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뉴스는 세상의 온갖 천라만상을 알려주는 유능한 정보원일 뿐 아니라, 무의식 중에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통제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이다. 질문을 교묘하게 바꿔 원하는 대답을 얻어내는 것처럼, 뉴스에서 보여주고 보이는 대로 사람들이 세상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떻게 뉴스를 바꿔야 할지, 그리고 수용해야 할지에 대한 논의는 뉴스가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에 비해 현저히 부족한 게 현실이다.
오늘 소개할 이 책, <뉴스의 시대>는 뉴스가 현대 사회에서 차지하는 지배적인 위치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뉴스들이 어떻게 바뀌어야 할 지에 대한 가이드라인까지 제시한다. 작가의 의견에 백 프로 동의하진 않았지만, 평소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에 대해 많이 고민해 볼 수 있었다. 다음은 책에서 인상 깊었던 구절들을 발췌한 것이다.
우리가 뉴스와 얽힌 정도에 비하면 안타깝게도 많은 언론기관 내부에는 공정하고 중립적인 '사실' 보도가 가장 품격 있는 저널리즘이라는 편견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중략) 정작 문제는 우리가 더 많은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접한 그 사실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른다는 데 있다. (중략) 하지만 이런 것들이 진정 의미하는 바가 뭐란 말인가? 이 사실들은 정치적 삶의 핵심적 질문들과 어떻게 연결되는 걸까? 이 뉴스들은 우리가 뭘 이해하도록 돕는 걸까?
-> 언론의 핵심 가치가 중립성이 아니라는 말에 놀랐지만, 읽고 나니 납득이 되었다. 투표권 행사 제한, 보조금 대상 확대, 천연가스 수송관 계획 입관 같은 사실들은 뉴스에 보도된다. 그러나 어떤 배경에서 이런 사건들이 일어났는지,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는 언론마다 해석이 다르다. 더 타당하고 균형 잡힌 해석을 내놓는 측의 뉴스가 더 좋은 뉴스이며, 우리는 그런 뉴스를 찾아야 할 것이다.
이 지점에 뉴스의 임무가 있다. 사회가 저지른 최악의 실패를 우리에게 날마다 상기시키는 게 아니라, (이따금) 자부심과 희망과 희망을 갖출 수 있는 능력을 교육하고 지도하는 것 말이다. 국가의 쇠락이 오로지, 혹은 대체로 감상적인 낙관주의에 의해서만 촉발될 수 있는 건 아니다. 미디어에서 유도한 임상적 우울증에 의해서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 뉴스란을 살펴보면 언제나 부정적인 기사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자극적이고 흔치 않을수록 이슈가 되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항상 불만인 부분이었는데, 책에서 이 부분을 제대로 짚어주었다. 언론은 그들의 영향력을 인정하고, 좀 더 사회에 도움되는 방향으로 보도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뉴스 기사는 다른 식으로 깊이 상상하려는 우리의 의지뿐 아니라 그 능력까지 축소하는 방식으로 사안들을 특정한 틀에 가두는 경향이 있다. 이 방식이 지닌 겁박하는 힘을 통해 뉴스는 우리를 마비시킨다. 이런 문제를 파고드는 이가 없다면, 불확실하지만 잠재적으로는 중요한 개인들의 사색은 위축되고 말 것이다.
-> 뉴스 기사에는 권위가 있다. 일개 개인이 썼다면 논란이 될만한 내용도 언론사의 로고가 박혀 있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식이라면 우리의 사고력과 비판 능력이 마비된다. 사회 문제에 대해 깊이 사유해 보는 대신 언론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다. 이는 민주 사회에서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기에, 좀 더 기사를 비판적으로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정보를 품은 매개체로서 사진이 지닌 잠재력에 대한 감을 잃었다. 잘난 척하며 무모하게도 이 세상에 대해 이미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하는 우리는, 지구 위의 다양한 모습을 우리에게 제대로 전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지닌 사진의 힘을 간과하게 된 것이다.
