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미니 맨> 2019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헨리(윌 스미스)'는 겉으론 최고의 킬러지만, 사실은 죄책감 때문에 잠에 들지도,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지도 못한다. 젊을 땐 국가와 정부가 자신을 필요로 한단 사실에 기뻐 헌신했지만, 나이가 들고 보니 가족도, 연인도, 친구도 없는 자신의 처지가 외딴 배와도 같다는 걸 알아차리기도 했다. 결국 달리는 기차를 저격하는 임무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이 지쳤음을 깨달은 헨리는 은퇴를 선언한다. 그러나 그에게 평화로운 은퇴따윈 허락되지 않는다. 정부의 조작에 의해 무고한 이를 살해했음을 알게 될 뿐 아니라, 자신의 젊었을 적 모습을 한 킬러 '주니어(윌 스미스)'가 그를 무섭게 추격해오기 때문이다. 과연 헨리는 자신을 끈질기게 따라오는 과거를 청산할 수 있을까.
이안 감독의 <제미니 맨>은 인간을 부품처럼 취급하는 신자유주의 사회에 총구를 겨누는 영화다. 그래서 거대 조직을 상징하는 '배리스(클라이브 오웬)'는 나이가 들고 죄책감을 느낄 줄 아는 헨리 대신, 더 젊고 철저하게 세뇌된 주니어로 교체하려 한다. 주니어에게서 헨리의 약점인 불우한 유년시절과 물 공포증을 제거했다는 설정은 마치 개발자들이 구제품을 보완한 신제품을 출시하는 광경을 연상케하는데, 이처럼 배리스에게 헨리는 쓰다 버리는 하나의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급기야 배리스는 주니어조차 인간으로서의 주체성을 띄기 시작하자 아예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로봇과 다름없는 두번째 주니어까지 등장시킨다. 그러나 정작 그 어떤 주니어도 사람들을 동료로 만들고 자신의 삶을 성찰할 줄 아는 원본 '헨리'를 이기진 못한다. 이 과정을 통해 영화는 인간은 그 어떤 것(로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존재이며, 죄책감이나 연민 같은 감정은 약점이 아니라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요소라 말한다. (이는 극중 "두려움은 좋은 것"이라는 대사가 자주 반복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고유성을 강조하는 <제미니 맨>은 정작 영혼이 없는 영화처럼 느껴진다. '나 자신과 경쟁한다'는 흥미로운 소재와 이안 감독에 대한 기대치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깊이와 재미가 흔하디 흔한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수준에 멈춰버리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선 암에 걸린 피아니스트가 자신을 복제한 딸을 낳았던 <블루 프린트>(2006)처럼 유전자와 환경 중 어떤 것이 정체성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지 등 정체성에 대한 질문도 찾아보기 어렵고, 킬러가 서로 다른 목적과 시간대의 자신과 첨예하게 대립했던 <루퍼>와 달리 헨리와 주니어가 만나 맞붙을 때의 긴장감과 재미도 그리 크지 않다. (헨리는 경험을, 주니어는 젊음을 이용해 맞선다는 설정 역시 그리 활용되지 못했다.) 화려한 로케이션을 보여주기 위해 헨리가 굳이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동료를 만나고 정보를 구하는 작위적인 전개, 첩보물 여성캐릭터를 눈요깃감으로 쓰지 않겠다는 듯 이름부터 외모, 옷차림에서 중성성을 내세운 '대니(메리 엘리자베스 윈스티드)'를 결국엔 도청을 핑계로 기어이 발가벗기는 장면은 또 어떤가. 그 중에서도 정부에 의해 헨리가 살해한 무고한 이가 딱 마지막 한명 뿐이고, 정부가 만든 헨리의 복제품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게 전부이며, 배리스 한 명 죽인 걸로 모든 음모를 폐기시키는데 성공한다는 결말은 적당히 좋게 좋게 끝마치려는 영화의 게으름과 안일함의 절정이다.
헨리를 따라다니는 동료 '배런(베네딕 웡)'은 유머코드를 담당했음을 티내듯 관객을 웃기려 노력하지만 억지스런 대사와 어색한 연기 때문에 이에 성공하지 못한다. (오히려 관객을 웃음짓게 하는 건 윌 스미스다.) 거기다 영화가 개연성이나 현실성을 무시할 때 변명삼아 활용하는 해결사이자 치트키 역할로만 활용되고 있어서, 캐릭터 자체의 개성이나 매력은 제로에 가깝다. (부다페스트까지 날아갈 비행기가 필요하다고 하자 그런 비행기를 어디서 구하냐, 정말 친한 사이가 아니면 잘 안빌려준다고 말하더니 1초만에 빌릴 친구가 있다고 답하는 배런의 모습은 그가 영화 속에서 얼마나 편의적으로 쓰여지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초반부에 킬러로서의 삶에 찌든, 날카롭고 피폐한 인상으로 등장했어야 할 윌 스미스 역시 그냥 가족들과 평화롭게 잘 먹고 잘 산 '윌 스미스'의 얼굴이어서 몰입감이 떨어지는 부분이 있다. 4K 3D로 촬영된 액션씬은 화려하고 윌 스미스의 젊은 시절을 재현한 CG는 새롭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가 공허한 탓에 헐리우드 공산품 중 하나에 지나지 않게 된 영화. 연출가로서 헐리우드의 최신 기술을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 안에서 점점 이안 감독만의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염려가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