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수업 후기: 비트겐슈타인 <언어게임>
언어게임이란 낱말은 여기서, 언어를 말하는 것이 어떤 활동의 일부, 또는 삶의 형태의 일부임을 부각 시키고자 의도된 것이다.
「철학적 탐구」비트겐슈타인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와 그 언어가 뒤얽혀 있는 활동들의 전체"를 "언어게임"이라고 칭했다. 언어를 말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대화한다는 것은 "삶의 형태"의 일부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언어게임"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게임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언어는 한국어, 영어, 프랑스어와 같은 나와 다른 언어만을 뜻하지 않는다. 같은 한국어를 쓰고 있더라도 다른 세계에 있는 것만 같을 때가 있다. 나는 여기를 이야기하는데 상대는 거기를 이야기할 때가 있다. 이렇게 대화가 잘 안 풀려갈 때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도대체 머릿속이 뭐가 있는 것지?"라며 답답한 마음이 든다. 대화에서 일어나는 이 간극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은 "삶의 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라고 한 것이다.
삶의 형태가 다르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선 생물학적 배경과 타고난 기질이 다르다. 그리고 적응해 온 환경이 다르다. 가정환경, 교육의 내용, 읽은 책, 만난 친구, 먹은 것, 입은 것, 본 것 등등 이 모두가 우린 저마다 다 다르다. 그러니 삶의 형태는 인구수만큼 존재한다. 개인별로 모두 자기만의 삶의 형태가 있다. 이렇게 모두 다른 삶의 형태를 지니고 있으므로 대화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게임의 규칙은 게임마다 다르다. 그래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저마다의 고유한 규칙이 있다. 개인마다 삶의 형태가 다르듯이 게임의 규칙도 저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이 저마다의 다른 게임의 규칙을 어떻게 따라야 유능한 게임 플레이어가 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해결책을 제시한다.
내가 규칙을 따를 때, 나는 선택하지 않는다. 나는 규칙을 맹목적으로 따른다.
「철학적 탐구」비트겐슈타인
비트겐슈타인은 "맹목적"으로 따르라고 한다. 그저 상대의 언어 규칙을 맥목적으로 따르는 것, 상대의 삶의 형태를 따라가는 것, 나를 지우고 상대의 맥락 속으로 들어가는 것만이 언어 게임에 임하는 자세라고 말이다.
비트겐슈타인의 해결책을 이해하기 위해 내 삶을 더듬어 찾아보았다. 나는 누구와 대화할 때 가장 어려움을 느꼈을까? 가장 이해하기 힘들었던 대화를 떠올려 보았다.
욕구를 이해받고 싶었던 사람과의 언어게임
아버지와 정치이야기를 하다 보면 난장판이 되곤 했다. 젊은 이들은 세상을 모른다며 답답해하시고 때론 화를 내기도 했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 시절을 미화하기도 했다.
너네 젊은 사람들은 이 세상이 거저 온 줄 알지?
지금은 그 시절에 나 같은 사람이 청춘을 바쳐 일한 결과야!
