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 - 1화

서영

by SeoulElectricImages

그녀는 아름다웠다. 순수하고 맑았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예뻤다.


햇살이 담장을 넘어 마당에 내리면 그 빛은 마치 그녀를 위해 준비된 무대 같았다. 서영의 얼굴은 그 빛을 받아 더욱 고와졌고, 눈동자는 샘물처럼 맑아 작은 숨결에도 반짝였다. 웃음을 머금으면 봄날의 꽃잎이 터지듯 방 안이 환해졌고, 잠시 고개를 숙이면 그 고요마저도 선명해졌다.


사대문 안의 집은 늘 질서와 정숙으로 가득했다. 대청의 문살에는 먼지 한 톨 없었고, 마루 밑 그림자조차 흐트러지지 않았다. 오래 묵은 바위처럼 단단한 규율 속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발소리를 죽이고 호흡을 줄였다. 고요는 이 집안의 전통이자 숙명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서영은 어딘가 다른 빛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단지 예쁜 얼굴만 가진 아씨가 아니었다. 글을 펼칠 때면 언제나 단정히 앉아, 문장을 다 읽고 나서야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붓끝에 맺힌 글씨는 단아했으나 힘이 있었고, 스승들조차 그녀의 글씨체만큼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인들에게도 허투루 말하지 않았으며, 웃을 때는 아이처럼 귀여웠다가도 질문을 던질 때면 누구도 답하기 어려울 만큼 예리했다. 그 순수함과 기품이 동시에 깃든 모습은 담장 안의 고요와 묘하게 어긋나면서도 빛나는 것이었다.


작은 상 위에 놓인 성경책은 아직 새것처럼 깨끗했다. 모서리조차 닳지 않았고, 종이 가장자리에 손때가 거의 묻지 않았다. 서영은 책장을 조심스레 넘겼다. 손끝이 글줄을 따라가고, 낮은 목소리가 문장을 깨웠다.


“원수를 사랑하라…”


그녀는 잠시 멈추어 고개를 저었다. 원수를 사랑한다니, 세상에 그보다 불가능한 말이 또 있을까. 가녀린 어깨는 단정했으나 눈빛은 가만히 흔들렸다. 언제나 물음표 하나를 숨기고 있는 눈. 그 눈을 본 이들은 귀엽다 하고 칭찬했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두려움도 함께 느꼈다.


문밖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씨, 점심을 들이시지요.”


서영은 소리를 알아들었다. 서영 곁을 늘 지키는 비첩, 한이였다. 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 주인의 말 한마디, 눈빛 하나에도 곧바로 마음을 읽어내는 아이. 말투는 언제나 조심스러웠지만 속정은 깊어 누구보다 서영의 마음을 살뜰히 챙겼다.


“괜찮다. 조금만 더 있다.”


서영은 책을 덮고 툇마루로 나섰다. 바람에 감잎이 흔들리며 미세한 소리가 났다. 오늘의 고요는 어딘가 달랐다. 평소처럼 단단하고 정연했지만, 그 속에서 작은 바늘이 가슴을 찌르는 듯한 낯선 기척이 있었다. 이유를 알 수는 없었으나 그녀의 내면에서 자꾸만 속삭임이 피어올랐다.


“가만히 있지 말고, 귀 기울이라.”


대청 툇마루에 앉은 서영은 성경책 모서리를 만지작거렸다. 책장은 덮었는데도 글자들이 마음속에서 자꾸 떠올랐다. 담장 너머로는 장터에서 흘러온 듯한 소음이 바람에 실려 희미하게 들려왔다. 웃음소리, 아이 울음, 엿장수의 북채 소리. 모두가 담장을 타고 들어와 집 안의 고요와 어색하게 뒤섞였다.


문득 그녀는 대청에 앉아 있을 아버지의 무거운 기침소리를 떠올렸다. 규율의 그림자가 목을 누르는 듯했다.


한이가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보고하듯 말했다.

“아씨, 이번 장날에도 그 광대패가 나왔다 하옵니다. 처음엔 잠깐 웃음만 터졌다더니, 끝에는 다 울었다 합니다.”


서영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말은 처음 듣는 게 아니었다. 처음 그 이름을 들은 건 벌써 두 달 전, 저저번 장날이었다. 아이들까지 따라 웃고, 어른들까지 넋을 잃었다는 소문이었다. 저번 장날에도 다시 떠돌았다. 이야기를 하다가, 끝내는 모두가 눈물을 훔쳤다는 소문이었다.


하인이 곁에서 조심스레 말을 보탰다.

“사람들 말씀으론, 그 사람의 춤사위와 자태가 참 멋스럽다고 합니다. 학이 나는 듯하다 하옵니다. 남정네들도, 아낙네들도 모두 넋을 빼앗겼다 합니다. 아이들까지 따라 흉내를 내며 춤을 췄다 하더이다.”


한이가 슬며시 눈치를 보며 덧붙였다.

“내일도 장이 선다 하옵니다. 이번에는… 한번 직접 보시는 것이 어떻사옵니까?”


서영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허튼 소리 마라. 나는 집안의 아씨다.”


말은 단호했으나 마음은 요동쳤다. 그 제안을 단칼에 뿌리쳤음에도 가슴 한쪽에서는 ‘가보고 싶다’는 속삭임이 점점 커져 갔다.


해가 저물자 집안은 다시 고요에 잠겼다. 대청의 문이 닫히고 등잔불만이 방 안을 지켰다. 그림자는 길게 늘어져 서영의 발치에 겹겹이 깔렸다. 낮 동안 흘러들던 장터의 소문은 귀에서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웃다가 울었다…

그 광대의 이름이 동명이라 했다…

춤사위가 멋스럽고, 자태가 곱상하다 했다…


서영은 성경책을 다시 펼쳤다. 낮에 덮었던 문장이 또렷하게 눈앞에 놓였다.

“원수를 사랑하라.”


낮에는 막막하기만 했던 문장이, 밤에는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낯선 이를 향해 마음이 움직인다는 것. 그것도 가능할까. 아니, 이미 움직이고 있는 게 아닐까.


그녀는 책 위에 손을 얹었다. 차갑게 식은 종이 위로 손끝이 고요히 머물렀다. 그러나 가슴은 뜨겁게 뛰고 있었다.


“나가면 안 된다. 나는 이 집의 아씨다. 아버지가 알면 꾸짖으실 것이다. 집안의 규율은 나 하나가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


그러나 곧 또 다른 목소리가 속삭였다.

“그러나 마음은 자꾸 담장을 넘어갔다.”


망설임은 계속 이어졌다.

“혹여 내가 요망한 마음을 품는 게 아닐까. 책에서 배운 도리를 거스르는 게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장은 두려움보다 더 크게 뛰었다.


바깥에서 개 짖는 소리가 잠시 울리다 잦아들고, 그 뒤로 희미한 노랫가락이 바람을 타고 흘러왔다. 가사는 알 수 없었으나, 그 음의 울림만으로도 등줄기에 떨림이 퍼졌다.


서영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눈물이 맺힌 것은 아니었으나, 숨결이 가빠졌다.

“내가… 왜 이렇지.”


그 순간, 멀리서 북소리가 단 한 번 울린 듯했다.


덩—.


그녀의 심장이 같은 박자로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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