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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a Lee May 04. 2019

마드리드, 곧 만나러 갑니다

Prologue. 보라색 블루마블 도시의 추억

지금은 컴퓨터게임 뒤편으로 사라진 전설이 되어버렸지만, 블루마블 – 미국에서 건너온 보드게임으로 원래 이름은 블루마블인데, 한국에서는 한국 사람들 발음대로 한글명 ‘부루마블’로 출시되었다. - 은 명실공이 우리 세대 최고의 보드게임이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친척들이나 친구들이 여럿 모이는 날이면 심심치 않게 이 게임을 하고 놀았다.블루마블은 한 번 시작하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마성의 게임이기도 했고, 비록 종이돈일지언정 누구는 부자가 되고 누구는 파산에 이르는 매우 현실적인(?) 게임이라 은근히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곤 했다. 애써 모은 재산을 모두 잃고 파산을 선언할 때 급기야 눈물이 터지는 건 흔한 일이었다. 이런 긴장감을 잘 못 견디는 나는 가장 마음 편한 은행장을 하고 싶었지만 보통은 멤버 중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이 먼저 은행장 역할을 가져가 버리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블루마블을 좋아한 이유는, 게임판 위에 알록달록 펼쳐지는 세계 각국의 도시들 때문이었다. 색색의 작은 직사각형 말판에는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도시들의 이름이 한글로 적혀 있었는데, 모두 내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미지의 세상이었다.넓고 납작한 종이상자의 뚜껑이 열리고 네모난 놀이판이 방바닥에 넓게 펼쳐지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그것은 상상 속의 세계여행이 시작되는 시간. 주사위를 던지고 나온 숫자만큼 내 말을 움직여 멈추는 곳이 나의 새로운 여행지였다. 그렇게 한 도시를 방문하고, 땅을 사고, 운 좋아서 다른 사람들이 자꾸만 그 도시에 찾아오면 돈이 들어왔고, 그 돈으로 집을 짓고, 빌딩도 짓고, 호텔도 지었다. 나는 게임운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라(그래서 절대 도박은 안 한다!), 말판 가득 호텔이나 빌딩을 지어본 적이 없다. 대체로 일찌감치 파산하거나, 공격적 게임형 친구들이 투자와 파산을 반복하는 동안 그 사이에서 엉거주춤 은행잔고를 유지하다 게임을 끝내는 식이었다.그런데 딱 한번, 블루마블 게임에서 엄청난 부자가 된 적이 있다. 두 번째 모퉁이를 돌아 첫 번째 도시인 마드리드. 그 보라색 말판에 내 말이 가장 먼저 닿은 김에 땅을 샀는데, 이후로 주사위를 던지는 사람들이 신기하게도 던지는 족족 마드리드에 걸렸다. 다들 “어어, 이거 뭐야? 또 마드리드야??” 하며, 웃다가 짜증내다가 하면서 나에게 세금을 냈다. 나는 그 돈으로 마드리드에 집도 짓고 빌딩도 짓고 호텔도 지었다. 그 판 내내 이 신기한 상황은 계속되었다. 나중에는 부동산 투자 한도까지 채우고도 돈이 남았다. 그날 마드리드는 블루마블 지도에서 가장 비싼 도시가 되었고, 마드리드에 말이 걸리는 차례대로 한 사람씩 파산해서 나가 떨어졌다. 결국 그날의 승자는 내가 되었다. 그게 초등학교 5학년인가 6학년쯤 되었는데, 솔직히 난 그 때 마드리드가 스페인의 수도인 줄도 몰랐다. 하지만 이후로 내가 블루마블 게임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될 때까지 그런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블루마블 게임 때문에 마드리드에 가기로 결심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마드리드 한달살이를 결심했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이 바로 그 보라색의 작은 직사각형 말판이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블루마블 게임을 하며 놀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소환해 냈을 때, 선득 마음에 한 줄기 바람이 불었다. 12살 소녀였던 나에게 행운이 되어준 보라색 미지의 도시를 곧 만나러 간다는 사실이 설렘과 두려움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곳에서 만나게 될 모든 사람과 사물, 공간과 공기, 실패와 행운을 기꺼이 하나도 놓치지 않고 받아 안으리라, 마음먹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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