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 성폭력 사건 재판 방청기를 마무리하며
안희정 성폭력 사건이 드디어 대법원의 유죄 확정으로 법정공방은 마무리되었다.
554일, 이라고 했다. 피해자가 스스로 얼굴을 드러내고 방송에 나와서 '국민 여러분이 저를 지켜주셨으면 좋겠다.'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고발하고 법정 공방이 끝나기까지 걸린 시간.
미투 운동 이후, 안희정을 포함한 각 계의 명망가들이 피고인이 된 성폭력 사건들은 진행 속도가 비교적 빨랐다. 1심 재판만 1년을 훌쩍 넘기기 일쑤인 다른 사건들에 비하자면 비교적 빠르게 대법 선고까지 나온 셈이지만, 명망가를 고발했기에 고발자들 역시 공적인 무대 위에 세워져 고통받아야 했다는 점에서 '554일'은 결코 짧은 시간만은 아니었을 거다.
554일간 우리의 구호는 한결같았다.
"가해자는 감옥으로, 피해자는 일상으로"
피해자가 일상으로 돌아올 때, 비로소 이 사건은 마무리되는 것이라고. 물론 그게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다. 트라우마는 일생을 두고 회복하는 것이라고 하니까. 하지만 우리 사회가 보다 성숙해진다면, 사회 구성원들이 성폭력에 대한 관점을 달리 한다면,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편견을 벗어던진다면... 그 길은 훨씬 수월해지리라 믿는다.
그래서 아직도 피해자를 의심하는 사람들을 위해 안희정 성폭력 사건의 쟁점 몇 가지를 다시 정리하는 것으로 [안희정 성폭력 사건 재판 방청기]를 마무리하려고 한다.
근데 그 메시지 보니까 피해자도 좀 이상한 것 같던데..?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일상에서 진심으로 화를 낸다.
안희정의 아내 민주원 씨가 페이스북으로 두서없이 공개한 메시지들을 사람들은 피해자와 안희정 간의 메시지로 믿고 유포하며 피해자를 다시 한번 공격했다. 그들은 '몰라서 그랬다'라고 하지만 만약 안희정의 유죄를 확신하거나 피해자의 고발에 대한 일말의 믿음이 있었더라면, 그들은 어렵지 않게 그 메시지의 진짜 수신인이 누구였는지 금방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해당 메시지는 김지은 씨가 당시 스위스 출장을 기획한 인물과 주고받은 것이다. 김지은 씨에게 편하게 반말로 응답하는 사람은 안희정의 오래된 측근이며 스위스 출장을 기획하고 동행한 사람으로서, 정치인 수행비서로서는 물론 안희정의 정무라인에서도 신참인 김지은 씨에게는 어려운 상사(아마도 소속이 달라 직장 내에서의 상사는 아닌 걸로 알고 있음) 일 수밖에 없다. 바쁜 일정에 쫓기는 도지사를 위해 출장은 여유 있는 일정을 설계했다고 흐뭇해하는 상대에게 지은 씨는 그의 공을 추켜세우는, 당연한 사회생활을 하고 있을 뿐이다.
비슷한 예로, 평택대 전 총장의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강제추행 사건에서도 가해자 측은 피해자가 제삼자에게 가해자를 칭찬하는 말을 했다며 '피해자 답지 않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과 고통을 떨치기 위해 정상적인 일상을 영위하기 위해 더더욱 애쓴 것'이라고 봤다. 게다가 그 칭찬의 말을 들었다는 이는 바로 가해자의 친척으로 업무와도 관련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일부에서는 군대 내 폭력 피해자의 태도에 비유하기도 한다. 전날 밤, 폭행을 겪고 다음 날 가해자와 어깨동무를 하고 함께 축구를 한다. 그에게 잘 보여서 폭행을 피하고 싶다는 생각과 '어제의 폭력으로 나는 당신을 미워하지 않는다.'라고 애써 증명하고 싶고 또 한 편으로는 그 폭행 자체를 잊고 싶은 피해자의 태도, 사실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안희정과 김지은 씨의 일상적인 대화는 이와 같다.
