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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a Lee Mar 31. 2020

소박하고 특별한 저녁밥상의 기록

3월28일 : 7주년 결혼기념일을 보내며

Dear diary.


벌써 7주년! 오늘은 존과 내가 결혼한 지 7년째 되는 날이야. 늘 결혼기념일 저녁에는 좋아하는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곁들여 식사를 하고 소소한 선물을 주고받았는데, 처음으로 집에서 저녁을 먹게 되었어.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이지 뭐. 펍과 레스토랑, 카페 등 일반적인 상업공간은 전부 다 문을 닫았거든. 게다가 바이러스의 확산 속도가 심상치 않자 어제부로 아일랜드정부도 한 단계 높은 이동제한 명령을 발동했어. 이제 슈퍼마켓, 약국, 병원, 회사일 때문에 나가는 것 아니면 집에 있어야 해. 산책도 2킬로미터 반경 안에서 하루에 한 번만 가능하고. 함께 다닐 수 있는 사람 수도 4명에서 2명으로 제한되었어. 테이크어웨이는 여전히 가능하지만, 배달음식을 사먹는 것보다 같이 맛있는 거 만들어서 먹는 게 더 좋겠다 싶더라. 그래서 아침을 먹자마자 일찌감치 장을 보러 커넬스코트에 있는 던스토어에 갔어. 그런데 맙소사, 줄이 2겹으로 주차장 끝까지 이어져 있는 거야.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슈퍼마켓이 안이 너무 붐비지 않도록 인원수를 제한해서 들여보내고, 줄 간격도 최소 1미터 이상 떨어져 서도록 하는 거지. 토요일이라 사람이 많을 거라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어. 다른 때 같으면 그냥 가고 평일 사람 적을 때 다시 오자, 했을 텐데 날이 날인만큼 꼭 장을 봐야 하잖아. 하는 수 없이 장바구니를 들고 그 긴 줄 끝에 합류했지. 3월 말인데도 날씨가 여전히 많이 쌀쌀했어. 그나마 비가 안 오고 햇빛이 머리 위로 내리는 것만으로도 감사했지. 찬바람이 옷깃을 파고 들 때마다 제자리 뜀뛰기를 하면서 30여 분을 버틴 후에야 던스토어 안으로 당당히 입장! 하지만 입구에서부터 식료품 코너까지 또 끝이 보이지 않는 긴 줄이 이어져 있는 거야. 그래도 찬바람을 피할 수 있는 게 어디야. 게다가 기다리면서 마시라고 커피와 차까지 무료로 나눠주니 고맙고 따뜻했어.

그렇게 또 다시 20분... 존이랑 수다를 떨면서 기다리니 지루하지는 않았어. 드디어 우리 순서가 되어 식료품점 안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일종의 성취감마저 들더라. 먼저 오늘 저녁에 만들 병아리콩스튜 재료로 가지, 호박, 브로콜리, 양파, 파프리카, 토마토, 병아리콩을 바구니에 넣고, 곁들여 먹을 신선한 바케트, 올리브와 과일도 좀 샀어. 집에 오는 길에 존이 주유소 상점에 들르더니 나에게 줄 카드와 꽃다발을 사왔어. 노란 수선화와 분홍 히야신스, 분홍 튤립이 섞여 있었는데 주유소표 꽃다발치고는 꽤 예쁘더라. 수선화가 섞여 있는 꽃다발을 발견해서 아주 뿌듯해하는 눈치였지. 내가 2월 생일이라 2월 탄생화인 수선화를 좋아하거든. 추위에 강한 지 아일랜드 땅에서도 잘 자라나봐. 2월부터 쏟아져 나오는데 단돈 1유로면 열 송이 묶인 작은 다발을 살 수 있어. 볼 때는 빈약해 보여도 열 송이가 일제히 봉오리를 열기 시작하면 꽃병이 가득해 보일 만큼 풍성해져. 차 안에서 존이 꽃다발을 안겨 주기에, 난 아까 던스토어 화장품 코너에서 그의 선물로 산 주름개선 수분크림을 건넸지. 우리는 "해피 에니버서리!”를 외치며 작은 키스를 나누었어. 그리 낭만적인 선물 증정 방법은 아니었지만 난 충분히 행복했어. 이런 우리를 보면 젊은 미혼들은 ‘결혼 7년차쯤 되었으니 낭만은 사라지고 현실만 남은 거지‘ 하고 생각할 지도 모르지. 사실 나도 그랬고. 그런데 오히려 결혼 생활을 하면서 옛날에는 시시하다고 생각했던 소소한 것들에서 낭만도 발견하고 감동도 더 많이 느끼게 되더라. 겉으로 보이는 낭만적인 ‘행위’에 집착하지 않게 된달까? 서로의 ‘진심’을 이해하면 행위의 부족함에도 너그러워지고, 일단 부부 사이에 서운해 하지 않으면 싸울 일도 줄어드는 것 같아.

