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와 튤립을 길들인 마음
나의 모자란 표현과 글이 불러올 오해와 반감에 대한 진지한 책임감을 등에 지고 긴호흡의 글을 써보고자 합니다.
나의 행복 조건은 말하자면 자연과의 스킨십에 있다. 그래서인지 캠핑을 좋아하고 마당 있는 주택을 지어서 살고 있으며 가드닝으로 주말에 행복 충전을 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나의 행복을 잘 믿지 못한다. 나의 행복을 굉장히 미심쩍어하는 그분들의 마음속엔 전원생활을 위해 투자해야 하는 시간과 비용과 에너지가 허들처럼 줄지어 서서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픈 것 같다. "무수한 벌레, 한여름 정글처럼 자라는 풀, 끊임없이 고쳐야 할 무언가, 끊임없이 지출해야 할 무언가 등등의 과제를 네가 모두 거뜬히 해치우고 지금 행복하다고 말하고 있는 건 아니지?" 라는 표정이다. 나에게 벌레나 풀은 이제 재미있는 파트너처럼 여겨지고 고쳐야 할 무언가는 주말 동안의 도파민 돋는 도전과제 정도이며 지출해야 할 무언가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허들이 맞다. 그런데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가 행복한 이유를 누군가는 꼭 알았으면 한다.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 그 자체만으로 여러 불편을 감내하면서 느끼는 행복일까 하면 꼭 그렇지는 않다. 자연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즐겨서만 행복한 건 결코 아니다. 캠핑 이야기가 먼저 떠올라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한다. 캠핑의 묘미는 야생에서 안락한 하룻밤을 보내고 대자연의 아침을 맞는 것이고 그 아침을 맞을 때는 평소 즐기던 커피나 차 한잔이 함께 해야 한다.(어찌 보면 캠핑이란 나에게는 가장 행복한 티타임을 위한 과한 설계라고 할 수도 있겠다) 지난밤의 안락함은 내 방의 침대와 같은 안락함은 아니겠지만 야생과의 대비를 통해 맛보는 상대적 안락함이다. 그래서 그 대비가 클수록 재미가 있다. 최대한의 야생과 최대한의 안락함. 그 대비를 더 키우고 싶어서 기발하고 재미있는 캠핑 장비를 기웃거리게 된다. 캠핑의 묘미는 장비를 사용하고 즐기는 데 있다. 자연 자체를 즐기기보다 비싼 캠핑장비를 이것저것 사들이면서 재미있다고 한다면 뭔가 실망스러울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속에서 인간이 가진 원초적 열망을 느낀다. 도구를 갈구하는 존재라는 점이다. 자연을 나에게 맞게 조정하고 변형할 수 있는, 또는 야생 속에서도 인간의 생활 방식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도구를 가지게 된 인간이 느끼는 순수한 재미가 느껴진다는 것이다. 기쁨이라는 단어보다는 재미라는 단어가 아무래도 더 정확하다. 재미가 있다. 나는 도구에 정말 흥미를 느낀다.
전원생활도 마찬가지다. 마당이 있는 생활은 캠핑보다 일상적인 프로젝트로 자연을 길들이고 조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훨씬 더 재미가 있다. 마당생활을 하는 나의 행복한 한순간을 묘사해 보면 이렇다. 봄기운이 완연해진 그 해의 첫 일요일 아침 나는 늦잠도 마다하고(가슴이 설레어서 사실 전날 저녁부터 아침이 되기만 기다린 상태이다) 새가 지저귀는 마당에 나가 에너제틱한 청록빛이 매력적인 독일 가데나 사의 전정가위를 들고 우거진 장미 가지를 찬찬히 살펴보며 톡톡 잘라낸다. 따라 나온 작은 강아지는 신나게 마당을 헥헥거리며 탐험하고 타이거 같은 고양이는 그늘에 길게 늘어져 등을 풀밭에 비비고 있다. 서서히 식어가는 커피를 한 모금씩 마시며 나의 소우주, 작은 생태계를 장악하고 즐기는 그 순간 나는 완전한 행복을 느낀다. 그런데 이렇게 나를 행복하게 하는 정원의 장미, 움터 오르는 튤립구근은 자연스러운 것들일까? 별로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장미는 핑크나 살몬 계열의 여리고 섬세한 색이며 실크처럼 부드러운 잎사귀들이 아름답게 오므린 봉우리를 보여주고 피어날수록 풍성하고 화려하게 엄청난 꽃잎을 지녀야 한다. 향기는 단순한 장미향을 넘어 신비롭고 복합적인 향을 가져야 한다. 그런 장미가 봄부터 초겨울까지 연속 개화해야 하고 추위에도 강하게 살아남아 다음 해 봄에 기운찬 새 가지를 쭉쭉 뻗어 올려야 하며 병충해가 와도 이겨내고 꽃을 피워야 한다. 원래 야생의 장미가 이런 꽃이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영국의 데이비드 오스틴 사나 독일의 코르데스사, 프랑스의 메이양, 일본의 로사 오리엔티스 등의 회사에서 수많은 육종과 교배 실험 끝에 만들어낸 발명품들이다. 그래서 이러한 장미들은 개발 회사에 로열티를 주고 묘목을 구입해야 한다. 이른 봄 가드너의 마음을 가장 일찍 설레게 하는 튤립, 황폐한 갈색 흙더미를 뚫고 초록빛으로 올라와 마치 지난가을 묻어둔 적금이 이자라도 불려서 갑자기 나타난 듯 행복의 비명을 지르게 하는 튤립 구근도 마찬가지이다. 역시 엄청나게 길들여지고 조정된 자연이다. 나의 사랑스러운 강아지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이 좋아하고 원하는 다양한 형질을 맞춤형으로 구현한 수많은 견종은 철저히 인위적인 노력의 결과이다. 인간이 조정한 것이다.
이렇듯 장미를 길들이고 튤립을 길들인 마음은 무엇인가. 인간은 자연을 인간이 공존할 수 있는 대상이 되도록 조절하고 변형하고 바꾼다. 이것을 예술이라고 한다면 아마 거부감이 들 것 같다. 하지만 영어에서 예술 art라는 단어는 artificial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고 알고 있다. 인위적이다!라는 찬사로부터 예술이라는 것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한자의 예술(藝術)도 마찬가지이다. 藝와 術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재주를 의미한다. 내가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굳이 장미와 튤립의 이야기를 한 것은 자연과 예술의 경계가 애매한 것을 통해 자연과 예술을 구분해보고자 한 것이기도 하고, 인간이 가지는 원초적 동기와 흥미, 재미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에 대한 탐구심 때문이기도 하다. 자연을 일구고, 경작하고, 바꾸어서 공존하는 것이 인간의 지극한 재미가 아닌가. 그래서 나는 가드닝 도구에도 눈길이 간다. 가드닝을 즐기는 사람들은 누구나 도구함에 독일가데나 사의 청록빛 도구들을 나란히 걸어놓는데 기쁨을 느낀다.(물론 나의 경험 범위 안에서 하는 이야기이다) 튼튼하게 기능하고 견고하면서도 미학적 만족감도 놓치지 않는 전통이 빛나는 정원생활의 동반자이다. 자연에 몸을 맡기고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며 자연과 하나가 되는 기쁨도 물론 지극하겠지만 거기에 이르기 전에 자연을 일구고 통제하고 공존할 수 있는 적절한 장치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오는 재미가 인류 문명 발달의 크나큰 비밀이라고 나는 상당히 진지하게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