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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매이 Jan 04. 2021

발하임이라는 이상한 낙원, 뮤지컬 [베르테르]

 진지한 서사문학에서 정의란 개인의 사적 특질이 아닌, 개인의 지향이 낳은 사회적 형식이 어떤 권력과 폭력과 배제의 지도를 그리는지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문학작품의 독해는 피할  없이 정치적인 작업이  것입니다. 그리고 철저히 정치적이어야 마땅합니다.

 - 현종희 [다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중에서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 [베르테르]를 단순하게 열정적인 사랑이나 돌려받지 못한 애정의 비극으로 보면 굉장히 불편해질 수 있는 극이다.

물론 보는 이에 따라 다르지만, 결혼한 여자를 사랑하고 이에 절망한 나머지 그 여성의 집에서 총을 들고 소동을 벌이고 끝내 총을 빌려 자살을 감행하는 베르테르의 행동은 명백한 가해일 수밖에 없다. 현실 세계에 이별한 여성 연인을, 때로는 사귄 적조차 없는 여성을 스토킹 하며 죽겠다고 협박하거나 혹은 여성에게 직접적인 가해를 하는 남성이 한 둘인가.

또한 롯데 역시 편협한 기준으로 보자면 비난을 피할 수 없다. 원작과 달리 뒤늦게 자신의 약혼 사실을 베르테르에게 말하고 결혼 후에는 다시 찾아온 베르테르에게 명백하게 마음이 기운 모습을 보여 '어장관리녀'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기도 했다. 혹은 불륜이므로 비도덕적이라는 비난도 없지 않다. (물론 나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뮤지컬 [베르테르]를 보는 걸 미루고 있었다.

하지만 올해로 공연 20주년을 맞이한 고전인 데다가 현악 중심의 비감 어린 선율이 매력적인 넘버라는 호평이 자자해서 '못 본 사람(못사)'는 되지 말자, 는 생각으로 보러 갔다.

그런데 생각보다 극은 거북하지 않았고 재밌었다.

이 극을 베르테르의 정념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롯데를 중심으로 구조의 억압과 개인의 욕망으로 읽었기 때문이다.


발하임이라는 이상한 낙원과 낙원의 아이'였던' 롯데의 이야기.

그것이 내가 읽은 뮤지컬 [베르테르]였다.



20주년을 맞이한 2020년 시즌 뮤지컬 [베르테르]


꽃의 도시 발하임을 닮은 아이, 롯데


프롤로그를 지나 롯데가 인형극 수레를 끌고 등장해 광장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자석산의 전설'을 들려주는 것으로 극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젊은 여성이 자신의 하녀와 함께 동네 이야기꾼 노릇을 하는 것도 흥미로운데 사람들은 롯데의 일탈을 사랑스러운 개성으로 받아들이는 듯하다. 모두가 롯데를 사랑하고 롯데 역시 이 공간과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인상.

이렇게 완벽하게 자신에게 우호적인 세상 속에 사는 건 어떤 기분일까, 궁금할 만큼 롯데는 꽃의 도시로 설정된 발하임과 꼭 닮은, 다채로운 빛깔로 빛나는 낙원의 아이다.

하지만 동네 사람들은 롯데가 들려주는 '자석산의 전설'에 완벽하게 몰입한 것 같지는 않다.

이야기의 결말을 재촉하는 사람들에게 롯데는 '결말이 아니라 인물들의 감정을 느껴야 한다.'라고 말한다. 지나치게 사소해서 롯데도 사람들도 모르고 지나칠만한 균열이지만 그 간극이 롯데와 베르테르를 만나게 한다.

베르테르는 여러모로 롯데와 대척점에 선 인물이다.

