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제니에게 남기는 편지
"난, 엄마가 진짜 싫었어!! 공부 안 한다고 맨날 혼나고 언니랑 비교나 하고 말이지. 그때부터 내 자존감의 바닥이 시작된 것 같아."
"야!! 말도 마. 나는 동생이랑 싸운다고 아주 그냥 등짝을 어찌나 맞았는지 몰라."
제니야, 며칠 전 엄마가 친구들 만나고 왔잖아? 그때 엄마 친구들이 했던 얘기들이야. 요즘 들어 자주 할머니들 얘기를 하곤 해. 서운했던 이야기들을 말이지.
그래서 엄마도 생각해 봤지.
내 엄마는 어떠셨더라.
근데 딸... 엄마는 우리 엄마, 그러니까 제니한테 외할머니지.
응, 외할머니 생각하니 그냥 웃음만 나오더라. 그리운 마음만 올라오고 말이지. 그냥 보고 싶고 그랬어.
할머니 하고 좋은 기억이 많아서 그런 건 아닌 것 같아. 할머니는 너무 바쁘셔서 엄마에게 잔소리 따위는 하지 않으셨거든. 잔소리 들을만한 일을 안 해서라기보다는 할머니가 엄마의 모습을 보지 못하셔서 일 거야.
제니가 알다시피 할머니는 장사하시느라 늘 바쁘셨고, 엄마는 그런 할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컸거든.
엄마가 다섯 살 때였던 것 같아. 여섯 살이었던가? 아마 그쯤인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집에 아무도 없는 거야.
'아.. 언니들, 오빠는 학교에 갔나 보다.'
동네가 조용하고 해가 밝은걸 보고 그렇게 생각했나 봐.
그리고 엄마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일하시던 가게까지 걸어갔어. 중고등학교 때 걸어서 10분 이상은 걸렸을 거리니까, 아마 그 나이 때는 20분 이상 걸리지 않았을까?
골목골목을 걸어 내려오다가 오락실 구경도 하고 슈퍼 구경도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하면서 걷다 보면 할머니가 보였지. 가게 안에 딸린 작은 방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하루를 보냈던 기억들이 엄마한테는 많이 남아 있어.
그래서 엄마 친구들이 자신의 엄마 이야기를 할 때, 솔직히 엄마는 살짝 슬펐어.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한테 어리광 같은 걸 부려본 기억이 없거든.
아! 딱 한 번 기억난다. 어리광이라기보다는 갖고 싶은 걸 얘기했던 기억.
비닐로 된 지갑인데 딱지 접듯이 삼각형으로 접다 보면 지갑이 되던 거였어. 목에 거는 거였는데 그게 너무 갖고 싶어서 할머니한테 사달라고 얘기했었어. 엄마의 얘기에 할머니가 어떻게 하셨게?
문방구 몇 군데를 같이 가서 찾아서 사주셨지. 그때의 냄새, 빨간 지갑의 촉감 들이 엄마는 아직도 생생하게 느껴져. 눈 감으면 바로 그곳으로 갈 수도 있을 것 같은...
제니야, 엄마는 할머니한테 어리광을 부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왜 그랬을까? 엄마의 언니들은 동네 유명한 날날이들이었거든. 그때는 빵집에서 남학생들과 단팥빵만 먹어도 학교에서 문제아로 찍혔던 때였어. 그래서 언니들 때문에 할머니가 마음고생을 하는 걸 보고, 난 절대 엄마 마음 아프게 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공부 열심히 해서 할머니, 할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어. 아니 칭찬을 받고 싶었던 것도 같아. 할머니가 환하게 웃으며 엄마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느낌이 그렇게 좋더라고.
엄마가 어른이 되고 나서도 할머니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려왔어. 고생만 하시다가 돌아가신 것 같아서... 서운한 것들이 있었지만 그 당시 할머니 할아버지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어. 이해를 해야 엄마 마음이 편했던 것 같아.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하면 그나마 내가 사랑받는 아이였다는 확신이 들었거든.
몇 년 전, 엄마가 마음공부를 할 때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해 못다 한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 있었어. 특별히 할 말이 없었는데... 그랬는데... 엄마가 처음으로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해 서운하고 섭섭했던 것을 울면서 얘기했었어.
왜 그러셨냐고? 부모로서 해야 될 역할을 왜 언니에게 맡겼느냐고... 나를 왜 외롭게 했느냐고. 너무 외로웠다고 말이지. 그렇게 한 참 뜨거운 눈물을 소리 없이 흘렸었어.
제니야, 엄마가 갖고 있는 생각 중에는 '누구를 귀찮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이 있었어. 이것을 신념이라고 해. 엄마는 이 생각 때문인지 회사생활 할 때도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귀찮아할 거리를 만들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아. 그래서 솔직히 말하면 제니 네가 엄마를 귀찮게 할 때면 엄마는 마음이 불편했어. 엄마 바쁜 게 안 보이나? 이 아이는 왜 내가 바쁜 걸 모르고 엄마를 귀찮게 하지...라고 말이야.
엄마는 왜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을까...
엄마가 지금의 제니보다 어렸을 때부터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아. 누군가가 엄마를 귀찮아할까 봐 두려웠던 것 같아. 그럼 너무 슬플 것 같았거든. 그래서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의 캔디 노래처럼 그렇게 지냈던 것 같아. (근데 캔디 노래 모르지????)
그런데, 제니야.. 엄마는 이제 그 생각을 지우려고 해.
이해는 부모가 하는 것이지 아이가 하는 것이 아니거든. 이해를 받고 자란 아이는 커서 자신의 아이를 이해하면 되는 거였어. 어린아이는 부모의 사랑을 갈구해도 괜찮고 부모에게 불편한 마음을 내비쳐도 괜찮은 거였어. 엄마는 그걸 늦게나마 마음으로 알게 되었어.
제니야, 엄마를 귀찮게 해도 괜찮아. 불편한 마음도 이야기해도 괜찮아.
딸인데 그럴 수 있지. 엄마한테 안 하면 누구한테 하겠어.
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해도 당연히 괜찮고 세상에게도 괜찮아. 혼자 애쓰지 않았으면 좋겠어.
오늘의 편지가 좀 길지? 중간중간 스킵하며 읽을 너의 모습에 웃음이 나온다.
(사실, 엄마가 너에게 건네는 말을 몇 줄 더 적었는데... 너무 꼰대 같아서 지웠어.)
어쩜 엄마 자신에게 하고 싶었던 말,
어쩜 재미있을지도 모를 엄마 얘기를 너에게 하고 싶었어.
이 글을 보고 너는 어떤 마음이 드니?
너의 마음과 생각이 궁금한 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