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빨리 직장인이 되어야만 했던 그 시절 우리 집 이야기
대학교 3학년이었던 2013년도, 그 시절 나는 자신감이 최고조로 넘치던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군대 가기 전 1년 동안 학사경고를 간신히 면할 정도로 엉망이었던 학점은 복학 후 재수강과 계절학기를 통해 어느 정도 복구되어 있었고,
기계과 전공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였던 자작자동차 동아리에서도 회장을 맡아 전국 대회에서 우리 학교 역대 최고의 성적을 수상했고,
교내외 수많은 대외활동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인생의 황금기를 온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대학 생활이 너무나도 즐거웠기에 이대로 4학년을 지나 졸업을 하면 너무 아쉬울 것 같다는 생각에 1년 정도를 휴학하고 단과대 학생회장 직을 하며 캠퍼스 라이프도 더 찐하게 즐기고, 알바를 통해 돈도 벌어보고 싶은 많은 의욕과 열정이 가득했던 시기였다.
그런데 그 해 마지막날, 1월 1일 제야의 종소리를 가족과 함께 들으며 연말연시를 보내기 위해 고향집에 갔던 그날, 아빠로부터 엄마가 몸이 많이 안 좋아 대학병원에 진료 예약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워낙에 걱정과 근심이 많은 분이라 또 으레 하는 말씀이시겠구나 생각은 했지만 뭔지 모를 불안감이 나도 모르게 계속 들어 병원 예약을 앞둔 직전 주말에 집에 다시 내려갔다.
불안한 예감은 제대로 적중하여 저녁 먹을 시간도 채 되기 전에 복통을 호소하며 쓰러진 엄마와 함께 간 병원에서 비장이 많이 부은 상태이고, 혈액검사 결과 백혈병일 확률이 높아 보이니 빨리 서울로 올라가시라는 의사의 소견을 듣고야 말았다.
백혈병이 얼마나 무서운 병인지 나는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 길로 엄마와 동생을 먼저 엠뷸런스에 태워 서울로 보내고 집에서 간단히 짐을 챙겨 아빠와 함께 병원으로 향하던 그 길에 나는 인생 계획을 수정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려운 병이지만 치료만 잘 받으면 당연히 우리 엄마는 나을 거라 생각을 했다. 짧게는 수개월, 길면 몇 년이 될지 모를 병원생활을 생각하니 치료비 명목으로 나올 보험금이 고갈되기 전에 최대한 빨리 취업을 해서 혹시나 모를 병원비 부족에 대비하는 게 장남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병실이 없어 응급실에서 며칠을 머무르며 여러 가지 검사를 통해 엄마는 최종적으로 '급성 골수성 백혈병' 환자가 되었다.
전반적인 계획 수정이 필요했다.
세상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주변에서는 괜찮을 거라며 힘내라고 위로들을 해주었지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막상 나는 주변의 위로가 안 들리는데도 발만 동동 구르는 아빠에게 괜찮다고, 열심히 견뎌보자고 위로를 할 수밖에 없던 나였다.
어쨌든 주어진 현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기로 마음먹은 나는 취업에 필요한 어학 점수를 만들기 위해 교내에서 지원하는 토익스피킹 과정을 신청해 점수를 만들었다. 교내 취업경력 개발센터에서 지원해 주는 면접 트레이닝캠프도 참가해서 겨울 방학은 오직 취업만 생각하며 지냈다. 실전과 같은 면접 코칭을 위해 난생처음 정장을 맞춰 입고 엄마 병문안을 갔던 그날, 무균실 면회장 유리창 너머로 눈시울을 붉히는 엄마에게 괜스레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고등학교 때부터 입에 달고 살았던 (지금의) 회사에 한방에 합격할 것 같지 않냐며 너스레를 떨어보았지만 속으로는 지금 입은 이 정장이 상복이 될 것만 같은 생각이 자꾸만 떠올라 억지로 다른 생각을 하려 애썼던 기억이 난다.
슬프게도 그 정장은 엄마 장례식장에서 상복으로 쓰였고.. 이후에 바지가 찢어져 못 입게 되는 바람에 그렇게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생각지 않았던 직무로 지금의 회사에 인턴쉽 합격을 했다.
