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aya Lee Sep 29. 2016

서늘한 여름밤에 찾아온 위로

그라나다의 태양이 그리울 때 기억할 거야

그리나다에서 처음 맞는 일요일, 휴대폰의 날씨 앱을 확인하다가 눈이 크게 떠졌다. 그라나다의 한주간 날씨를 알려주는 창의 화요일 칸에 빗방울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게다가 표시된 기온은 18도. 게다가 수요일부터 주말까지 표시된 최고 기온이 모두 25도 아래였다. 믿어지지 않았다. 이게 정말이라면 내 기도의 응답이 분명했다. 아니, 날 위해서 매일밤 기도해준 존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 분명했다. 내가 "화요일에 비온대!" 라며 좋아했더니 스벡은 말도 안된다며 믿지 않았다. 내가 스벡에게 피부알러지 때문에 괴롭다는 얘기를 하긴 했어도, 그는 태양의 나라 스페인, 그것도 남부 안달루시아에 와서 비를 찾는 나를 이해하기 힘든 눈치였다.
다행히 내 피부는 최악의 상황을 지나 아주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아무리 지루하고 지겨워도 낮에는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열심히 햇빛을 피한 덕분인 듯했다. 나는 매일 일몰이 시작되는 저녁 8시만 기다렸다. 8시 넘어 해가 이울고 시원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장도 보러가고 동네 산책도 하며 낮 동안 답답했던 마음을 달랬다.

그날 늦은 오후 리카가 묵던 방에 새 동거인이 들었다. 체코에서 온 마르게타. (그녀의 이름을 듣는 순간 마르게리따 피자가 생각났고, 존과 종종 가던 몽스타운의 작은 이탈리아 레스토랑의 마르게르따 피자가 너무나 먹고 싶었다.) 프라하에서 회계사로 일하는 그녀는 2주의 여름휴가를 투자해 스페인어 공부를 하려고 왔단다. 똑똑하고 차분하고 착해 보였다.
그날 밤, 스벡이 자기가 동네에서 발견한 타파스바에 같이 가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마침 마르게타도 왔겠다, 서로 낯도 익히고 친해질 겸, 앞으로 한 달 간 살게 될 동네 탐방도 할 겸 흔쾌히 스벡을 따라나섰다. 그라나다에 일주일 먼저 도착한 스벡은 선배답게 우리를 데리고 다니며 가까운 수퍼마켓의 위치와 쓰레기 분리수거하는 곳을 알려준 다음, 자기가 제일 좋아한다는 타파스바로 안내했다. 병아리색 벽이 눈이 띄는 아주 작은 바였다.
"처음에 우연히 발견하고 여기 들렀는데 타파스 메뉴가 뭔가 다른 바랑 다른 거야. 프랑스 음식 같다 생각하면서 주인이랑 얘기하는데 주인이 진짜 프랑스 사람인 거 있지. 맥주도 싸고 맛있고 음식도 끝내줘!"
1.8유로에 맥주 한잔과 타파 하나를 고를 수 있는 착한 가격이다. 게다가 작은 잔(카냐)을 시켰는데, 여느 바보다 훨씬 큰 잔에 맥주가 가득 담겨 나왔다. 채식주의자가 먹을 수 있는 메뉴가 달랑 카프레제 샐러드(그것도 타협해서 치즈를 먹어야만) 밖에 없다는 것이 함정이었지만, 맥주가 신선하고 맛있는 데다 프랑스인이라는 주인도 친절하니 다 용서되었다. 무엇보다 손님이 모두 동네주민이라 그라나다인들의 진짜 일상을 엿보는 재미가 있었다. 문득 한국의 동네 호프집에서 동네친구들이랑 맥주 한잔 하는 기분이 들었고, 아주 오래 전에 마지막이 되어버린 '한국의 동네친구와 동네호프집'이 너무나 그리워졌다.

한잔 마시고 다른 바에서 또 한 잔, 그리고 또 다른 바로, 메뚜기처럼 이 바에서 저 바로 옮겨다니며 먹고 마시는 스페인 사람들처럼, 우리도 맥주 한 잔을 비운 후 스벡이 발견했다는 두 번째 바로 향했다. 첫번째 타바스바가 망원동 골목 젊은이들의 아지트 같은 곳이었다면 두 번째 바는 진정한 아저씨들의 호프집. 이곳도 2유로에 맥주와 타파 하나를 골라 먹을 수 있다. 메뉴판에서 사금파리 찾듯 찾아낸 시금치고로케와 작은 맥주를 시켰는데, 시금치가 가득 든 따끈한 고로케의 맛은 기대 이상! 자리가 없어서 바에 서서 먹어야 했지만 그것도 나름 스페인스러워 재밌는 데다 그라나다 아저씨들 훔쳐보는 재미도 쏠쏠해, 나는 속으로 두 군데 타파스바 중 아저씨 호프집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돌아온 화요일 저녁,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았건만 진짜로 비가 왔다. 그날도 난 뜨거운 햇살을 피해 학교가 끝나자마자 집으로 왔고, 샤워와 낮잠 후 책상에 앉아 학교 과제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때 문득 사위가 어두워지는 걸 느꼈고, 후두두둑 창에 부딪히는 물소리를 들었다. 난 재빨리 창문을 열었다. 빗방울들이 꽤 가파르게 떨어지며 빠른 속도로 땅을 적시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자유롭게 창을 넘나들며 내 얼굴을 쓸고 갔다. 너무 기분이 좋아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환호성을 질렀다. 나는 서둘러 신발을 꿰차고 우산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아일랜드의 비를 지긋지긋해 하던 나는 그라나다에 도착한 지 일주일 만에 빗방울 하나하나에 입맞춤이라도 할 기세로 비를 환영하고 있었다. 짧은 우중산책 후 집에 돌아와 보니 울긋불긋하던 피부의 돌기들이 눈에 띄게 가라앉아 있었다. 가려움도 훨씬 덜했다. 오랜 긴장감 끝에 찾은 안도감 때문인지 주책스럽게 자꾸 눈물이 났다. 그리고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저절로 수없이 되뇌어졌다. 저녁 7시 조금 넘어 내리기 시작한 비는 두어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내렸다. 비가 내리는 모습이 그토록 기쁘고 감격스럽기는 처음이었다.

"아일랜드는 이제 많이 쌀쌀해졌어... 그나저나 피부는 좀 어때?"
"응, 다행히 좀 나아졌고 더 심해지지는 않는 것 같아. 다시 도지지 않게 열심히 햇빛 피하면서 다니고 있어."
존과 매일 통화를 한다. 떨어져 있으니 더 애틋하고 보고싶고,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힘이 나고 위로가 된다. 그와 통화하며 9월의 아일랜드 날씨를 기억해낸다. 언제 여름이었나 싶게 으슬으슬 춥고 비가 수시로 쏟아지는 아일랜드의 9월... 날씨 앱을 확인해 보니 요즘 최고온도가 20도 밑을 내리도는 듯했다. 벌써 겨울로 들어서려는 것이겠지. 하지만 이번에 아일랜드에 돌아가면 아무리 춥고, 아무리 비가 많이 오고, 진짜 참기 어려울 만큼 혹독하더라도 절대로 불평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분명 가증스럽게도 이 화려한 안달루시아의 태양이 금새 그리워지겠지만, 그때마다 그라나다의 어느 저녁 비와 바람에게 느꼈던 깊은 위로와 고마움을 기억해낼 것이다.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