그는 타지에서 온 이방인이고 극 중에서 자신의 계급 안에서 교류하기보다 선술집의 하층민과 어울린다. 이마저도 완벽한 교제가 아니다. 왜냐면 그는 이미 자살사고에 시달리는 우울증 환자이기 때문이다. 그가 발하임에 오기 전 무슨 일을 겪었는지 뮤지컬에서는 생략되어 있는데 다만 롯데의 집에 처음 방문해서 진열장 속 권총을 홀린 듯 꺼내어 보는 모습은 그의 심리가 무척 불안하다는 걸 보여준다.


그런 베르테르가 롯데에게 끌리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우울에 빠져 세상과 불화하고 있던 베르테르는 자신이 속한 세계와 너무도 조화로운 롯데를, 그리고 그녀의 눈으로 본 꽃과 낭만의 도시 발하임을 동시에 선망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베르테르의 열정에서 발하임과 롯데를 분리할 수 있을까.

그리고 롯데의 경우에는 너무도 익숙한 사회에서 미처 자각하지 못했던 갈증,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는 벗에 대한 갈망을 베르테르를 만나 깨닫고 동시에 충족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이야기의 결말에만 집착하는 게 아니라 행간을 읽어주는 지음(知音). 롯데에게 베르테르의 사랑은 자신의 세계가 결코 완벽하지 않다는 걸 깨닫는 충격이기도 하다.


이상한 관계다.

베르테르는 롯데와의 사랑으로 발하임이라는 낙원의 조화로운 일원이 되기를 희망하고 롯데는 베르테르와의 사랑으로 영원한 낙원의 아이를 벗어나 자신의 안전한 세계를 깨고 떠나는 어른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두 사람의 연애는 종착지가 다르기에 결국 비극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런데 왜 롯데는 이 세계를 떠나야 하는가.

왜냐하면 꽃과 낭만의 도시 발하임은 교묘하고 익숙한 억압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광장에서의 첫 만남 후 롯데를 찾아온 베르테르. 롯데는 문학 취향이 통하는 베르테르에게 책을 건넨다. (롯데 역 이지혜 배우, 베르테르 역 카이 배우)

2막의 시작은 롯데와 알베르트의 결혼을 축하하면서 시작된다. 선술집에 모인 마을 사람들은 '어느 결혼식이든 가보면 부부가 똑같이 매력적이긴 쉽지 않은데 롯데와 알베르트는 완벽한 커플' 이라며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선술집 주인 오르카가 동네의 청년들을 돌아보며 '다들 키나 재산이나 따지지 말고 적당한 사람 만나서 결혼하라, 살다 보면 정든다'라고 조언하는 노래가 이어지는데 이 장면에서 순간 웃음이 났다.

뭐지? 저출산 대책위에서 협찬해서 만든 결혼장려(실제는 정상가족 내 출산 장려) 송인가?

사랑에 목숨을 거는 듯 보였던 낭만의 도시 발하임에서 개인의 열정보다 가정 꾸리기가 우선이라고 말하다니!

이 위화감이 도리어 극이 선명하게 만들었다.

롯데와 베르테르 뒷편에는 유리온실이 자리하고 있다. 온실 속에는 알베르토가 선물하고 롯데가 가꾼 ‘금단의 꽃’이 자라고 있다.


이성애 중심의 가부장제 낙원, 발하임


발하임은 이성애 중심의 가부장제 질서가 공고한 공간이다.

왜 롯데가 마을에서 가장 사랑받는 여성이었는지 그 이유도 알 수 있다. 그 자신의 외모와 성품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적절한 나이에 마을에서 촉망받은 젊은 남자와 맺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에서 그 보다 더 모범적인, '개념녀'는 없을 것이다.

그런 롯데와 달리 선술집 주인인 오르카는 중년의 비혼 여성이다.  