-> 재작년 초, 퓰리처 상 사진전을 갔었다. 별 생각 없이 갔던 전시였는데, 끝나고 나서 썼던 일기에는 '뇌가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고 서술되어 있다. 전쟁의 참상, 이주민들의 고통, 재해의 무서움을 여실히 보려 주는 사진들에 압도되기도 했고, 화합과 사랑을 나타내는 사진들에 마음이 따뜻해지기도 했다. 당시 아이섹이라는 유엔 산하의 자치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세계 평화나 가치에 대해 많이 이야기했었는데, 전시를 보고 나니 과연 그런 탁상공론이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백 마디, 천 마디 말보다 때로는 하나의 사진이 더 효과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뉴스는 자신이 중요한 사안이라고 여기는 것들로 대중의 관심을 끌어들여 의제를 정할 수 있고, 그리하여 충부한 이해력과 관심을 지닌 유권자를 대중 앞에 내놓을 수 있다.
-> 논의되기를 원하는 주제만 제시하고 그렇지 않은 주제를 숨기는 것. 어쩌면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다.
결론적으로, 경제 뉴스에 나오는 숫자와 그래프는 단지 우리가 건설한 세상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이야기와 이미지를 간략한 기호로 속기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비즈니스는 거기에 투자하고 싶어하는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하기에는 궁극적으로 너무 흥미롭고 또 중요하다.
-> 경제 뉴스에 등장하는 수많은 숫자와 그래프를 보면 오히려 현실과 멀어지는 기분이다. 단지 몇 개의 통계만을 가지고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담긴 비즈니스를 이해할 수 있을까? 지표 너머의 무언가에도 주목해 봐야겠다.
우리는 가톨릭의 예를 염두에 두면서, 우리 내면을 강화하는 데 필요한 덕성, 즉 용기 또는 활기, 지혜 혹은 창의성, 신뢰 혹은 용서 같은 미덕의 안내자로 적합한 셀러브리티를 찾아내고자 노력해야 한다.(중략) 우리가 보다 성공적이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도록 영감을 줄 수 있는 태도나 업적을 지닌 사람들을 골라내야 한다.
-> 나에게는 롤 모델이랄 게 없다. 그런데 이 구절을 읽자니 누군가를 본보기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위대하고 훌륭하다고 일컬어지는 사람들 중 내 상황에 가장 와닿는 인물을 선정해 봐야겠다.
비극작품은 관객이 주인공의 무시무시한 잘못과 범죄를 지켜보고 나서 '나 역시 너무나 쉽게 똑같은 짓을 저질렀을 거야.'라는 소름끼치는 결론 말고는 다른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바로 그 순간에, 진정한 도덕을 일깨우고 가능성을 계발하는 데 능력을 발휘하곤 했다. 비극의 임무는 본질적으로 품위 있고 호감 가는 인물도 결국엔 쉽사리 주위를 지옥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 가끔 범죄와 관련된 뉴스를 보면 생각이 복잡해진다. 과연 내가 그들과 같은 환경과 상황이었다면 바르게 살 수 있었을까? 군대에 있을 때가 생각난다. 상냥하진 않더라도 모난 곳은 없던 내가 성격이 꽤나 포악해지는 걸 경험하고 나니 자신에 대한 의심이 들었다. 여유가 없고 의지할 곳이 없다면 누구나 악당이 될 수 있는 것 같다. 도덕적 우월감에 빠지는 걸 경계하자.
불운에 관한 기사에 몰입할수록 우리 자신과 타인에 대해 보다 건설적이고 관대한 태도를 취할 수 있다. 관용적인 태도의 성숙과 희망의 척도는 역설적이게도 극도의 슬픔을 다룬 뉴스를 통해 만들어진다.
-> 질병, 재해, 죽음 등에 대한 기사들을 보면 우리가 일상에서 갖고 있던 고민들은 별 거 아니게 느껴진다. 인생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고, 나에게 그런 불운이 일어나지 않았음에 감사하게 된다. 누군가의 불운이 나의 삶의 태도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이런 존경에도 불구하고, 예술의 특별한 지위 뒤에 있는 예술의 존재 이유들은 명확하게 설명되기보다는 추정되는 경향을 보인다. 예술의 가치는 상식의 문제라고 간주된다.
