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아빠로부터 친할머니의 부고소식을 전해 들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과 함께 작은 흐느낌을 남긴 채 짧은 아빠와의 통화를 마쳤다.
밤새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며 할머니를 떠올렸다. 보름달 같은 둥근 웃음으로 어디를 가나 "참 고우세요"라는 말을 들으셨던 할머니. 작년에 잠깐 한국으로 할머니를 뵈러 갔을 때 침대에 온종일 앉아 계시며 고모가 사다 주신 간식거리를 권하던 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시렸다.
"정아야, 이것 좀 먹어 봐"
사랑하는 손녀딸 뭐 맛있는 거 하나라도 더 먹이시려고 연신 주정부리들을 건네셨다.
"정아 착하다. 그래, 미국에서 비행기 타고 왔어?"
치매로 방금 한 말씀도 기억을 못 하셔서 돌아서면 같은걸 또 물어보시고는 하셨다.
그렇게 할머니를 보고 온 모습이 마지막이 되었다. 할머니와 이야기를 하면 세상 어디에도 없는 평온함이 있었다. 어떤 상처라도 할머니의 "괜찮아"라는 한마디는 그 어떤 것보다도 나를 치유해 주는 하나뿐인 약이었는데...
할머니가 살고 계시는 곳은 대림동의 3층짜리 오래된 건물이다. 아버지가 학창 시절을 보낸 곳이니 나에게도 이곳은 내 집같이 편안한 고향 같은 곳이다.
2층에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사시고 3층에는 이제 막 신혼 생활을 시작한 작은 엄마와 작은 아빠가 사셨다.
건물 뒤편으로는 키가 아주 큰 감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가을에는 거기서 황금 주황빛을 띤 탐스러운 감들이 매달려 있었다.
살랑살랑 이따금씩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감나무 잎이 떨어졌다. 여기저기 흩날려 있는 감나무 잎들을 모아서 높게 높게 쌓아 올린다. 그리고 "폴싹" 그 위로 등을 베고 누우면 파란 하늘을 볼 수 있는 세상 편한 침대가 되었다.
어렸을 적 사촌동생들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감나무 아래 숨바꼭질도 하고 뛰어놀며 연신 땀을 흘렸다. 할머니가 어디서 구해오신 큰 칠판도 감나무 옆에 하나 있었다. 분필로 칠판에 낙서도 하고 때로는 선생님 놀이도 했다. 한참 놀다 목이 마르면 뒷문을 통해 바로 앞에 있는 작은 구멍가게로 달려가 아이스크림을 고르고는 했다.
여물어가는 감나무 아래 그 추억의 공간은 우리들에게 둘도 없는 작은 놀이터가 되어 주었다.
할머니의 작은 마당에는 직접 담근 된장과 고추장이 담겨있는 항아리들도 서너 개 있었다.
우리들이 한참 뛰어놀고 있을 때면 그릇과 수저 하나를 챙겨 나오신 할머니가 항아리 뚜껑을 열어 가득 된장을 담았다. 이내 2층 할머니집에서부터 구수하고 진한 된장국 냄새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기가 막히게 알맞게 익은 무생채와 된장국, 그리고 할머니표 무침 나물들. 소박하지만 할머니의 손맛이 가득 담겨있는 밥상이다. 지금 세상 맛있는 것들이 차고 넘쳐난다지만 직접 담근 된장으로 한 상 차려진 할머니표 한상, 그 맛은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다.
어린 날의 추억, 할머니의 손맛과 그리움이 더해진 밥상이기에. 그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가 없다.
시간을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육십,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신 할아버지의 작은 방도 하나 있다.
한쪽에는 텔레비전을 틀어 놓으시고 이불 위에 방석처럼 앉으셔서 모아 온 동전들을 차곡차곡 세고 계셨다.
탄광에서 일하시며 온갖 잿더미들을 목으로 폐로 삼키어가며 3남1녀되는 자식들을 위하여 그 돈 하나 본인을 위해 쓰시지 않고 모으며 땅을 조금씩 사고 건물도 사고 그러셨단다.
내 나이 고작 열 살 남짓할 때쯤 나는 왜 할아버지가 그렇게 동전을 모으고 계시는지는 몰랐다. 아마 우리들 세뱃돈 주실라고 저렇게 동전들을 모으시나 보다 정도로 생각이 들었던 거 같다.
할아버지 옆에 바싹 붙어 앉아 나도 10개 높이로 동전들을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10원짜리, 50원짜리, 100 원짜리... 그렇게 탑처럼 쌓인 동전들을 계산한 뒤 보자기에 넣어 어린 손녀딸 손을 잡고 은행으로 가셨다.
들기름 위에 만든 반만 익힌 계란 프라이를 참 좋아하셨던 할아버지. 톡 터뜨린 노른자위에 간장 양념을 조금 올린 뒤 아주 맛있게 계란을 드시고는 하셨다.
조그마한 손으로 할아버지를 위해 계란 프라이를 만들어주던 어린 손녀는 성인이 된 지금도 할아버지의 입맛을 고스란히 닮아 종종 들기름으로 계란 프라이를 만들어 먹고는 한다. 고소한 계란 프라이와 들기름의 냄새는 어릴 적 할아버지의 모습을 고스란히 떠오르게 한다.
오래된 추억들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기에 소중하다.
할머니집 감나무 아래 나의 소중한 추억들은 이제 한 장의 사진으로만 남아 기억될 것이다.
이제는 사라져 버릴 감나무 아래 우리의 추억들과 그곳에서의 시간들. 고추장과 된장이 담긴 장독대들... 그리운 할머니 밥상...
이제 곧 그곳은 새로운 사람들과 다른 것들로 채워지겠지...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 하나.
굳건하게 버티고 있는 감나무는 우리의 추억들을 회상하며 그곳에 그 자리에 계속 머무를 것이다. 변하지 않는 우리의 기억들처럼.
어릴 적 넓게만 보이던 좁은 골목길에 다정한 옛 친구 나를 반겨 달려오는데"
옛 추억이 그립고 생각날 때면 몇 번이고 다시 돌려 보았던 응답 하라 드라마 시리즈의 ost 중 하나의 가삿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