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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a Lee Apr 02. 2020

조금 느려진 삶이 가져다 준 변화

3월 30일 : 일상의 변화 속에 내 안의 나를 만나다

Dear diary. 어제부터 써머타임이 시작되었어. ‘써머’라면 여름. 날씨도 날짜도 겨우 초봄이라 불러줄 만한데 고장난 알람처럼 여름이 시작되었다고 알려주는 거야. 그런데 어제 오후에 이웃동네에 있는 숲으로 산책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하늘을 보니 5시가 훌쩍 넘었는데도 햇빛이 여전히 기세등등하더라. 써머타임으로 1시간 빨라진 후인데도 말이야. 모르는 사이 해가 제법 길어져 있었던 거야. 일반적으로 북유럽을 지칭할 때 아일랜드는 포함하지 않지만 아일랜드도 위도가 꽤 높아서 여름해와 겨울해의 길이가 드라마틱하게 달라지거든. 이곳 사람들은 5월부터 여름이라고 부르는데, 여전히 톡톡한 카디건을 걸쳐야 할 만큼 쌀쌀해. 한국의 따뜻한 5월의 공기가 몸의 기억 속에 각인된 나에게는 영 피부로 다가오지가 않지. 아일랜드의 여름은 온도와 상관없이 길어진 해와 함께 찾아오는 것 같아. 아일랜드의 코로나 상황은 여전히 안 좋아. 매일 확진자와 사망자가 배로 증가하고 있는데, 보건당국은 4월 중순쯤 피크를 찍을 거라 예상하고 있어. 의료시설, 의료진, 검사키트 등 모든 것이 부족해 검사진행이 원활하지 않다 보니, 증상이 뚜렷한 사람만 검사를 신청하라는 분위기야. 최근 2미터 거리두기가 충분하지 않다는 기사를 읽고 난 뒤, 슈퍼마켓에 가는 것도 은근 불안한 거 있지. 여기 사람들은 마스크도 안 하고 다니니까 더 불안해. 그래서 요즘은 식료품을 사러 가는 횟수도 일주일에 두 번으로 줄이고 거의 집안에서 하루를 보내고 있어.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인 것은 4주째 접어든 이 집콕생활에 점점 적응하고 있다는 거야. 그것도 아주 잘. 솔직히 처음 2주는 뭘 하며 하루를 보내야 할 지 몰라 거의 맨붕상태로 시간만 흘려  보냈어. 집에만 있기는 답답해서 자주 밖에 나가고, 그렇게 나갔다 들어오면 더 불안한 마음이 들고, 그러니 잠도 잘 못자고. 뭔가 생산적이고 의미 있는 일을 하지 않고 있는 상태에서 오는 죄책감과 스트레스가 엄청 컸던 것 같아. 그런데 더 이상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었어. 그래서 큰맘 먹고 집안 구석구석 안 쓰는 물건들을 싹 정리했지. 늘 카페에서 일하고 글 쓰느라 버려뒀던 침실의 작은 책상도 깨끗이 닦아 한 곁에 읽은 책과 스페인어교재, 필통을 깔끔하게 올려뒀어. 그렇게 한결 넓어지고 정돈된 집을 보니 마음이 훨씬 안정되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싶은 욕구가 마구 샘솟더라. 그 책상에 앉아 한동안 멈췄던 글쓰기를 시작했어. 그리고 스페인어공부도 다시 시작했지. 존과 둘 사이의 공동생활에도 조화로운 패턴이 생겼어. 아침을 먹고 존이 브레이 바닷가로 조깅하러 다녀오는 동안 나는 집에서 1시간씩 유튜브 동영상을 보면서 요가를 해. 존이 운동하고 돌아온 후 점심때까지는 각자의 시간이야. 나는 주로 방에서 글을 쓰고 존은 거실에서 기타를 치지. 점심을 함께 먹고 나서 다시 한두 시간 정도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하다가 3시쯤 함께 산책을 하러가. 최근 발견한 최고의 산책 장소는 이니스케리에 있는 ‘녹싱크 자연휴양림(Knocksink Wood Nature Reserve)’이야. 집에서 차로 10분 거리, 위클로 산자락에 위치한 아담한 숲인데 일부러 다듬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만날 수 있는 곳이지. 맑은 개울을 끼고 구불구불 완만하게 이어지는 아름다운 숲길을 따라 걷다보면 어느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따스한 위로로 가득 차오르곤 해. 아무래도 나는 이 숲과 사랑에 빠진 것 같아.

오늘도 우리는 이니스케리로 향했어. 이니스케리 타운에 있는 교회 옆에 차가 들어갈 수 있는 입구가 있지만, 우리는 주로 근처에 차를 세워두고 거기서부터 걷기 시작해. 원래 대중적으로 알려진 곳은 아니지만 요즘은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찾는 사람이 더 적은 듯해. 그런데 나는 사람들이 계속 이곳을 잘 몰랐으면 좋겠다는 이기적인 마음이 들어. 그냥 나와 존의 비밀아지트로 간직하고 싶은. 차의 진입을 막아놓은 낮은 가림목을 넘어 숲길로 들어섰어. 숲을 채우는 건 온통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 그리고 나와 존의 발소리뿐이야. 아주 가끔씩 사람들을 마주쳐. 보통은 어린아이들, 반려견을 데리고 나온 가족들이야. 가끔씩 개들이 개울 속으로 뛰어들어 첨벙첨벙 청량한 물소음을 내고, 가끔씩 아이들이 까르르 웃고. 그러다 다시 정적. 짙푸른 녹음 사이로 흐르는 고요는 신기하게도 적막하거나 쓸쓸하지 않아. 푸른 생명이 흐르는 존재들이 다정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보호해주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오후 산책을 마치고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으로 창으로 스며드는 늦은 오후 해의 미온을 느끼고 있는데, 가슴 속에 잔잔한 행복감이 차오르더라. 그동안 참 바쁘게 아니, 바쁘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 속에 살았던 것 같아. 매일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어떤 결과물을 내지 않으면 하루를 잘 살지 못했다는 열패감을 느끼곤 했어. 전에는 이렇게 반복적이고 느리게 흐르는 일상에서도 나만의 질서와 변화를 만들어내고 밀도 있는 행복을 즐길 수 있다는 걸 미처 몰랐어. 코로나 때문에 얼떨결에 마주하게 된 새로운 일상 속에서, 나는 내가 잘 몰랐던 나를 조금씩 발견하고 내가 잘 돌보지 못했던 나의 속자아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어. 코로나 때문에 전 세계 공장들이 문을 닫고 사람들이 만약을 위해 소비가 줄이면서 지구의 대기 오염 농도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대. 지금 우리 인류가 당하고 있는 고통만큼 그동안 자연도 많이 아팠던 거야. 코로나로 가족들이 하루 종일 집에서 함께 지내게 되면서 일어나는 변화가 전혀 다른 두 가지 방향으로 나타난대. 그동안 각자의 생활에 바빠 등한시 하던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 깨닫고 더 친밀하고 깊이 사랑하게 되는 경우. 또 하나는 집에서 하릴 없이 술 먹고 취하면 도망칠 곳 없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 어쩌면 전 인류가 사회적 거리를 두며 보내는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그동안 당연하게 누렸던 것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때가 아닐까? 가족과 친구들, 이웃나라들, 우리를 둘러싼 자연... 나와 함께 이 지구에서 살고 있는 모든 존재들에 대해 감사하고 반성하고 결심하는 소중한 시간으로 보내고 싶어. 응원을 부탁하며, 그럼 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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