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터
서영은 눈을 감았다. 낮 동안의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웃다가 울었다는 소문, 멋스러운 춤사위, 사람들의 눈빛. 그것들이 한꺼번에 가슴을 흔들었다.
“아니, 오늘은 가지 않겠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러나 곧 깨달았다. 이미 마음은 기울어 있었다. 담장 안의 고요로는 막을 수 없는 울림이 커져 있었다. 이름 하나가 그녀의 세계를 흔들고 있었다.
결심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았으나, 밤은 알아들었다. 멀리서 아주 희미한 북소리가 단 한 번 울린 듯했다. 그 소리에 맞춰 그녀의 심장이 또 한 번, 조용히 박동했다.
해가 서산에 기울 무렵, 서영은 조심스레 집을 나섰다. 책상 위에 펴둔 성경책은 한 장도 넘기지 못한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 눈으로는 글자를 따라갔지만, 마음은 장터를 향해 달려가 있었다. 규율과 고요로 지탱되는 집안의 담장은 그녀의 발걸음을 붙잡을 수 없었다. 결국 서영은 얌전한 겉옷을 걸치고, 한이에게 말도 없이 대문을 나섰다.
골목을 따라 걷자 저녁 장터로 향하는 인파가 보였다. 이웃집 아이들은 달달 끓는 엿을 입에 물고 있었고, 머리에 광주리를 인 아낙들은 서로 팔짱을 낀 채 서두르고 있었다. 숯불에 고기를 굽는 냄새, 갓 튀긴 기름 냄새, 짚신에 묻은 흙내가 뒤섞여 코끝을 간질였다. 서영은 그 낯선 향기에 설레면서도 긴장된 숨을 들이켰다. 오늘 하루는 평소의 하루와 달랐다. 마치 오래 준비된 운명이 그녀를 부르는 듯했다.
한이는 곁에서 조용히 속삭였다.
“아씨, 발길이 너무 빠르십니다.”
서영은 돌아보지 않았다.
“오늘은… 조금 빨리 걷고 싶구나.”
대답은 간단했으나, 목소리에는 설렘이 묻어났다.
장터에 도착하니 이미 군중이 북적였다. 무대라 부르기엔 소박한 나무판자 위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그 주변은 저절로 비워져 반원형 공간이 생겼다. 누구의 지시도 없었는데, 모두가 알아서 자리를 내어주었다. 서영은 그 풍경에 놀랐다. 집안에서 배운 질서는 늘 위에서 내려왔지만, 여기서는 아래에서부터 저절로 흘렀다.
장터는 소리로 가득했다. 아이들의 웃음, 장정들의 고함, 아낙네들의 흥정 소리가 겹겹이 쌓였다. 커다란 솥뚜껑이 열리며 김이 피어올랐고, 장돌뱅이들이 “사시오!” 하고 외쳤다. 그러나 그 모든 소리 위로, 사람들의 마음은 오직 하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웃음과 대화는 이어졌지만, 시선은 늘 무대 쪽을 향해 있었다.
서영은 사람들 틈에 섰다. 흙먼지가 치맛자락에 달라붙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무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이는 뒤에서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씨, 오래 계시면 눈에 띕니다.”
서영은 짧게 답했다.
“잠깐만 보고 돌아가자.”
하지만 그 목소리는 오래 머물 것을 이미 예고하고 있었다.
해가 더 기울 무렵, 무대 옆에서 사내 하나가 나타났다. 그는 화려한 옷차림이 아니었으나, 걸음걸이부터 시선을 끌었다. 허리를 과장되게 꺾어 인사하고, 손을 휘두르며 사람들에게 다가왔다. 그의 얼굴에는 큼지막한 탈이 씌워져 있었고, 목소리는 우스꽝스럽게 높았다.
“어이구, 이 고을의 장터가 이렇게 붐비긴 또 처음이구려! 다들 지갑 단단히 챙기셨소? 오늘은 지갑이 아니라 눈과 귀가 털릴 게요!”
그가 말끝마다 몸을 비틀며 과장된 동작을 보이자 아이들이 가장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들의 웃음은 금세 어른들에게도 옮겨붙었다. 안내자는 일부러 넘어지는 시늉을 하고, 다시 벌떡 일어나 과장된 절을 하며 손바닥을 탁탁 쳤다. 웃음이 한바탕 터져 나왔다.
서영은 그 웃음을 지켜보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소문으로만 듣던 광대패, 그리고 그 안에 있다는 이름, 동명. 아직 그는 나오지 않았지만, 무대의 공기는 이미 달라지고 있었다. 웃음이 지나가면, 곧 다른 울림이 찾아오리라는 걸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안내자가 무대를 물러나자 잠시 고요가 흘렀다. 짧은 침묵은 오히려 더 큰 긴장을 불러왔다. 사람들의 웃음은 금세 잦아들고, 시선은 다시 무대 중앙으로 모였다. 북이 아직 울리지 않았는데도 가슴이 먼저 울렸다. 서영은 손을 가슴 위에 얹었다. 뛰는 맥박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멀리서 아이가 휘파람을 불었다. 엉성한 가락이었지만, 그 소리만으로도 장터 전체가 잠시 조용해졌다. 사람들의 귀가 한곳으로 모였고, 서영의 호흡마저 잠시 멎었다.
저녁은 아직 완전히 내려앉지 않았다. 하늘은 붉게 물들었고, 횃불은 아직 붙지 않았다.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었다. 어둠이 완전히 깔리면, 북소리가 울리고 불빛이 올라올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이름, 동명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서영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어쩐지 몸이 뜨거워지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오늘의 웃음 뒤에 어떤 울음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다시 가슴이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