다. 가득 찰 때가 있는가 하면 비워질 때가 있다. 그리고 비워진 것은 다시 가득 차오른다. 바다는 끊임없이 모습을 바꾼다. 그 바다 위에 비치는 태양은 변하는 바다의 모습을 더욱 다채롭게 만든다. 고정된 것은 없다. 자연도 그러하듯이 자연의 일부인 사람도 그렇다. 사람의 몸도 시간에 따라 성장과 노화를 겪으며 변화한다. 사람의 마음도 그렇다. 사랑도 그렇다. 관심도 그렇다.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지금의 모습은 사라진다. 소로야는 모든 것이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고정되어 있어 보이는 것조차도 태양은 모든 것의 겉모습을 바꾸어 버린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빠르게 자연을 그려내려고 했다. 빠르게 포착하지 않으면 사라지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만일 상실감이 두려워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담지 못한다면 삶은 죽는 것이 된다. 풍경과 함께 아름다움을 누릴 기회도 찰나의 순간에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계속 변화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변화를 맞이하는 다른 태도를 취할 수 있게 된다. 소로야처럼 세상은 변화하는 것이기에 보다 빠르게 '지금-여기'를 포착하려 할 것이다. 아름다운이 순간이 곧 사라질 것임을 알게 된다면 '지금-여기'를 더 소중히 생각하게 된다. 지금 이 순간은 더없이 아름다운 것이 된다.


남녀 간의 사랑, 우정, 가족 간의 애정 또한 다르지 않다. 생명이 있는 것은 소멸하게 되어 있으며 그 생명들 간의 관계 역시 끝이 있다. 이 유한함을 거부할 수 없다고 인정할 때 다른 태도를 보일 수 있다. 결국 덧없음이라는 시간의 한계가 '지금-여기'를 살게 한다. 과거의 슬픔에 머물지도, 미래의 절망에 미리 고통스러워하지도 않게 한다. 오직 '지금-여기'에 머물게 한다.



찰나에서도 삶은 움직인다.


스크린샷 2025-06-19 150648.png <해변을 따라 달리기>, 1908, 캔버스에 오일


<해변을 따라 달리기> 그림 속에서는 아이 셋이 함께 술래잡기라도 하는 듯 달리고 있다. 맨 앞에 달려가는 아이는 뒤따르는 아이들이 궁금했는지 뒤를 돌아보고 있으며, 두 번째 아이는 뒤따라오는 아이에게 잡힐세라 냅다 달음박질하고 있다. 바람은 아이의 바람을 알고 있는지 큰바람으로 치마를 부풀리면서 아이를 밀어주고 있는 것 같다. 세 번째 아이는 힘차게 발을 구르며 앞선 두 소녀를 따라잡고 있다. 달리는 보폭으로 보아 몇 초 사이에 두 소녀를 앞지를 것만 같다. 검게 그을린 소년의 몸은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며 윤이 난다.


그림을 보고 있으면 파도 소리, 바람 소리, 그리고 아이들의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어떤 소리는 파도에 먹히고 어떤 소리는 바람이 가져간다. 찰나를 그렸지만, 그것은 정지된 화면이 아니다. 역동적으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시각적인 움직임뿐 아니라 소리, 냄새, 촉감을 느끼게 하고 모호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그 감정은 그림과는 또 다른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찰나를 그렸지만, 그것은 정지된 순간이 아니다. 소로야가 그린 찰나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음악처럼 다른 기억을 연상시킨다. 찰나는 다른 기억을 불러오며 지속해서 움직인다. 때론 바람이 되어, 때론 파도 소리가 되어, 때론 냄새가 되어 끊임없는 기억으로 펼쳐진다.



어떤 찰나는 영원이 된다.


스크린샷 2025-06-19 150759.png <바다에 있는 아이들>, 1909, 캔버스에 오일


<바닷에 있는 아이들> 그림 속에 작은 소녀는 언니 손을 잡고 바닷속으로 들어간다. 작은 소녀는 바다에 매력을 느끼면서도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바다의 물결에 몸이 흔들리기도 하고, 옷이 젖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언니는 동생의 손을 잡고 안심시켜 준다. 언니의 손을 꽉 잡은 작은 소녀는 좀 더 용기를 내어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차갑고 낯선 물살 속에 점차 익숙해진다. 물살이 간지럽게 느껴지기도 하고, 바닥의 모래는 단단해서 걷기가 편하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닷물 속에 발을 담근 그 기분은 특별할 것이다. 넓은 지중해의 바다와 함께 출렁이는 느낌은 온몸에 기억되었을 것이다. 두 소녀는 바다를 빠져나와 홀로 걷게 되더라도 오늘의 이 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두려움을 감당하며 파도와 함께 찰랑거리던 설렘 가득한 기쁨이 온몸에 기억되었을 테니 말이다.


내게도 아름다운 '찰나'가 있었다. 엄마의 무릎을 베고 낮잠을 자던 순간 누군가가 나를 돌보고 있다는 것에 안심이 되었다. 불안한 세상 속에 흔들리며 갈피를 잡지 못할 때 잠시 기댄 그의 등에서 따스함을 느꼈다. 병원에서 검진 결과를 기다리며 걱정하는 아버지의 손을 말없이 잡아드리는 순간 아버지의 떨림은 잦아들었다. 친구의 어깨에 기대어 살랑이는 나뭇가지를 보며 이상하게 마음이 고요해졌다. 친구와 미술관에서 함께 음악을 듣던 순간 그동안 알지 못했던 친구를 이해하는 느낌이 들었다. 음악의 진동과 함께 친구의 역사와 나의 역사가 합주되는 느낌이었다. 나와 네가 마주한 순간, 손을 잡거나 기대거나 나란히 있던 순간, 서로의 진동이 하나가 된 순간 불규칙한 심박은 안정되었다. 우리의 호흡이 파도의 물결처럼 일치되는 순간이었다.


찰나의 순간 나는 사랑하는 이와 함께 호흡하며 다른 내가 되었다. 그 찰나의 순간 나는 '나'를 잊었다. 그 찰나가 바로 사랑이었다. 사랑하는 순간 나는 더 완전한 내가 되었다. 나는 찰나의 시간을 품고 있다. 찰나는 흩어지지 않는다. 소로야가 발렌시아의 바다와 태양이 반짝이는 찰나를 잊지 못하는 것처럼, 소로야가 남긴 그림이 나의 기억을 찾게 한 것처럼, 지난 기억이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주는 것처럼, 삶의 수많은 찰나가 모여 지금의 나를 이룬 것처럼, 찰나는 다른 삶에서 계속된다. 그렇게 찰나는 영원해진다.



스크린샷 2025-06-19 150909.png <해변 산책>, 1909년, 캔버스에 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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