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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 Gwon Mar 17. 2024

환자와 의사가 평등할 수 있나요?

웰다잉 인터뷰

이론적으로는 환자를 동등한 인격체로 대해야 한다고 배웠다. 그런데 환자는 의사에 비해 의학 정보를 잘 모르고 몸과 마음이 약해져 있다. 그래서 의사가 일방적으로 환자를 돌봐주어야 하는 관계가 되는데 동등하다니. 실제 병원에서 관찰해보면 의사는 병원 이곳저곳 다니며 여러 균과 더러움을 묻힌 흰 가운을 오직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기 위해 입는다. 그 신분이라는 것은 의사라는 직함만 드러내는 것일까. 드라마와 영화에서 웅장한 음악과 함께 흰 가운을 입은 의사 무리가 우르르 회진을 다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흰 가운이 드러내는 신분에 권위의식이 녹아있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죄수복 같은 환자복을 입은 상태에서는 그 사람이 아프다는 것 외에는 그 사람의 개인적 특징이 드러나지 않는다. 회진을 돌 때에도 의사는 환자 눈높이 보다 위에 서서 이야기한다. 진료실에서 환자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모니터에 시선이 고정된 의사도 많고, 인사도 고개만 까딱하거나 쳐다보지도 않고 말로만 인사를 건네는 경우가 많다. 진료실 책상은 환자와 의사 사이에 거리를 둔다. 대부분 의사와 환자는 마주보고 앉거나 90도 위치에 앉아 모니터를 환자가 보지 못하게 하며 칸막이가 있는 경우도 있다. 모니터 속 영상을 환자가 봐야할 때만 모니터를 돌려 환자에게 보여준다. 바쁘니까 어쩔 수 없지라며 의사도, 심지어 환자도 이야기한다.


다른 나라에서는 어떨까? 영국에서는 의사가 기다란 흰 가운을 입지 않는다. 보통 단정한 평상복에 청진기를 목에 두르고 차트만 갖고 다닌다. 병실에서든 진료실에서든 환자와 눈높이를 맞추어 일단 앉아서 이야기 한다. 일본은 진료실에서 환자와 의사가 가깝게 나란히 옆에 앉고 칸막이도 없다. 일본에서 진료를 참관하면서 이 장면을 보고 환자가 모니터를 보면 어떡하느냐는 내 질문에 교수님은 고개를 갸우뚱 하시며 당연하다는 듯 환자가 봐도 상관 없다고 하셨다. 일본은 진료실에서 매 환자마다 의사와 환자가 서로 90도 인사를 2-3번씩은 한다. 우리나라에서 보던 의료 환경과는 많이 달랐다. 권위의식을 빼고 환자를 존중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할까? 여러 선배 의사 선생님께 여쭈었다.


S 대학병원 감염내과에 근무하시는 L 교수님께서도 의사의 권위의식을 짚으셨다. 환자를 존중하기 위해서는 Sympathy(동정, 연민)가 아닌 Empathy(공감)가 필요하다고 하셨다. 드라마에서 ‘값싼 동정 따윈 필요없어.’라는 대사가 나오듯, Sympathy(동정, 연민)는 자신보다 힘든 사람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우월의식이 깔려있다. 상대의 힘든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그렇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에 비해 Empathy(공감)는 같은 입장이 되어 상대의 아픔을 오롯이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게 환자와 의사의 눈높이를 맞출 때에 비로소 의사는 지식에 매몰되지 않고, 환자를 중심에 놓고 그의 고통을 이해함으로서 진정으로 환자를 위한 진료를 할 수 있을 것이다. Empathy(공감)는 특히 죽음을 앞둔 환자와 그 가족을 만날 때 필요할 것 같았다. 누구나 자신의 죽음은 처음이라 혼란스러울 것이다. 내가 얼마안가 이 세상에서 영영 사라진다는 것을 알게된다면 질병만 신경쓰는 것이 아니라 전체 인생을 곱씹으며 불안, 두려움, 후회, 슬픔, 행복, 감사 같은 온갖 감정이 오고갈 것이다. 잘 죽는 것에 대한 가이드가 없다면, 죽음에 가까운 시기가 인생 그 어느 때보다 연약하고 불안정한 시기가 아닐까. 그래서 Empathy(공감)를 바탕으로 말기 환자와 가족을 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여쭈었다.


L 교수님께서는 죽음을 앞둔 환자를 많이 보다보면 의사 스스로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회피하느라 환자가 죽음을 준비하는 것을 돕지 못한다고 하셨다. Empathy(공감)를 위해서는 의사 스스로 죽음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고 좋은 죽음이 무엇인지에 관한 나름의 철학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이는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임상 경험이 쌓이면서 점점 바뀌고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하셨다. 


