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진입장벽이 높은 편이다. '철학은 어렵고 관념적이다. 그래서 일상이랑 상관없고 무용하다'가 나의 의식의 흐름이었다. 어쩌면 '철학은 어려워서 노력해야 하는 학문이다. 노력하는 것은 불편하고 괴로운 일이다.'라는 다른 한 편의 흐름도 있었을 것이다. 철학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무용하며 괴로움마저 줄 수 있는 것이었기에 피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운명인지 우연인지 친구의 추천으로 철학수업을 듣게 되었다.
몇 주 수업을 듣다 보니 신기했다. '엇! 나와 같은 고민을 철학자들도 했구나!' 하며 반가웠다. 지식이 확장되는 것 같아서 기뻤다. 심리학과 예술이 철학과 연결 될 때마다 반가웠고 알고 있던 개념이 좀 더 분명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일상의 문제와 연결되는 것에 쾌감이 있었다. 나는 대학에서 불어불문학을 전공했고 지금도 문학작품을 좋아하지만 인문학은 현실과 거리가 먼 것 같다는 생각을 해왔었다. 잠시 머리를 쉬는 힐링거리이거나 지적 즐거움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인문학보다는 심리학이 더 쓸모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철학도 삶에 매우 유용한 것이었다. 내가 지금도 하는 걱정들, 요즘 우리가 하는 일상의 고민들은 철학자들이 이미 끝내 논, 답지가 있는 숙제 같은 것이었다. 놀라웠다. 반가움과 흥미로움에 철학수업에 매료되었고, 철학자가 이미 끝내 놓은 결론을 모르고 살았다는 생각에 억울해지기도 했다.
조르주 드 라 투르 <램프에 불을 붙이는 사람> 17세기경, 캔버스에 유채, 61x51cm
철학은 지식을 확장하고 문제를 해결하기만 하는 학문이 아니었다. 레고 블록을 맞추듯이 하나에서 하나를 연결하고 또 블록을 바꾸면서 변신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만들어 놓은 블록구조물을 모두 부숴버릴 수도 있었던 것이다. 난 배움이란 것이 하나씩 연결되어 가지 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진짜 배움은 무너짐에 있었다. 배움은 기존의 것을 파괴하고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었다. 내가 착실한 학생이었는지, 운이 좋은 편이었는지, 그럴 운명이었는지 몰라도 난 진정한 배움의 길로 들어갔다. 내가 알던 세계가 무너지고 말았다. 와장창. 억울하고 열받고 화나고 당황스러웠다. 정서적 공황이 왔다.
내가 믿었던 사랑이 정말 사랑이 아니었는지도 몰라. 내가 정성껏 준비한 선물은 대가를 바라는 뇌물이었는지도 몰라. 내가 불륜을 부정하는 것은 금기된 욕망의 투사였을지도 몰라. 나의 성실은 나 자신에게는 불성실이었는지도 몰라. 나의 진실함은 진실한 가면이었는지도 몰라. 나의 배려는 나를 지키기 위한 방패였는지도 몰라.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살아온 지난 시간이 먼지처럼 흩어졌다. 그동안 내가 쌓아온 것이 모래성에 불과한 것만 같았다.
한동안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며 나의 삶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것은 누군가에 대한 원망도 아니었으며 잘못한 일에 대한 후회도 아니었다. 내 삶 자체가 가짜였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었다. 그 의심의 시간 동안 내가 구렁텅이에 빠진 것만 같았다. 철학공부를 시작한 것이 잘못인 것만 같았다. 그야말로 인생 꼬일 각이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삶의 진실까지는 알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영화 <메트릭스>에서 주인공 레오가 파란약과 빨간약을 선택해야 하는 장면이 나온다. 파란약을 먹으면 지금의 삶을 그대로 사는 것이고 빨간약을 먹으면 여태껏 모르는 것에 대해 알게 되는 약이었다. 모르던 것을 알게 되어 괴로울 수 도 있지만 레오는 그것을 감수하고 빨간약을 먹게 된다. 그래서 파란약을 먹고사는 세상이 매트릭스 속의 조작된 세상임을 임을 알게 된다. 난 극구 빨간약을 먹고 싶지 않은 그런 류의 인간이었다. 안온한 내 세계의 것을 파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가진 것이 많았다. 사랑하는 아이들, 친구들, 내가 좋아하는 책, 시, 그림들. 그 아름다운 것들로 구성된 세계를 파괴하고 싶지 않았다. 또한 나는 다른 세계를 가고 싶은 만큼의 절박함도 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아는 현실의 세계에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상처가 덧나지 않게 관리하며 고냥고냥 살고 싶었다. 가령 소소한 행복 같은, 아니 겸허한 패배의식이라고 해도 좋다. 작은 만족감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손에 쥔 작은 사탕을 놓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철학을 공부하면서 세상의 많은 어둠을 보게 되었다. 어떤 이는 철학을 공부하면서 세상의 부조리에 분개하고 진보하지 못한 세상에 대해 분노한다. 그리고 잘못된 세상을 배운 대로 근면 성실하게 살아온 것에 억울해한다. 어떤 이는 자기답게 살지 못한 시간을 한탄한다. 하지만 난 이들과 같이 억울해하고 분노할 수만은 없다. 인생의 허리를 지나가고 있는 중년의 나이에 세상만 탓할 수가 없다. 난 이미 세상의 한 부분이 되었기 때문이다. 난 그 잘못된 세상이 유지되게 근면 성실하게 일한 기여자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세상의 어둠뿐 아니라 나의 어둠에 대해서도 알아가게 되었다.