1막에서 동네 사람들은 오르카가 연애에 대해 이야기하자 '네가 연애를? 거짓말!'라고 비웃는다. 많은 관객들이 이 장면을 불편하게 여기는데 이성애 정상가족 중심의 발하임에서 결혼하지 않고 나이 든 여성은 체제의 이탈자이자 낙오자로 언제든 조롱거리가 될 수 있음을 무척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그가 청년들의 연애상담을 해주거나 고난으로부터 숨겨주고 때로는 얼른 시집 장가가라고 등을 떠밀며 '가짜 엄마'노릇으로 겨우 이 사회에서 설 자리를 얻었다는 의혹도 지울 수 없다.


이성애, 정상가족, 가부장제.

이렇듯 닫힌 사회의 악덕은 특히 카인즈와 이름 모를 마님의 일화에서 도드라진다.

정원사 카인즈는 자신을 고용한 주인마님을 사랑한다. 이 여성은 폭력적인 남편에게 고통받다가 사별로 이제 홀로 살고 있는데 극 중에 등장하지 않고 오로지 카인즈의 말을 통해서만 그려진다. 2막에서는 카인즈는 주인마님의 유산을 노리고 그녀를 괴롭히는 오빠를 살해하고 쫓기는 신세가 된다. 하지만 카인즈가 재판정으로 향할 때까지 폭행과 협박 사건의 피해자이자 살인사건의 목격자인 주인마님은 끝내 등장하지 않는다.

왜 주인마님은 사건 당사자이면서 발언권이 없을까.


서구 최초의 공공 공간은 그리스의 아고라로 기록된다. 아고라는 모두가 평등한 민주주의가 실천되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아고라에 입장할 수 있는 자격은 성인 남성에 한정되었고, 여성, 아동, 노예는 배제되었다. 즉 아고라는 "불평등한 자"의 존재를 조건으로 한 평등의 장소였다. 한나 아렌트는 아고라에서의 정치적 평등이 사적 영역에서의 엄격한 위계와 지배를 전제로 했다고 말한다.

-김지혜 [선량한 차별주의자] 중에서


주인마님은 여성이며 또 남편이 죽고 자식이 없으며 정원사라는 신분 낮은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더 이상 정상 가족에 속하지 않고 발하임이 지향하는(강압하는) 정상성에서도 멀어진 인물이다. 배제를 전제로 한 광장에 그의 자리는 없다.


롯데의 처지도 별반 다르지 않다.

2막에서 기혼여성이 되어 단정하게 올림머리를 하고 등장한 롯데는 어딘지 불안하고 어두운 표정이다. 그의 인형극 수레는 창고로 들어간 듯 하녀가 먼지 쌓인 인형을 꺼내와 위로하듯 내미는데 이야기와 광장을 잃어버린 롯데의 처지가 드러난다. 그 순간 롯데는 어쩌면 한없이 온화하고 조화롭던 도시가 사실 자신을 가두고 있는 부자연스러운 유리 온실임을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이후 베르테르를 찾아 자신의 감정을 확인하기 위해 잠시 밖으로 나오지만 온 마을의 사랑을 받던 이전의 롯데와 달리 그는 마을 주민들과 인사조차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유령처럼 거리를 배회할 뿐이다.

롯데는 결혼으로 정상성을 획득했지만 광장에서 추방당하고 결국 집 안의 인형으로 갇히게 된 셈이다.


차별과 배제로 유지되는 정상성의 세계


그리고 이러한 발하임의 질서를 관장하는 인물은 롯데의 남편 알베르.

그는 일종의 치안판사 역할을 하고 있는 듯한데 카인즈를 단순한 살인자로 보고 엄단해야 한다고 나선다.

여성의 또 다른 구애자에게 남편, 약혼자 또는 남성 가족이 대신(?) 결투에 나서서 여성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남자들의 ‘신사적’인 대결로 여성의 장래를 결정하는 것이 명예로 여겨지던 시대였다.

만약 카인즈가 주인마님의 승인된 배우자이거나 가족이었다면 자신의 ‘소유물’을 학대하는 술주정뱅이 오빠쯤은 사적 처벌을 해도 문제가 없었을지 모른다.