-> 예술의 존재 이유? 그러고 보니 한 번도 고민해 본 적이 없다. 태어날 때부터 늘 예술을 접해왔기 때문일까. 말이 나온 김에 생각해 보자면, 예술을 통해 우리 삶의 단편을 볼 수 있어서가 아닐까? 다양한 삶의 궤적이 담긴 작품들은 우리에게 효용을 제공하며,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지금 내가 읽고 있는 이 책처럼!
예술은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과 우리 내면의 욕구가 맞아떨어지는 소중한 순간에만 진정 생생하게 다가올 수 있는데, 문화 저널리즘은 바로 이런 순간들을 알아내고 알릴 수 있도록 지성을 갖춰야 하고 그러면서 인류가 가진 가장 강력한 치유제를 조제하는 약사의 역할을 맡을 수 있어야 한다.
-> 종종 예술 작품들에 '시대를 앞서간 작품'이나 '뒤늦게 빛을 본 작품' 같은 워딩이 붙곤 하는데, 작가가 예술로서 나타내고자 했던 바와 당시의 감성이 맞지 않아서 발생한 일이 아닌가 싶다. 시대를 초월한 불후의 명작들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문화 저널리즘은 현재 유통되는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 대중의 내면적 고뇌를 제일 잘 보살필 수 있을 작품을 골라내는, 일종의 약사 역할을 해야 한다. (중략) 비평가는 자신의 분석을 예상 관객의 내적 안 삶과 연관시키는 쪽으로 방향을 잡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자신의 평가를 심리 처방의 형태로 전달할 것이다.
-> 내가 쓰는 서평도 문화 저널리즘이라 볼 수 있나? 저널리즘의 정의를 넓게 잡는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 지금까지는 서평을 쓰면서 나의 효용에 초점을 맞췄다면, 앞으로는 대중들이 어떤 효용을 느낄 수 있을지도 고민해 봐야겠다.
뉴스가 지배하는 시대에 온전한 판단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새로움과 중요함은 그 범주가 겹치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서로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 정보의 홍수 속에서, 모든 새로움들을 받아들이려 했다가는 과부하에 걸리고 말 것이다. 현재 나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중심을 단단히 잡고 살아가야 한다.
책의 마지막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뉴스가 더 이상 우리에게 가르쳐줄 독창적이거나 중요한 무언가를 갖고 있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챌 때 삶은 풍요로워진다. 그때 우리는 타자와 상상 속에서만 연결되는 것을 거부할 것이다. 타자를 정복하고 망가뜨리고 만들거나 없애는 일을 그만둘 것이다. 아직 우리에게는 할당된 짧은 시간 속에서 견지해야 할 자신만의 목적이 있음을 자각하면서 말이다.
뉴스는 뉴스일 뿐,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우리의 삶이란 게 책의 요지인 것으로 보인다. 현대 사회에서 지배적인 영향력을 가지는 뉴스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어떻게 변화해야 할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한 책이었는데, 신선한 관점의 내용들이 많아 재미있게 읽었다.
책을 읽으면서 충격받았던 부분 중 하나는 중립성이 언론의 중요한 역할이 아니라는 것이다. 처음 이 부분을 봤을 땐 의아했지만, 읽다 보니 납득되었다. 중립적이라는 건 곧 사실의 나열을 의미하는데, 사실 그 자체는 맥락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무의미한 글자일 뿐이다. 배경 지식이 없거나 부족한 사람들에겐 너무나 높은 진입장벽이 생긴 것이다. 따라서 사건이 발생한 맥락을 파악하고, 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알려주는 것이 약간의 편향이 들어가더라도 뉴스 수용자들에게 세상을 보는 시각을 길러줄 것으로 보인다. 받아들일지 안 받아들일지는 각자의 선택이다.
뉴스 수용자로의 관점 외에도, 글이라는 컨텐츠의 생산자로서 참고할 만한 지점이 분명 있었던 책이었다. 특히 예술에 대한 부분에서는 앞으로 내가 서평을 어떻게 써야 할지에 대한 방향을 짚어주었다고 생각한다. 뉴스라는 컨텐츠의 수용자로서, 그리고 또 다른 컨텐츠의 생산자로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지에 대한 지침을 주었기 때문이다. 정보의 홍수라 일컬어질 만큼 수많은 정보들이 쏟아지는 지금, 우선순위를 명확히 하여 나 자신에게 좀 더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좋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