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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지기 마야 Oct 06. 2020

나 운전면허 네 번 떨어진 여자야!

호락호락하지 않았던 미국 운전면허 도전기

내 나이 스물한 살 겨울 방학 때 고대하던 운전면허를 발급받았다. 


1종 보통 면허 시험에 응시해서 필기와 실기를 한 번에 붙었다. 다만 도로주행에서 한 번 떨어졌는데, 액셀 라이터와 브레이크의 접점을 찾지 못해 주행 중에 시동을 한 번 꺼뜨렸다. 시동을 꺼뜨리게 되면 바로 실격이라 안타깝게도 첫 번째 도전은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두 번째 응시에서 합격을 해서 면허증을 손에 쥐었다. 


운전면허증을 발급받더라도 바로 운전을 할 차량이 없으면 면허증을 장롱 속에 고이 모셔두어야 한다. 다행히 나는 운이 좋게도 대학교 3학년 때 언니 친구 동생이 몰던 빨간색 프라이드를 얻게 되었다. 오래된 차였고 폐차할 때도 다 된 차였지만 운전 연습 삼아 타 보라고 해서 얻게 되었다. 


빨간색 프라이드가 나의 첫 차가 되었다. 수동이었고 핸들도 파워핸들이 아니어서 후진을 하거나 주차를 할 때면 양팔의 근력을 총동원해서 돌려야 했다. 창문도 손으로 돌려서 내리는 차였다. 진짜 오래된 구식 차였지만 덕분에 나는 베스트 드라이버가 되었다. 


1년 정도 프라이드를 타고 폐차하자 큰 형부가 차를 바꾸게 되어 보라색 엑센트를 받게 되었다. 한국에 있을 때 나는 계속 운전을 했고 무사고 8년을 채우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 갈 때 국제면허증을 발급받았는데, 국제면허증은 6개월이 만료라 그전에 미국 운전면허증을 따야 했다. 나는 한국에서의 운전 실력만 믿고 멀고도 험난했던 미국 운전면허증을 따기 위한 모험을 시작했다. 





내가 미국에 막 도착했을 때 나의 영어 수준은 신생아 수준이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생 때 토익도 공부하고 회화도 꾸준히 공부했건만 나는 현지인들의 영어를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래도 영어를 읽을 수는 있었다. 그래서 운전면허 즘이야 식은 죽 먹기 일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자만이었다. 

 

한국 사람들이 많이 사는 LA나 뉴욕은 필기시험이 한국어로도 지원이 가능하다고 했는데, 내가 처음 머물렀던 애리조나주는 그렇지 않았다. 처음 필기시험을 치르던 날, 나는 당황했다. 분명히 운전면허 시험 문제집을 보고 갔는데도 글자(영어)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주어진 시간 안에 마쳐야 했기 때문에 일단 찍었다. 찍다 보니 과락에 걸려 보기 좋게 탈락을 했다. 


함께 시험을 보러 갔던 동료는 필기를 통과하고 실기까지 한 번에 통과해서 면허를 발급받았다. 물론 그분은 캐나다에서 오랫동안 유학을 했고 한국에서도 외국계 회사에서 근무했던 분이라 나의 신생아 영어 수준과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함께 시험을 치렀는데 한 명은 통과를 하고 나는 못했으니 솔직히 창피했다. 이미 나와 출반선이 달랐지만 나는 의기소침해졌다. 


시험에 한 번 떨어지면 72시간 내에는 다시 시험을 응시할 수 없기 때문에 며칠 뒤에 나는 다시 시험을 치러 갔다. 이번에는 조금 더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영어 단어가 어려웠다. 


나는 그때까지도 혼란스러웠던 것이다. '나는 운전을 할 줄 아는데'라는 생각이 영어로 필기시험을 쳐야 한다는 현실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첫 번째 도전했을 때보다는 조금 더 공부를 했지만 두 번째도 떨어졌다. 부끄러움은 내 몫일 뿐이었다. 


그제야 현실이 파악되었다. 나는 도움이 필요했다. 


재미교포인 동료에게 과외를 부탁했다. 그분이 영어와 한국어로 설명을 해 주면서 필기시험 준비를 도와주었다. 


그때 나는 한 가지 알게 되었다. 나의 부족한 영어실력만이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한국과 다른 미국의 교통법도 나는 모르고 있었던 것이 많았다.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내가 어떤 부분에서 막혀 있었던 것인지. 과외 덕분에 나는 세 번째 응시한 필기시험을 다행히 통과를 했다. 날아갈 듯이 기뻤다. 


필기를 통과하자 나는 실기 시험은 문제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나는 운전을 잘하니까!




필기시험 통과 후 바로 실기 시험을 응시하고 시험장으로 갔다. 금발의 백인 중년 여성이 체크리스트를 가지고 함께 나왔고 나는 운전석에 앉았다. 실기는 한 번에 붙겠다는 일념으로 나는 비장하게 운전대를 잡았다. 


시험관이 뭐라고 얘기를 했다. 나는 알아듣지 못했다. 


'응, 뭐지?'


시험관이 뭐라고 몇 번 반복해서 얘기를 했는데도 나는 알아듣지 못했다. 시험관이 운전석으로 다가와서 차에서 내리라고 했다. 나는 실기시험을 시작해보지도 못하고 탈락을 한 것이다. 