알베르트는 이처럼 정상성과 당대의 '명예'를 수호하는 인물이다.


그런 알베르트에게 자신의 아내에게 연정을 품은 베르테르는 어떤 존재일까.


시라노: 글쎄! 내가 보기엔 유혹을 이겨낸 눈 같지 않구먼.
리즈(라그노의 아내) : (할 말을 읽고) 아니...
시라노: (진지한 어조로) 난 라그노를 좋아하네. 그래서 누구든 그를 오쟁이 진 남편으로 만들려 들면 가만두지 않을 걸세.

-에드몽 로스탕 [시라노] 중에서


'오쟁이 진 남편'이란 다른 남자에게 아내를 빼앗겼다는 뜻이다.

그 시대의 남성 가장들은 아내를 다른 남자에게 '빼앗긴' 남자가 되는 걸 대단한 불명예로 여긴 건 분명하다. 배우자의 부정이 썩 유쾌한 일이 아닌 건 당연하지만 가정의 파탄이나 아내의 애정을 상실한 슬픔보다는 본인이 '위신'을 더 걱정한 셈이다. 그래서 그들은 기꺼이 아내의 명예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체면을 위해 목숨을 걸었겠지.


알베르역시 '거리의 악사처럼 모욕을 당하고 부랑아처럼 무시를 당한' 기분이라며 분노한다.

그가 두려워한 건 롯데를 잃는 것일까, 아니면 '오쟁이 진 남편'이 되는 것일까.


이 질서의 수호자는 이탈자인 카인즈와 베르테르를 징벌하고 마지막으로 롯데를 벌한다.


베르테르가 '긴 여행을 떠나려는데 권총을 빌려달라'라고 편지를 보내자 알베르트는 명백하게 그 뜻을 짐작한 듯, 롯데에게 총을 내어주라고 말한다. 연인을 죽음으로 인도할 총을 자신의 손으로 건네야 하는 롯데는 비탄과 두려움 속에 얼어붙는다.

알베르트는 하인에게 '롯데도 잘 다녀오시라, 하더라고 전해주시오.'라며 롯데가 하지 않은 말까지 전한다.

가부장제의 수호자는 자신을 '오쟁이 진 남편'으로 만든 아내의 죄를 결코 잊지 않는다.


그렇게 배제와 차별을 통해 발하임은 아름다운 소도시의 낭만이 넘치는 도시로 지켜져 온 것이다.

카인즈의 죽음은 베르테르에게 이 사회의 억압을 느끼게 했고 자신은 결코 이 사회로 편입되지 못할 것이라는 절망을 일깨웠다고 생각한다.

단지 이룰 수 없는 사랑에 괴로웠던 것이 아니라 이상을 품은 청년의 절망과 정착에 대한 열망의 좌절로 그는 마지막 선택을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베르테르의 죽음은 롯데에게 어떤 각성이 될까. 더 이상 낙원도 아니고 더 이상 아이도 아닌 롯데는 어디로 가야 할까.


톨스토이의 뒷걸음 페미작이라 불리는 [안나 카레니나]를 봤을 때도 바랐지만 롯데가 유리 온실 같은 발하임을 뚜벅뚜벅 걸어 나와 들판의 나무처럼 굳세게 살게 되었다면 이 오래된 극은 21세기에도 생명력을 얻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뮤지컬 [베르테르]는 여전히 베르테르의 정념에 대한 이야기이고 롯데의 목소리는 끝내 광장으로 나오지 못했다.

 

고정된 '옳은' 삶을 규정하지 않는 이 해체의 시대가 버겁고 혼란스러울 수도 있지만, 이는 인류가 지속적으로 갈구하는 자유를 획득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왕족이나 귀족이라는 소수가 누리던 자유를 민중이라는 다수가, 그리고 다음 단계로 사회 바깥에 놓여 있던 모두가 향유하게 될 때까지 세상은 아직 더 변해야 한다.

- 김지혜 [선량한 차별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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