연애는커녕 호감을 입증할만한 메시지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1심에서 안희정 측 변호인은 최후 변론을 하며 '피해자 답지 않은' 메시지로 골라 읽은 것이 겨우 '넹'과 '웃음 이모티콘' 정도였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법률을 모르는 내가 쉽게 말할 부분은 아니긴 하다.
다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재판을 준비하는 공판심리기일에 가보면 검찰 측과 변호인 측이 제시하는 '증거목록'에는 '인적증거' , 즉 증인이 포함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CCTV 등 '물적 증거'뿐 아니라 증인의 진술도 '인적 증거'가 되는 것이다.
때문에 물적 증거가 드문 성폭력 사건에서 인적 증거인 증인의 진술 신빙성이 쟁점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증거가 없다니...
피해자 증인을 비롯하여 검찰 측 증인이 4인 이상이었으며, 법정에 출석한 증인들 외에도 진술서를 낸 참고인도 여럿이었다.
안희정 측도 마찬가지다. 피고인인 안희정도 2심에서 증인으로 법정에 섰고 민주원 씨를 비롯해 검찰 측 보다 많은 수의 증인들이 법정에 나와 증언했다.
물론 이러한 증언을 뒷받침할 몇 가지 물증도 제시되었다.
검찰 측은 피해자와 검찰 측 증인들의 증언을 뒷받침할 하이패스 기록이나 메신저 기록 등 제시했으나, 성폭력 사건의 특성상 판결문 조차 공개되지 않는다는 것을 고려하여 기술하지는 않겠다.
단, 피고인인 안희정의 진술 역시 피해자의 진술 신빙성을 높이는데 기여했다는 사실은 짚고 가겠다.
해당 자료는 [안희정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가 2심 이후 발표한 것이다. (링크)
-와인바 :
피고인 측 변호인단은 러시아 출장 당시 공식 일정인 발레 관람을 취소하고 피해자가 안희정과 '단 둘이' 와인바에 갔다, 고 주장하였으나 안희정 스스로 '당시에 통역관 부부가 동행했다'라고 피해자와 같은 진술을 했다.
-미용실:
피고인 측 변호인단은 '안희정의 단골 미용실에 찾아간 피해자'라고 주장했으나 안희정은 '1번 가봤다'라고 본인 변호인단의 주장을 부정했다.
김지은 씨는 검찰 조사는 물론 1심 재판정에서는 16시간가량 진술을 해야 했다. 나중에 2심 공판심리기일 때 홍동기 판사가 1심 재판기록을 언급하며 '장시간, 여러 변호사가 동시에 질문하는 것은 절대 허락하지 않겠다.'라는 말을 했었다.
생각해보자. 만약 당신이 오늘 아침 상황에 대해 진술한다고 할 때 '몇 시에 집에서 나갔어요?' '시계는 어디에 걸려 있었나요?' '벽시계 본 거 맞아요? 휴대전화로 확인한 게 아니고요?' '그 벽시계를 어느 지점에서 서서 봤죠?' '검찰 조사 기록에서는 벽시계가 노란색이라고 했는데?' '그런 적 없다고요? (재판 기록 넘기는 척) 내가 잘 못 봤나..?'라면서 당신의 진술에 허점을 찾기 위한 심문이 이어진다면...?
참고서비 빼돌려서 영화 보러 간 것도 번번이 엄마에게 들키는 거짓말 실력으로 버틸 수 있는 법정이 아니다.
흔히 안희정 성폭력 사건의 결과를 의심하는 자들은 '일관된 진술만으로 유죄라니..' 하며 나라 잃은 표정을 하지만, 사실 일관된 진술은 쉽지 않다. 그게 진실이 아니라면 말이다.
전관 변호사까지 고용해 호화 변호인단을 꾸리고, 고학력자이자 결혼생활도 길게 했으며 도지사까지 지낸 사회지도층 인사인 안희정조차도 결국 이 모양이었으니까.
