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참 살기 잘했다고 느낄 때가 있다. 바로, 날씨가 주는 평안함을 온몸으로 느낄 때다.
비바람 몰아치고, 잿빛 하늘이 며칠이고 이어질 땐 삶도 함께 축 처진다. 무기력한 마음이 눌리듯 깔리고,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러다, 어느 날 아침. 창밖으로 해가 들이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참 살기 좋은 나라야”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예년에 비해 올해는 여름이 빨리 온 것 같다. 4월에 함박눈이 내렸던 런던이었는데, 지금은 해가 인심을 쓰듯 영국 전역을 환히 비춰주고 있으니 말이다. 벌써 짧은 반팔에 배와 가슴을 드러낸 젊은이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공원마다 돗자리를 깔고 누운 사람들로 가득하다. 아이들은 잔디밭을 뛰놀고, 가족들은 피크닉을 즐긴다.
며칠 전만 해도 비바람을 그대로 맞으며 서 있던 앙상한 나무들, 민둥산처럼 깎아놓은 산처럼 휑한 가지만을 드러내고 온갖 날씨를 맞이하던 나무들이 하루아침에 푸릇한 잎을 틔우고 모양새를 갖춰간다. 머뭇거리던 봄이 꽃봉오리를 틔우면서 꽃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고, 여기저기 빨갛고 노란 꽃들이 피어나며 어느새 여름을 향해 가고 있다.
카페 앞 테라스에는 커피 한 잔을 마시는 평범한 주말이 연출이 된다. 젖병을 물리며 햇살과 함께 평온을 즐기는 부부. 애완견과 함께 하는 노부부의 산책길. 저녁이 되면 골목마다 바비큐 냄새가 피어오르고,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잔잔히 들려온다. 이 소소한 풍경 속에서 ‘살고 있다’는 감각이 선명해진다.
영국에 산다는 건 때론 긴 겨울을 견디는 일 같지만, 그 끝에 찾아오는 '햇살 한 줌'이 생각보다 강력한 위로가 된다. 그리고 그 햇살은, 이 나라가 왜 여전히 매력적인지를 말없이 증명해 준다.
해가 귀한 나라에서 쏟아지는 햇살의 은혜를 받으며 사람들의 마음이 열리고 발거음이 한결 가뿐해진다.
창문을 활짝 열고 맞이한 햇살, 따뜻한 빛 속에서 느긋하게 흘러가는 오후의 시간, 산책길에서 들리는 새소리와 잔잔한 웃음소리. 바쁜 걸음 대신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거리를 걷고, 목적 없이 나선 산책이 하루의 리듬이 되는 그런 날들이 이어지면 영국에 사는 일이 한순간 보람되게 느껴진다.
영국의 날씨는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지만 활력과 기쁨을 자아낸다 자연 앞에서 조급함을 내려놓게 되기도 하고, 흐림 속에서 미래를 걱정하게 되지만 따듯하게 흘러내리는 등의 따듯함을 맞으면 삶의 이유를 다시 찾아 나서기도 한다. 어쩌면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유난히 날씨 이야기로 하루를 시작하는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 같은 일상 속에서도 하늘빛 하나에 기분이 달라지는 걸, 여기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살아간다는 건 결국, 익숙해지는 일이다. 영국의 흐린 하늘도, 갑작스러운 소나기도, 구름 사이로 스며드는 빛도… 이젠 모두 내 삶의 일부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는 삶을 배우고 영국을 알아간다.
날씨처럼 우리의 삶도 좋은 날은 그냥 오지 않는다는 걸. 오랜 기다림 끝에 만나는 해맑은 오후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영국 날씨를 통해서 알아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