70, 80년대는 아버지의 황금기였다. 그 시절 아버지는 섬유제조업에 종사하셨다. 공장장을 거쳐 관리자로 승진도 하셨고, 수출을 많이 한 회사에는 주는 공로패도 받았다고 했다. 아버지의 승리의 역사는 엄혹한 군사정권의 시기와 맞물려 있었지만 아버지가 다니던 회사와 직원들은 그저 현실을 열심히 열심히 살아갔던 그야말로 산업일꾼들이었다. 그 시기에 대한 부정은 아버지의 젊은 날에 대한 부정이며 아버지의 쌓아온 승리에 대한 부정이었던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더 옛날이야기 한편을 듣게 되었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어린 시절에 막걸리 공장에서 술을 거르고 난 후 나오는 술지게미를 가져다가 죽으로 끓여 먹었다고 했다. 그걸 먹고 나면 살짝 취기가 돌기도 했다고 한다. 자식들이 술기운에 눈이 헤롱거리는 것을 본 할머니 눈은 슬퍼지셨다고 했다. 아버지는 "내가 한 고생은 고생도 아니다"라고 하시며 그 시절에는 '토굴집'에 사는 친척도 있었다고 했다. 산에 구덩이를 파서 지은 그런 집 말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아버지와 그 또래의 어르신들이 겪었던 지독한 가난과 가난에서 벗어난 시기를 함께한 그 시절의 대통령에게 호감을 가졌던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가 가진 가난에 대한 상처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살림살이가 좋아지고 나서도 잊지 못하는 상처였던 것이다. 아버지에게는 보수는 안정적적이며 진보는 불안정이었다. 진보는 혼란의 상징이며 혼란은 가난의 기억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아버지의 미해결 된 상처를 이해하게 된 이후로는, 아버지의 "삶의 형태"를 더 알게 된 이후로는 아버지와 정치 이야기는 적극적으로 나누지 않게 되었다. 물론 아버지가 정치뉴스를 보며 나와 대화(답정너 스타일의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지만 난 그냥 감탄사로만 응수했다. "그러게", "에혀"라고 말할 뿐. 비록 내 말에 대한 신념이 있더라도 아버지에게 가닿지 못하는 논쟁은 덜 하게 되었다.
우리는 마찰이 없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이상적인 조건인 미끄러운 얼음에 올라섰지만 동시에 바로 그 이유로 인해 걸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우리는 걷고 싶다. 따라서 마찰이 필요하다. 거친 땅으로 돌아가라!
「철학적 탐구」비트겐슈타인
욕구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과의 언어게임
아이들은 자신의 욕구를 잘 알아채지 못했다. 그래서 이유 없이 짜증 내고 떼를 쓴다. 아니 '이유 없이'가 아니라 '어른이 이해할 수 없는 이유'라고 해야겠다. 그 이유가 분명히 있지만 아이는 그것을 언어화하기 어려운 것뿐이다. 배가 고프거나 놀고 싶거나 혹은 피곤해서 잠을 자고 싶은 것인데도 그 말을 하지 못해서 짜증을 내고 울어버린다. 사실 아이들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정확히 모를 때가 더 많다. 어른들이 내 마음 나도 모르겠어하는 것과 같은 심정이다.
풀리지 못한 내면의 욕구는 불편감을 만든다. 그때 그 불편감이 부적절한 방식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사랑받고 싶은 아이는 관심을 받고 싶어서 엉뚱한 장난을 치면서 주목을 끌려고 시도하기도 한다. 친구에게 서운한 감정을 품은 아이는 친구 물건을 망가뜨릴 수도 있다. 밖에서 뛰어놀고 싶은 아이는 침대와 소파에서 뛰며 집안을 엉클어 놓을 수도 있다. 욕구는 스스로 사그라들지 않는다. 욕구가 가진 에너지는 다른 것을 전환된다.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삐집고 나온다. 자신의 감정도 잘 모르고 행동하는 아이와 대화를 위해서는 그 아이의 삶을 잘 관찰해야 한다. 많이 관찰하고, 많이 부딪히고, 계속 방법을 바꾸어 가며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시도해야 한다. 문제행동의 원인을 쫓아가다 보면 어떤 욕구가 숨겨져 있는지 알 게 된다.
내가 이런 욕구와 감정에 대해 이해하기 전 일이다. 아들이 유치원에 다닐 때쯤이다. 난 고작 5살 아이와의 갈등에 정신이 피폐해지곤 했다. 도서관에서 책 한권이 눈에 들어왔다. "공감 대화"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아이의 말에 "~구나"라며 공감을 하라고 했다. 아이가 울면 "슬프 구나" 아이가 화를 내면 "화가 났구나"하면서 그 감정에 공감을 표현하는 것이다. 나는 기계적으로 그 말투를 따라 했다. 내 나름에는 엄마의 일방적 훈육 대신 거친 땅에 올라서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엄마가 신종 기술을 쓰고 있다는 것을 눈치 빠른 아들은 단박에 알아차렸다. 그리고 응수했다.