난 사회적 약자이면서도 기득권자이다. 여전히 변두리에서 전세살이를 하는 서민이며 불안정한 직장생활을 하는 계약직 반백수이다. 지하철에 타면 빈자리를 두리번거리는 하체 부실한 아줌마이며, 여전히 가부장제안에 살고 있는 여성이다. 하지만 한편 기득권자이기도 하다. 인생 경험이 없는 젊은이에 비하면 중년의 노련함이 있고, 불안함을 호소하는 미혼에게는 안정된 가정을 가진 기혼이다. 배움의 기회가 없었던 사람에 비해 많은 교육을 받았고, 성소수자 앞에서는 사회적 불이익이 없는 가족형태를 구성하고 있으며, 장애인 앞에서도 기득권이다.
내가 약자라고 생각하면 난 언제나 억울하다. 그러나 내가 강자라고 생각하면 난 미안해진다. 나의 기득권을 알기 때문이다. 배워서, 경험이 많아서, 좋은 그림과 글을 읽을 줄 아는 나는 기득권이다. 내가 이렇게 많은 것을 가지기까지 약자들의 서러움에 무관심했다. 때론 더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차지하려고 했다. 난 단지 열심히 살았던 것일 뿐이라고 항변해 보지만 이제는 힘없는 변명이 되어버렸다. 이것이 내가 철학을 배우며 알게 된 새로운 것들이다.
나이가 들면 경험이 많아진다. 같은 경험을 반복하기도, 새로움 경험을 하기도 하며 그 폭과 깊이가 커진다. 그러나 이 경험이 계속 업데이트되지 않는다면, 묵은 생각을 탈피하고 새롭게 진화하지 못한다면 편견에 갇히게 된다. 그 편견은 신념이 되고, 그 신념을 지키기 위해 위선과 기만을 장착하고 살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래서 한 번도 자기를 죽이지 못한 사람의 얼굴은 분칠이 되어 있다. 점점 무거워진 화장은 맨살을 알아보기 어렵게 한다. 진짜 얼굴보다는 화장한 얼굴이 자신의 얼굴이기를 바란다. 맨 얼굴을 감추기 위해, 자신의 삶을 정당화하기에 급급해진다.
조르주 드 라 투르 <참회하는 막달레나>1643, 캔버스에 유채, 93x133cm,
톨스토이의 소설 <이반일리치의 죽음>에서 판사 이반일리치는 자신의 삶을 정당화한 대표적 인물이다. 그런 그가 죽기 사흘 전에 삶의 진실을 알게 된다. 자신이 인생을 잘못 살았음을 깨닫게 된다. 이반일리치는 어떤 삶을 살았기에 지난 삶을 후회한 것일까?
이반일리치는 인생이 "편안하고 기분 좋고 즐겁고 고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사랑하지 않지만 그가 선망하던 상류층 사회에서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인물과 결혼을 한다. 그러나 아내는 출산 후 이반일리치에게 가정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원한다. 이반일리치는 고상한 삶이 침해받지 않기 위해 일로 도망갔으며 집에 있을 때조차 일거리를 가지고 들어왔다. 이반일리치는 자신이 생각하는 삶을 살기 위해 성실하고 근면하게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반일리치는 사다리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한다. 그것이 원인이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갑자기 입맛이 없어지고 가슴과 옆구리에 통증을 느끼게 된다. 점점 심각한 고통이 찾아오지만 병명이나 원인을 알 수 없다. 의사들도 이반일리치의 병에 대해 똑 부러진 말을 하지 못한다. 병이 얼마나 위중했는지, 얼마나 살 수 있는지, 고칠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한 것은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가족들도 이반일리치의 고통에 큰 관심이 없다. 아내는 약을 먹으라고만 할 뿐 고통스러운 마음까지는 알아주지 않는다. 이반일리치는 가족들이 자신을 아픈 아기를 돌보듯이 보살펴주기를 원하지만 아무도 그의 고통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친하다고 생각했던 점잖은 동료들도 장례식 전까지 그를 찾지 않았다.
이반일리치는 침대에 누워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다. 이렇게까지 고통받는 원인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러다 끝내 결론에 도달한다. 자신이 인생이 엉터리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반일리치가 잘못을 깨달았지만 다시 살 기회는 고작 침상에서의 사흘뿐이었다. 진통제로도 견딜 수 없는 통증의 시간뿐이었다.
이 소설은 무섭다. 삶의 진실을 깨닫는 순간, 다시 살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한다. 너무 늦지 않으려면 미리 한 번은 죽어봐야 한다. 철학은 미리 한번 죽게 한다. 그 죽음을 통해 내가 잘못 살았음을 알게 한다. 내가 잘못 살았구나. 헛살았구나. 내 삶은 엉터리였구나를 깨닫게 한다. 미리 죽어봄으로써 지난 삶의 허무와 상실을 미리 느껴보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는 것이다. 지금 쓰고 있는 철학 후기들은 내가 죽는 이야기들이다.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던 삶을 부수는 일이다.
내가 철학을 배우는 이유가 보다 분명해졌다. 난 죽기 위해 철학을 배운다. 삶을 다시 살 기회를 얻기 위해 철학을 배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싶다면, 한 번은 죽어야 한다. 철학으로 미리 죽어본 후 다시 사는 삶은 어떤 것일까? 더 나은 삶은 무엇인가? 훗날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내게 찾아와 "너는 어떤 삶을 원했는가?"라고 물어온다면 그때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묵직한 그 음성에 대답하기 위해 오늘도 쓴다. 걷는다.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