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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 Aug 20. 2023

친절하진 못하지만 다정한 사람





친절은 누군가에게 '해야 하는 말을 하는' 거라면, 다정은 누군가에게 '하고 싶은 말도 있고 듣고 싶은 말도 있다'는 뜻이다. 친절을 조금 더 친절하게 설명하자면(더 애매모호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지만), 예컨대 월요일 아침에 출근해서 동료에게 '주말에 뭐 하셨어요?'라고 먼저 물어보는 것은 친절에 가깝다. 만약 동료의 굳은 얼굴이 월요일 내내 신경 쓰여 응원의 한마디를 해주고 싶다거나, 주말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다정에 가깝다.


그 애매모호한 차이는 관계에서의 상처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누군가는 타인에게서 다정을 바라지만, 누군가는 타인에게 베풀 수 있는 게 친절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 바라는 만큼 상처를 받고, 더 내어주지 못한 만큼 오해를 받는다. 그러나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 다들 나름의 이유가 있다. 명확한 경계를 긋고 독립을 추구하는 사람, 문을 열기까지 시간이 필요한 사람, 연결을 갈망하는 사람. 타인을 수용하고자 하는 정도와 또 그 정도를 결정한 이유까지 다르다. 가늠할 수 없는 수많은 가능성들이다.


난 친절하지 못하지만 다정한 편이다. '주말에 뭐 하셨어요?'라는 질문은 낯간지럽지만, 동료들의 굳은 얼굴은 언제나 내 마음을 흔든다. 쉽게 누군가에게 이런 마음을 품는 나는, 기본적으로 누군가 나에게 실수를 한다거나 혹은 미워한다고 하면 외면하기보다 그 사람을 이해하려 애쓴다. 그만큼의 감정적 어려움을 감수해야 하는 기질이기도 하다. 다정은 당신을 좋아하는 만큼 당신에게 서운하고, 당신을 사랑하는 만큼 당신에게서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종종 '죽음'을 주제로 대화하는 날이면 주저하지 않고 죽음이 두렵다고 말한다. 내가 사라지는 것 자체는 두렵지 않지만, 적어도 나를 스쳐간 모든 사람들에게 해줄 얘기가 한마디 씩은 있어서 그리고 그들에게 듣고 싶은 말도 있기 때문이다. 그럴 기회를 앗아간다는 점에서 난 죽음이 두렵다.


브런치 글을 보고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손에 꼽는 친구이지만, 타고난 무뚝뚝함 덕에 잦은 연락은 하지 못했다. 글을 잘 읽었다는 소감에 나는 또 낯간지러워, 알림으로 내용을 확인하고 나서도 디엠 창을 한동안 열어보지 못했다. 별다른 말 없이 고마움만 간신히 전했다. 그래도 그 친구의 낯간지러운 소감문은 한동안 내게 큰 힘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다정은 하지만 친절하지 못한 탓이다.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도 먼저 손을 내밀지 않는 편이지만, 언제나 당신들을 생각하고 당신들의 마음을 생각한다.


그러니 이렇게 남기는 글들은 일종의 유언장이 아닐까 싶다. 언젠가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에 대비해 하고 싶은 말들을 잔뜩 남겨 놓기 위함이다. 살아가다 어떤 순간에 내가 남긴 글을 보고 '어? 이거 내 얘기 아냐?'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건 당신 얘기가 맞다. 친절하지 못한 탓에 자주 당신들을 찾지는 못했고 어쩌면 이미 늦어버린 관계가 되었을지라도, 그 틈을 꾸역꾸역 매우려 이렇게 글을 쓴다. 읽어만 준다면 그걸로 충분히, 듣고 싶은 말은 들은 셈 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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