덕분에 오늘 저녁 식탁은 아주 풍성했지. 먼저 스페인 리오하산 레드와인을 땄어. 딱 두 개 있던 와인잔을 존이 차례로 깨뜨려 없앤 탓에, 스페인친구 로사가 선물해준 머그잔을 개봉했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마드리드의 예쁜 동네 ‘말라사냐’ 이름이 새겨진 머그잔에 스페인 와인을 따르니, 코로나 때문에 취소한 마드리드 여행이 떠올랐지. 아쉽고 슬펐지만 여행보다는 코로나 피해가 심각한 마드리드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잔을 부딪쳤어.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운 바게트를 사선으로 얇게 잘라 접시에 얹고, 올리브와 후무스, 크림치즈, 바질페스토, 샐러드를 세팅했어. 존의 접시 위에는 살라미와 연어가 덤으로 올라갔고. 스튜가 익는 동안 우리는 빵과 샐러드로 전채를 즐겼지. 우리나라 잎상추처럼 생긴 아이리시 양상추, 태양초 고추처럼 길고 빨간 파프리카, 작은 타원형의 플럼 토마토, 양파를 넣고 올리브오일과 발사믹비네거로 드레싱한 간단한 샐러드였는데, 내가 만들었지만 참 맛있더라. 드디어 스튜를 맛볼 시간이야. 인디언 향신료를 듬뿍 넣어 매콤하면서도 시원하게 끓여낸 스튜가 우리 식탁에 올랐어. 연애시절, 존이 채식하는 나를 위해 개발한 스튜인데 처음 맛본 순간 둘 다 ‘이건 우리 시그니처 메뉴’라고 확신했던 바로 그 오리지널 병아리콩스튜였지. 일단 국물부터 살짝 떠서 맛을 봤는데 ‘헉!’ 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맵고 향이 강한 거야. 존이 야심차게 준비한 기념일 식사라 너무 정색은 못하겠고 이 음식을 어떻게 고쳐서 먹어야 할까 머리만 바쁘게 굴리고 있었지. 그때 존이 말했어. “흠.. 아무래도 고춧가루랑 큐민을 너무 많이 넣었나봐. 맛이 너무 강하지?” 요리사가 먼저 인정했으니 자연스럽게 내 의견을 솔직히 말했지. 존의 동의하에 난 국물의 3분의 1을 과감히 따라버리고 그만큼 물을 더 부은 다음 코코넛 밀크를 넣어 다시 한 번 끓여냈어. 결과는 성공적! 매운 맛과 짠 맛이 순해지면서 국물이 알맞게 매콤했고, 건더기로 들어간 야채도 알맞게 익은 데다 서로 간 맛과 질감이 사이좋게 어울리고.

맛있게 한 그릇씩 비우고 나서 난 존이 준 카드를 펼쳐 읽었어. ‘이 낯설고 혼란스런 시간을 나와 함께 해줘 고마워.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함께 이겨내자. 이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나면 우리는 더욱 단단해져 있을 거야. 사랑해.’ 그의 카드를 읽을 때면 언제나 그렇듯 눈물이 났어. 좋은 사람.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사람. 내가 선택한 사람. 앞으로도 늘 함께할 사람. 우리의 7주년 결혼기념일은 이렇게 둘만의 소박한 저녁식탁에서 따뜻한 기억으로 새겨졌어. 이제 곧 4월이고, 그럼 좀 더 봄날 같은 날들이 많아지겠지. 바이러스가 빨리 잠잠해져서 봄볕을 마음껏 마중하러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럼 이만 총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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