4학년 여름방학에 진행되는 인턴쉽에 어디든 일단 합격을 하기 위해 내가 쓸 수 있는 모든 회사에 지원을 했다. 결과는 전부 탈락. 그도 그럴 것이 별 관심이 없는 회사까지 지원을 하려다 보니 자기소개서에 그게 느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20여 회사에서 낙방을 하고 마지막에 지원했던 곳이 지금의 회사이다. 간절히 원했던 곳이었고, 여기 말고는 다른 회사들은 사실 관심에도 없었거니와 만약 붙었더라도 그리 오래 다니지 못했을 것 같다.
원하는 직무에 맞춰 자기소개서를 완성하고, 마지막으로 내 상황을 잘 아는, 이 회사에 먼저 취업한 선배에게 연락을 했더니 돌연 '설계'로 직무를 바꿔 지원하란다. 제일 많이 뽑는 포지션인 데다가 내가 처한 상황이 급하니 확률을 높여 일단 붙는 쪽으로 전략을 짜라는 것. 당연히 나는 그 조언을 받아들였고, 이 회사를 워낙에 잘 알았기 때문에 서류부터 시작해 비교적 어렵지 않게 붙어 그렇게 나는 생각지 않았던 직무로 인턴쉽을 하게 되었다.
쉽지 않았던 인턴 생활 6주, 골수이식 공여자로 참여해 엄마를 살릴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었다.
7월 막바지즈음 진행된 짧은 연수 포함해 인턴 기간은 총 6주.
엄마의 투병생활은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았고, 백혈병 치료의 마지막인 골수이식을 위해 외삼촌 세 분과 이모까지 총 네 분의 골수를 이식받기 위해 유전자 검사를 했으나 불행히도 엄마에게 맞는 골수는 없었다.
형제간 유전자가 100퍼센트 일치할 확률이 제일 높으나 그 희망이 우리에겐 허락되지 않았고, 골수이식 센터에 등록된 사람들 중 엄마와 맞는 사람이 2명 있었으나 그분들도 골수이식을 하지 않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은 자식에게 골수 이식을 받는 것. 부모와 자식 간에 유전자는 100퍼센트의 확률로 절반이 일치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절반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다.
일생일대의 기로에 마주한 나는 인턴쉽 2주 차에 골수이식을 했다. 골수 이식 전 세포 증식을 위해 새벽마다 주사를 맞아가며 서울에서 회사까지 약 2시간 거리를 출퇴근을 했다. 그 주사를 맞으면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픈데 그걸 어떻게 버텨냈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참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사무실에 출근하는 주중엔 틈틈이 아빠로부터 엄마의 상태를 전해 들으며 60퍼센트의 확률을 뚫고 살아남아 반드시 최종 합격을 하겠다는 각오로 열심히 했다. 아빠와의 통화가 끝나면 자꾸만 눈물이 날 것만 같아 건물 계단에 앉아 한참을 앉아있다가 사무실로 들어가곤 했다.
주말에는 주중에 병간호에 지친 아빠와 교대해 병원생활을 이어갔다. 골수 이식 후 다행히도 혈액 수치는 호전되는 기미가 보여 암흑 같은 터널이 조만간 끝을 향해 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일주일 만에 마주한 엄마는 매주 점점 더 야위어만 갔고, 4주 차쯤부터는 의사소통도 안될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어 갔다.
인턴쉽 최종 합격 여부를 가리는 프레젠테이션 발표를 앞둔 마지막주 주말, 주말 내내 복통에 고통스러워하는 엄마 곁을 지키며 참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모르핀을 최대치로 투여해도 없어지지 않는 고통에 시달리는 엄마를 두고 다시 기숙사로 내려가기 위해 아빠와 교대하고 나오던 일요일 저녁, 조심히 내려가라는 아빠를 뒤로하고 무균실 병동을 돌아 나오던 그 순간에 나는 무수히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대로 나 살길 찾기 위해 가는 게 맞는 걸까, 이대로 가면 다시는 엄마를 못 보는 게 아닐까, 이게 과연 최선일까..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왈칵 눈물이 쏟아져서 병원을 빠져나오는 동안 정신 나간 사람처럼 울었던 것 같다. 흐르는 눈물에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여서 무슨 정신으로 운전을 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인턴쉽이 끝남과 동시에 엄마와의 이별이 찾아왔다.