첫째, 안희정이 2018년 3월 5일, 김지은 씨의 뉴스룸 고발 직후 스스로 페이스북에 올린 '합의에 의한 관계였다는 비서실의 입장은 잘못입니다'라는 사과문을 후에 부정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그는 검찰 조사 시에는 연인관계라고 주장했으나 항소심에서는 연인관계를 부정했다.
둘째, 만약 연인관계를 부정했다면 합의에 의해 성관계에 이르렀다는 사실에 대해 설명해야 하는데 이 또한 진술이 충분치 않았다. 첫 출장이라 긴장하고 기내에서 구토까지 하여 심신이 지친 신참 비서를 한 밤에 '담배를 가져다 달라'라고 불러낸 다음, 성적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부터가 비상식적인데 심지어 그 대화 내용조차 안희정은 진술하지 못했다.
셋째, 변호인단은 피해자가 첫 피해 직후인 7월에 안희정에게 '저 돌싱이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라고 했다고 주장했는데 실제로 피해자는 자신의 이혼경력이 주변에 알려지는 것을 꺼렸으며 9월 말까지도 주변인에게 '말해야 하나'라고 고민하고 있었다. 이 고민이 담긴 메신저 기록도 일종에 피해자의 진술을 뒷받침하는 '물증'인 셈이다.
성인지 감수성 (Gender Sensitivity)
성별 차이에 따른 불평등 상황을 인식하고 성차별적 요소를 감지하는 감수성. '젠더 감수성'이라고도 한다. 1990년대 중반, 주로 서구 사회에서 성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각종 정책의 주요 근거와 기준으로 제시된 개념이다. 성인지 수준은 시대, 상황, 조건에 따라 다르며, 개인의 삶이 속한 정서적 태도와 가치와도 연결된다. 한국 사회에서는 '젠더 감수성'이라는 표현으로 주로 사용되었으나 2018년 4월 성희롱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문에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표현이 인용되면서 법률적 용어로도 통용되기 시작했다.
출처: [Daum백과] 성인지 감수성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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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인용하고 싶진 않지만 유명한 말 중에 "서 있는 자리가 다르면 보이는 풍경도 다르다."는 말이 있다.
성인지 감수성은 바로 그러한 계급, 성별, 권력의 차이가 가치관은 물론 행동의 차이를 만든다는 사실을 전제로 사건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사회 구조를 알고, 이를 토대로 사건을 파악하는 것. 이것이 '능력'이 아니고 무엇일까.
안희정을 여전히 지지하며 그가 성범죄자가 아닌 불륜남일 것이라 굳게 믿고 있는 사람들은 너무 염려하거나 억울해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안희정은 자신이 유죄인 이유를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남성 중심의 권력질서와 문화가 가지는 폭력성이 우리 모두에게 남아 있습니다.
그는 이미 이렇게 <성인지 감수성>의 핵심을 꿰뚫고 있었으니 말이다.
끝으로...
성인지 감수성과 피해자중심주의를 놓고 일부에서는 "직장 내에서 연애하고 사후적으로 성범죄로 고발당할 위험이 있다."라고 우려한다.
이런 말은 들으면 사실 좀 무섭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하는 것이 <연애>인지 <성범죄>인지 조차 구분하지 못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들은 정말 모를까?
성범죄 가해 지목인들은 고발 직후에는 의외로 순순히 범행을 인정하는 경우가 많다. 미투 운동에서 고발당한 유명인들이 맨 처음 내놓은 입장은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와 '자연인으로 돌아가겠다.' (흙으로 돌아갔으면...)는 내용이었다. 안희정을 비롯하여 수많은 가해 지목인들은 그렇게 급히 사과한 후에, 법률가와 대중의 그릇된 옹호를 기반으로 사후적으로 자신들의 입장을 수정할 뿐이다.
당신들은 이미 알고 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데이트인지 썸인지 섹스인지 강간인지.
만약 당신이 하고 있는 짓이 '사후적으로 고발당할 우려가 있다'라고 느껴진다면, 이미 성범죄이니 지금이라도 멈추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