미국 완화의학 전문의 L은 환자를 치료 대상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만난다는 생각을 항상 해야한다고 하셨다. 병원에 있는 환자로서의 모습만 보는 데서 나아가 이 사람 자체를 알고 싶다는 생각이 필요하다. 구체적인 방법을 말씀해주셨다. 환자가 살아가면서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무엇인지, 무엇이 그 분을 웃게 하는지, 친한 사람은 누구인지처럼 환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조언해주셨다. 그것이 환자의 존엄성을 지키는 데에 그리고 의사와 환자 관계를 맺는 데에 중요하다고 하셨다. 호칭도 함부로 부르지 않고 뭐라고 부를지 여쭤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하셨다. ‘어르신’도 실례가 될 수 있고, 결혼한 적도 없는데 연세가 있다고 해서 ‘어머님’이라고 하는 것도 실례이다. 처음에는 이름으로 부르다가 과거 직업이 선생님, 교수님, 사장님, 박사님 등이었다면 그렇게 불러도 괜찮을지, 뭐가 더 나은지 물어보면 환자는 더 존중받는다고 느낀다.


또한 의사는 시한부 판정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죽음을 앞둔 환자의 마음을 온전히 아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겸손하게 배워야 한다고 하셨다. 우리는 언제든지, 누구든지 아플 수 있고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올 수 있다. 환자가 지금 병원에 있고 내가 지금 의사이기 때문에 내가 그를 돕고 있지만, 누구도 다음 순간을 예측할 수 없다. 누구나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때가 있고 그 순간에 도움을 잘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용기이고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요소이다. 그리고 우리가 환자를 돕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의사가 환자에게서 항상 배우기 때문에 어쩌면 환자와 의사는 서로 돕고 있는지도 모른다. 환자분께 배운다는 겸손한 마음이 환자를 존중하는 바탕이 된다.  


S 대학병원 정신과에서 말기 환자를 주로 진료하시는 P교수님께서는 사람이 만났을 때 서로 만들어내는 심리적 공간이 편안하도록 노력해야 함을 강조하셨다.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 공간이 있는가 하면, 별 얘기를 하지 않아도 환영 받는 느낌이 들고 편안해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어도 괜찮을 것 같은 공간이 있다. P교수님은 환자와 의사가 만났을 때 이 편안한 심리적 공간을 경험하는 것이 환자와 의사에게 모두 중요하다고 하셨다. 환자에게 어떤 말을 할지 고민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환자와 의사가 심리적 공간을 따뜻하게 만들어내는 것이다. 지적하거나 간섭하거나 강요하지 않고 환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고 기다려주는 따스함이 필요하다는 뜻인 것 같았다. 당사자인 환자는 주변에서 간섭하지 않아도 이미 스스로 가장 고통스러워하고 있는데, 환자의 마음이 충분히 열리지 않은 상태에서 받는 도움은 오히려 그분을 더 힘들게 한다. 환자는 의사가 자신을 존중하고 있는지 아닌지 예민하게 느낀다. 그 존중받는 분위기에서 환자도 힘을 얻어서 삶과 죽음에 대해 갖고 있던 고민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한다. 환자에 대한 존중은 이 따뜻한 심리적 공간을 만드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 사이, 즉 인간(人間)이라고 하나보다.


의료는 환자를 위해 존재한다. 바쁘다는 핑계로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환자를 존중하는 것은 앵무새처럼 환자와 의사는 동등하다고 말만 해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환자와 의사는 동등하지 않다. 환자는 약자다. 오히려 그것을 인정해야 진정한 존중이 가능하지 않을까. 어린이, 노약자를 만날 때 그들이 약하다는 것을 모두가 인정하기 때문에 양보하고 보호하는 것이 아닌가. 거기엔 권위의식이 없다. 같은 인간으로서 본능적인 측은지심을 느껴 그들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다. 맹자는 측은지심을 설명하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우물에 기어가 빠지려는 모습을 볼 때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도 모르게 달려가 아이를 구할 것이라고 했다. 칭찬을 들으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아이 부모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것도 아니며, 비난받기 싫어서 하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본성에서 우러나와 불쌍하게 여기고 돕는 마음을 맹자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 했다. 그리고 측은지심은 남을 사랑하는 마음과 이어진다고 했다. 서양에서 말하는 Empathy(공감)도 근본에는 남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 환자의 모습은 우리의 미래이기도 하다. 실 한 올은 끊어지기 쉽지만 한올한올이 모여 실타래가 되고 밧줄이 되면 강한 힘도 견뎌낼 수 있다. 환자와 의사의 연대로 만들어진 서로에 대한 따뜻한 믿음이 가득 찬 공간에서 비로소 두려움과 외로움을 떨쳐내고 치유력이 생길 것이다. 죽음을 마주하는 것은 환자 혼자일지 몰라도 그 외롭고도 용감한 걸음걸음을 내가 지켜보고 응원하겠다고 알려주는 것이다. 그것이 사랑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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