길고도 험난했던 6주간의 인턴쉽 기간을 지나 8월 초 금요일, 드디어 수료식을 마쳤다. 그 사이 엄마는 상황이 더 악화되어 중환자실로 들어가면서 하루 두 번의 면회만 허락되었다. 수료식 후 함께 고생했던 동기들과의 짧은 저녁식사로 금요일 엄마와의 면회 시간을 놓쳤고, 하는 수 없이 토요일에 다시 찾아간 병원에서 나는 엄마에게 '이제 다 끝났으니 엄마 회복만 하면 된다'며 엄마를 다독였다. 그게 내가 엄마에게 한 마지막 말이 될 줄도 모르면서.
일요일엔 친구들과 강원도 인제로 여행을 떠났다. 인생 최대의 시련을 겪으면서 동시에 험난한 사회생활의 맛을 본 터라 짧게나마 휴식이 필요했던 것 같다. 강에서 래프팅을 하고 숙소에서 바비큐를 준비하던 그 순간, 아빠로부터 엄마가 뇌출혈이 와서 아예 의식이 없어졌다는 전화를 받았다. 바비큐고 뭐고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길로 짐을 챙겨 다시 서울로 돌아와 병원에 달려갔다. 일단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전화할 테니까 자취방에 가서 쉬라는 아빠를 병원에 남기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 때는 신기하게도 불안하거나 눈물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담담해졌다.
그리고 또 하루가 지난 8월 4일 새벽 2시쯤, 한참 자고 있을 시간에 걸려온 아빠의 전화를 받기도 전에 난 바로 이별을 직감했다. 심장 박동이 점점 약해져 마지막 인사를 하실지 심폐소생술을 할 건지 결정하라는 의사의 말에 아빠는 어쩔 줄 몰라했고, 나는 그냥 편안하게 온전히 보내드리자며 심폐소생술을 거절했다. 그렇게 맞이한 엄마의 임종에서 뻣뻣한 아들은 끝내 사랑한다고, 그동안 잘 키워주셔서 감사했다는 말 조차 하지 못하고 엄마를 떠나보냈다.
9월, 최종 합격이라는 결과를 받았으나 어딘가 마음 한 구석이 공허한 느낌이었다.
엄마의 장례식과 그 이후 남은 정리들을 함께 하며 한 달을 정신없이 보내고 9월, 추석 명절에 맞춰 최종 합격자 발표가 나왔고 결과는 정직원 전환. 엄마가 떠나고 나니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건 내 생각과 감정을 온전히 들어줄 사람이 없다는 것. 물론 아빠도 계시고 다른 가족들, 친구들도 많지만 가장 기쁜 일, 슬픈 일은 엄마에게 제일 먼저 말하고 격려와 위로를 받아왔던 나였기에 그게 참 어색했다.
생각해 보면 엄마는 나의 인턴쉽 기간 6주를 기다려 줬던 것 같다. 중간에 일이 생기면 회사에 나가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으니 말이다. 뇌출혈이 있기 전 마지막 주말에 내가 인턴쉽 끝났다고, 엄마만 나으면 된다고 했던 말이 엄마로 하여금 이제 마음 편히 떠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 준 계기가 된 걸까?
슬픔은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었지만, 얼마 안 가 생각해 보니 비록 엄마는 떠났지만 떠난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만날 수 없고 얘기할 순 없지만 살면서 거의 모든 순간의 선택에 있어 나에게 이정표가 되는 것은 바로 엄마가 가르쳐준 것들. 그렇기에 난 지금도 엄마와 함께 있는 것이다. 나중에 나와 아내가 혹시나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더라도 우리 아이들도 이와 같은 마음이었으면 좋겠다. 슬픔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보다는 얼른 훌훌 털고 일어나 자신의 삶에 집중하는 것. 그게 바로 엄마가 원하는 게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