"엄마! 나 놀려???"
헉!!! 뭐가 잘못된 거지??? 난 다시 작아졌다.
한 사람을 온몸으로 느끼는 이들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아니, 말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그저 드러날 뿐이기 때문이다. 그때 드러나는 그 신비스러운 일을 우리는 '사랑'이라 부른다.
철학수업 교재에서 - 황진규
내가 시도한 "공감 대화"는 그저 말을 흉내낸 앵무새같은 행동이었다. 아이의 마음이 아닌 그저 입으로만 아이의 말을 따라한 것에 불과했다. 아이는 나의 '언어' 이면의 '비언어적'표현을 눈치채고는 나에게 화를 냈던 것이다. 내 눈빛과 말투, 나의 온몸이 보내고 있는 비언어적 메시지를 아이는 눈치챈 것이다. 정말 좋은 대화는 '언어'로써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온몸'으로 드러난다.
아이가 장난감 총으로 과녁을 맞힐 때 같이 기뻐하며 환호하고, 아이가 아이스크림을 바닥에 떨어뜨렸을 때 같이 안타까워하고, 아이가 친구와 싸우고 돌아왔을 때 아이의 흥분된 진동을 느껴주는 것. 그것이 좋은 대화이며 온몸으로 하는 공감이다.
욕구를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과의 언어게임
자기 욕구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과의 대화는 정말 어렵다. 한 친구와 만남이 생각난다. 아직 친해지기 전이여서 서로의 취향이 어떤지 잘 알지 못했다. 서로 좋아하는 음식을 이야기하자 그 친구는 내가 먹고 싶은 걸로 먹자고 했다. 칼국수가 어떠냐고 물었더니 좋다고 했다. 식당에서 그 친구 먹는 모습이 시원찮아 보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친구는 소화장애가 있어서 밀가루 음식을 잘 못 먹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너무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사정을 말하지 않은 그 친구가 야속했다. 나를 배려 없는 사람으로 만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미안해하기만 할 일도 야속해할 일도 아니었다. 우선 고마워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 친구가 나의 언어게임에 기꺼이 들어와 준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곤경을 잊고 나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 애써준 것이다. 나는 그 친구의 애정을 듬뿍 느끼면서 다음번에는 그 친구의 언어 게임에 기꺼이 들어가 주리라 다짐했다.
상대의 맥락 속에서 대화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사랑이 있다면 나를 지우고 기꺼이 너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숨겨진 마음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이 일은 나에게도 기쁨이 되며 '너'에게도 기쁨이 되는 일이기에 고된 피로를 감수하고도 해낼 수 있다.
고난도의 언어게임이 있다. 나는 아직 그 게임에 성실히 임하지 못했다. 이는 '나'를 슬프게 하지만 '너'에게는 기쁨이 되는 경우이다. 만약 상대가 나와 이별하고 싶어 하지만 자신의 마음을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상대는 자신이 이별하고 싶은 마음을 표현할 수가 없다. 그것을 말하면 내가 상처받을 수도 있다는 걱정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을 숨길 수는 없다. 비언어적 표현으로 이별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이를 알아챘다면, 그는 떠나고 싶지만 나는 떠나보내고 싶지 않다면, 이때는 어떻게 그의 언어 게임에 들어갈 수 있을까?
이때는 '집착'을 버려한다. '집착을 버린 사랑'만이 그 일을 가능케 한다. 차마 내게 상처 줄 수 없어 '이별'을 말하지 못하는 그 마음까지 알아 채 주고 이별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사랑으로 할 수 있는 최전선의 언어게임이다. 상대의 세계에 들어가는 일은 나를 기쁘게만 하지 않는다. 그것은 당장에 슬픔이기도 하다. 쥐고 있는 것을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너'의 기쁨을 위해 '나'의 기쁨을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마음을 나눈다는 것은, '나'를 지우고 '너'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은, 손에 꽉 움켜쥔 집착까지 놓아줄 수 있는 모진 마음도 필요한 일이다. 이래서 삶은 수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