백인의 금발 시험관은 자신의 말을 못 알아들으면서도 용감하게 운전면허를 응시한 동양인 여자를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음에 올 때는 통역을 해 줄 사람을 데리고 오라고 했다. 그래야 시험을 칠 수 있을 거라고 얘길 해 주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서 있는 그곳이 내 모국어 한국어와는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남의 나라 미국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믿고 준비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몸으로 부딪힐 생각부터 했을까?


한심하기 이를 때가 없었다.


하지만 한심하다고 두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미국에서는 차 없이는 생활이 어렵다. 물 하나를 사려고 해도 운전해서 10~20분 이동해야 그로서리 스토어를 갈 수 있다. 도심 한복판에 살지 않는 이상 차 없이 먹고 살기는 어렵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운전면허를 따야 했다. 


이번에는 실기시험 과외에 돌입했다. 

실기를 한 번에 통과했던 동료에게 테스트 과정을 하나씩 듣고 준비를 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분이 통역을 도와주기로 해서 한결 마음이 놓였다. 통역을 해 준다면 분명히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일주일 뒤에 다시 면허 시험장에 갔다. 이번이 벌써 다섯 번째다. 매번 반복했던 시험 접수는 이제 식은 죽 먹기가 되었다. 그래도 필기를 통과했으니 얼마나 다행이었던지. 


실기시험 접수를 하고 기다리니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통역을 해 줄 동료와 함께 야외 시험장으로 나갔다. 


지난번과 다른 시험관이 나왔다. 지난번 시험관보다는 조금 푸근한 인상의 백인 중년 여성이었다. 나의 동료가 시험관에게 내 실기시험을 위해 본인이 통역을 해 줄 거라고 얘기했다. 그런데 시험관은 미국에서 운전할 건데 영어를 못 알아들으면 어떻게 운전을 할 거냐며 통역을 해 주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고 했다. 


"What?"


순간 화가 났다. 


'이것들이 동양인이라고 무시하는 건가? 왜 이랬다 저랬다 자기 맘대로야?' 

분명히 지난번에는 통역하는 사람을 데려오라고 했는데 시험관에 따라 요구사항이 다른 게 말이 되나 싶었다.


그런데 방법이 없었다. 내가 화를 낸다고 통역을 허락해 줄 것 같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시험관의 요구 사항을 따르는 수밖에. 


'그래, 될 대로 돼라! 또 떨어지면 또 도전하면 되지, 뭐.'하고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나는 이제 시험에서 떨어지는 게 두렵지가 않았다. 한국에서는 익히 경험하지 못했던 뻔뻔함과 철판을 애리조나 주 사막 한 복판에 있는 운전면허 시험장에서 장착하게 된 순간이었다.  


시험관의 말을 순순히 따르며 운전석에 앉았다. 운전석에 앉은 순간 시험이 시작되었다.


초조한 눈빛의 동료의 얼굴이 보였지만 나는 편안하게 웃고 있었다. 떨어질 걸 이미 각오를 했기에 그냥 또 경험해보자고 생각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번에는 시험관의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문장 전체를 다 알아듣지는 못해도 무엇을 지시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주차장에서 간단한 테스트(시동을 켜라, 브레이크를 밟아라, 좌회전, 우회전 깜빡이를 켜라  등등)를 가볍게 통과했다. 나로서도 무척이나 신기한 경험이었다. 


알아듣지 못해 소음으로만 느껴졌던 영어가 언어로 들리는 순간이었다. 약간의 자신감이 생겼다. 


시험관이 조수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제 도로주행을 치를 시간이었다. 시험관이 지시하는 방향을 따라 운전을 시작했다. 살짝 긴장은 되었지만 그래도 지시사항을 주의 깊게 들으며 미국 교통법규에 따르며 운전을 했다. 옆자리에 앉은 시험관은 내가 실수를 하는 부분에서는 체크리스트에 체크를 하면서도 편안하게 운전할 수 있게 얘길 해 주었다. 


약 10분 정도 되었던 도로주행을 드디어 마쳤다. 면허 시험장의 주차장에 들어섰을 때 시험관이 밝게 웃으면서 통과를 했다고 얘길 해 주었다. 만점은 아니었지만 80점대로 마침내 나는 도로주행을 합격하고 운전면허증을 발급받을 수 있었다. 


나도 기뻤지만 나와 함께 나의 기나긴 운전면허 여정을 함께 해준 동료도 나의 합격을 기뻐해 주었다.





여러 번 시험에 떨어졌을 때 많이 창피하고 자존심도 상했다. '나는 운전을 할 줄 아는데'라는 나의 생각이 나를 혼란스럽게도 했다.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 시간을 거치면서 그래도 영어 공부를 하게 되었고 실패를 통해 듣기 실력도 조금 향상되었다. 


그 뒤로도 미국 생활을 하면서 나는 바보 같은 짓도 많이 저지르고 부끄러운 일도 많이 겪었다. 그렇지만 그 시간을 통해서 많이 단련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미국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런 일을 통해서 나는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덕분에 조금 더 열린 사고를 할 수 있게 되었고 다양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미국은 주(state)만 바뀌어도 많은 것이 다르다. 그래서 한 주가 마치 다른 나라같이 느껴질 때가 많다. 그때는 30대 초반이라 무턱대로 몸으로 먼저 부딪혔지만 지금 다른 언어와 문화에 적응해야 한다면 그때보다는 조금 더 현명하게 준비하고 대처할 수 있을 것 같다.


설사 준비하고 도전했는데도 실패한다고 해도 괜찮다. 또다시 도전하면 되고 실패를 통해 나는 경험을 쌓게 된다는 것을 네 번의 실패를 통해서 나는 배웠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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